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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millionaire

난 도저히 안되겠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당시 총질을 해대고 곤봉을 든 전 공수부대원들의 신상을 공개한다... 살아있으면 처벌해야 하고 죽었으면 부관참시다....

새로운 정권은 이것부터 추진한다...

 

현재 70대 노인네들로 반성이나 트라우마 없이 어딘선가 살아 있을 놈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 10일간 한번이라도 총질을 해대고 곤봉을 휘둘렀다면 전부 소환조사후 다시 죄를 물어야 한다...

 

이래야 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 대한 진정한 정의와 공정이 실현될꺼 같다... 행불자 81명(내 외삼촌 포함)을 어디에다 버렸는지 난 알아야겠다... 하여튼 새로운 정권은 이 게쓰레기를 단 한명이라도 찾아내야 한다...

 

단지 상관에 명령이라는 미명하에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기본적인 양심마저도 버린 것들이 분명히 어디에서인가 숨쉬고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런 것들이 여전히 비상계엄을 주도하고 법원을 습격하고 내란의 망령에 빠져 있음이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내란 수괴를 배출하고 극우 꼴통들의 모임처, 수장 김 문수와 국민의짐... 처돌았냐... 5.18 진압 주도 특전사령과 정 호영이를 입당시키려고 했다고... 이 새끼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사형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 "택시운전사"는 다 봤고, "화려한 휴가"도 마저 땡길까, 기분 드러워서 이발/염색하러갈까 장고중...

 

 

1980년 5·18 당시 광주 동구 금남로 전일빌딩 주변 모습.

 

 

5·18 민주화 운동의 최초 희생자 고(故) 이세종 열사의 의복과 수험표.

 

 

계엄군이 길거리에서 시민을 폭행하고, 버스에 탄 시민들을 끌어내기 위해 올라타고 있다.

 

 

계엄군 앞에 부서진 택시가 방치돼 있다.

 

 

공수부대 집단 발포가 이뤄진 금남로 모습.

 

 

1980년 5월18일 신군부 세력에 반발한 광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다. 사진은 1980년 당시 광주광역시 모습.

 

 

45년 전 5월18일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이 계엄군의 총칼과 맞섰다. 사진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무관 희생자의 관위에 놓인 태극기와 광주시민들 모습.

 

"야이 세끼야, 전국적 국민한테 겁대가리없이 대드는 것들이 무슨 무고한 내란범들이야~~" (모질이들 집합소 국짐을 돌아보며) "이것들이 이거 정신 못차리지이~~"로 갈음한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61

 

위 대사는 "화려한 휴가"

극중 7공수여단장의 대사를 각색한 겁니다...

 

지난 주말에 지난주 "비상계엄:해제" 관련 네 편의 영화를 다 봤는데,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보다는 "1980", "화려한 휴가"를 보면서 더 이를 갈았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나 골백번은 본 "화려한 휴가"에서 몽둥이를 휘둘르던 7공수여단 군인들을 보면서는 저도 몽둥이 들고 "국민의짐" 국회의원들 다 패주고 싶었고요... 몇 명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영화속 또 다른 공수부대원의 목소리도 들리네...

"잘못했으면 맞아야지이... 이 씨발놈아... 안 그러냐~~"

 

그 "화려한 휴가" 안보신 분들은 없겠죠...

그런 분들이라면 제 블로그에서 나가주시고요...

저하고 안맞는 분들입니다...

 

 

지난주 "비상계엄:해제"관련 네 개의 영화는 이 주말에 다 봤고요... 누군 5.18 관련 외삼촌 시체도 못찾고 있고만 44년전 내란반란 수괴밑에서 주동자 역할을 허 화평이는..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51

 

잘 살고 있네요...

 

1979년 12월12일(일명 12.12 사태)에 내란을 일으키고 반란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살인마 전 두환이 밑에서 오른팔 역할을 했던 보안사령관 전 두환의 비서실장이였던 5공의 설계자 개세끼 허 화평... 육군참모총장 정 승화 장군을 체포했던 보안사 인사처장 허 삼수, 80년대에 주요 글쟁이/기자 탄합에 주동자 역할을 했던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던 허 문도... 이 3허에 수도경비사령부 장 태완 장군 소속의 30경비단장으로 그 상관을 배신하고 살인마 전 두환이게 붙허 반란군의 근거지를 제공하고 5공에서 전 두환 2인자로 행세했던 장 세동이도 아직 살아 있네... 내란죄는 형법상 사형이나 무기징역밖에 없고만 말이다... 실제로는 내란죄 우두머리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하고 모의에 참여·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할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난 "서울의 봄"을 보면...

 

수도경비사령관 정 우성씨 주인공보다 극중 3허와 장 세동이 역할을 했던 조연들을 더 주목했다... 이 세끼들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거든... 5공의 설계자인 허 화평과 2인자인 장 세동이가 현재 주요 보수 우익 꼴통들의 원조거든...

 

여전히 한국땅에서 '정의사회구현'은 안되고 있고...

국민의 1/3은 여전히 이 보수 정권을 따른다...

상모질이 윤씨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

 

난센스네요.. 1979년 12.12사태때 진압군이였던 수도경비사령부와 특전사령부를 계엄군으로 쓰려고 했던거네... 방첩사령관은 그 당시 헌병감 아니야?? 영화를 거꾸로 해석하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41

 

1979년 12.12 사태때 끝까지 반란군에 저항한 정 병주 특전사령관(부관이였던 그 당시 전사자 고 김 오랑 중령은 명예회복 됐고요, 육본 벙커를 지키려다 특전사 총탄에 전사한 정 선엽 병장도 있습니다.. 잊지 마시라고요... 그 당시에도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애국자들은 있었다고요... 살인마 전 두환같은 깡패를 막을려고요...)과 대포와 탱크로 전 두환을 처단하려고 했던 장 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이 이야기 들으시면 기가 차겠네요... 이 주말에 전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1980", "화려한 휴가"까지 이번주 상모질이 윤씨의 비상계엄 선언과 관련된 네 개의 영화나 정말로 봅니다... 고대 선후배들과 통화도 좀 해야겠네요...

 

이 밤에 영화들이나 봐야겠네..!!!!! "서울의 봄", "1980", "화려한 휴가"... 계엄군도 막지 않는 계엄선포나하는 이런 한심한 대통령을... 다시 글로벌 게망신...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30

 

와하아...................

 

차라리 자주/자립/자조의 확고한 조국 근대화 신념이나 있으셨던 박 정희 전 대통령이 부활하셨으면 좋겠네... 최악의 내수 경기 상황에 글로벌 경제/산업/금융/증시에서 왕따중인 것도 서러운데, 이런 자중지란을 대내외에 보여주는 대통령이라면 나같으면 쪽팔려서 자진사퇴한다... 내려와라... 국민의 과반이상이 선출한 국회의원을 종복세력이라 규정하고, 경제는 폭망에 민생은 도외시한채 굴욕 외교와 행정 난맥상을 보여준 현정권에게 내각 총사퇴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다... 국회의원이야 지역민들이 선택한 것이고 진정으로 국민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이 정도의 자질이라면 이건 아닌 것이다... 야당 대표를 설득못해 대화를 거부라는 아집에 대국민 설득보다는 허울좋은 명분만 내새우는 이런 고집불통의 인간이 대통령이라는게 정말로 쪽팔리니깐이 제에발 내려와라... 그게 국민들을 진정으로 위한 것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비상계엄이냐...

 

오늘밤 외신들이 한국을 어떻게 봤을지....

쪽팔리고 창피해서 죽고 싶다...

 

 

[뉴스속 오늘]"닥치는 대로 살상" 피로 물든 광주… 분노한 시민들, 금남로 뒤덮다...

 

 

한국전쟁 이후 민족 최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는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한 지 올해로 45주년을 맞았다. 1980년 5월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민중항쟁은 '폭동'과 '사태'로 불리던 왜곡의 시기를 지나 '민주화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5·18 민주화 운동은 이후 전개된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됐을 뿐 아니라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 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상계엄 확대→계엄군 광주로…

최초 희생자 이 세종 열사...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직후 내려진 비상계엄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1980년 5월18일 새벽 0시 전국으로 확대됐다. 신군부는 즉시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하고

 

국회·교도소·언론사 등 109곳엔 계엄군과 전차 4대, 장갑차 60대를 배치했다. 또 비상계엄 해제를 위한 임시국회를 막기 위해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동시에 '계엄포고령 제10호'도 발령했다. 모든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출판·보도·방송 사전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이 골자다.

 

보안사령부는 전두환 지시에 따라 소요 배후 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검거하라고 전국 보안부대에 지시했다. 이에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들과 전남대 복학생 등이 연행돼 합동수사단에 끌려갔다.

 

비상계엄 확대는 전국 대상이었지만 신군부의 실제 목표는 광주였다. 계엄사령부는 시위 진압에 특화된 공수부대를 광주에 배치했다. 전남대·조선대 학생 수십명은 새벽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에 모두 연행됐다.

 

전북대에선 첫 희생자가 나왔다. 계엄 철폐를 외치며 밤샘 농성을 벌이던 농학과 2학년 이세종 열사(당시 20세)가 학생회관 옥상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수사기관은 단순 추락사로 처리했지만 이후 집단폭행 의혹이 제기됐다. 44년이 흐른 지난해 이 열사는 5·18 민주화운동 최초 희생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광주 시내까지 장악한 공수부대…

청각장애인 김 경철씨 희생...

 

18일 아침이 되자 학생 100여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들었다. '휴교령이 내리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이자'는 행동 지침을 지킨 것이다. 교문을 지키던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에게 진압봉을 휘둘렀다.

 

이들은 군홧발에 쫓기며 광주 동구 금남로로 진출했고, 시위대는 500여명으로 불어났다. 그러자 군은 이른바 '화려한 휴가'라고 불리는 진압 작전을 개시한다.

 

곧이어 광주 시내에도 공수부대가 들이닥쳤다. 이들은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 불문 쫓아가 진압봉과 대검으로 폭행한 뒤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다. 공수부대원들은 김씨가 장애인증을 내미는데도 무차별 폭행했다. 온몸을 구타당한 김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당시 그는 백일이 갓 지난 딸을 둔 28살 아빠였다.

 

당시 계엄 상황 일지에 따르면 18일 하루 동안 광주에서 연행된 사람은 모두 405명이다. 대학생 114명, 전문대생 35명, 고교생 6명, 재수생 66명, 일반시민 184명 등이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대검 사용에 의한 부상)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돼 있다.

 

광주 진압 나선 2만 병력…

분노한 10만명 금남로 뒤덮어...

 

신군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하루에 1개 부대씩, 18일부터 사흘간 2800여명을 광주에 내려보냈다. 21, 22일엔 보병 병력도 4100명 가까이 보냈다. 공수부대와 보병을 합쳐 모두 7000명에 달하는 추가 병력이 서울 등 외부로부터 광주에 투입된 것이다.

 

여기에 광주 주둔 병력과 계엄군까지 더하면 총 2만 병력이 민주화 운동에 나선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진압 작전을 자행했다.

 

19일 일반 시민들이 금남로에 합세하면서 시위대 규모가 천 단위로 커졌다. 밤중에 추가 투입된 공수부대는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엔 부상자들이 줄지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동구 계림동에선 한 고등학생이 계엄군 총에 맞아 크게 다치기도 했다. 그러나 계엄 당국의 철저한 통제 탓에 광주 상황에 대한 보도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20일 새벽 노동자 김안부씨(당시 35세)가 머리 총상을 입고 집 주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계엄군 총격 첫 사망자다. 이후 10만명 넘는 인파가 금남로로 몰려들었다.

 

택시 200여대도 헤드라이트를 켠 채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공수부대는 최루탄으로 맞섰지만 열세에 몰렸다. 군경 저지선은 금남로 3가에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밀렸다. 이날 차량 시위는 평범했던 시위가 '대중 봉기'로 진화한 계기로 평가된다.

 

애국가 나오자 집단 발포…

10일 만에 유혈 진압된 시민군...

 

분노한 시민들이 광주 MBC·KBS 방송국과 광주세무서에 불을 지르는 등 심야 시위를 벌이자 군은 21일 오전 대규모 보병 병력을 광주로 투입하고 가스 살포용 헬리콥터까지 동원했다.

 

이어 오후 1시쯤 도청에서 흘러나온 애국가를 신호로 군은 금남로의 군중을 향해 집단 발포했다. 저격병들은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가 비무장 상태 시민들을 조준 사격했다.

 

이날 이곳에서만 최소 54명 이상이 총격으로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쟁은 광주 시내를 벗어나 전남지역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격분한 시민들은 광주와 화순, 나주, 함평 등지 경찰서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공수해 무장했다. '시민군'으로 불린 이 무장 시위대는 22일 도청 장악에도 성공한다.

 

이후 항쟁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정부의 협상, 시민 궐기대회, 도청 사수작전의 양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27일 오전 2만여명의 군인, 탱크, 헬기가 동원된 대규모 군사작전에 의해 10일 만에 유혈 진압됐다.

 

5·18 기간 피해자는 총 5517명으로 밝혀졌다. 18~27일 사이 사망자는 155명, 부상 후 숨진 시민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 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6월 항쟁 발판된 5·18…

전두환 '무기징역'·노태우 '17년'→사면...

 

5·18 민주화 운동은 10일 만에 막을 내렸지만 훗날 민주화 운동을 이끈 세력에 방향성을 제시했다.

 

자식, 친구, 부모를 잃은 광주시민의 한(恨)은 민주화 운동 세력에 동기와 용기, 구심점이 됐고, 광주 학살을 이끈 신군부에 대한 반감은 지식인과 재야인사, 학생 등에 한정됐던 민주화 세력을 모든 국민으로 확산시켰다.

 

잠재했던 공동체의 힘은 1987년 6월 항쟁에서 폭발한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한 뒤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 특별위원회 구성,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5·18의 진실이 상당 부분 드러났다.

 

이후 5.18 특별법,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이 제정되면서 유혈진압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뤄졌다.

 

전두환, 노태우 등 12·12군사반란과 5·18내란 주동자 15명은 모두 유죄를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에서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징역 17년형을 확정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8개월 뒤 김 영삼(처돌아가지고서리 내가 이 양반을 '민주화 정치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 정부 특별사면으로 모두 석방됐다.

 

이후 5·18에 대한 사과의 뜻을 종종 비춘 노 태우는 2021년 10월26일 먼저 눈을 감았다. 반면 전두환은 끝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다가 한 달 뒤인 11월23일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져 숨졌다.

 

머니투데이 김 소영 기자

 

 

[오늘의 역사]군부 총칼에 맞선 광주시민… 피로 지켜낸 민주주의...

 

 

1980년 5월18일 광주광역시(당시는 직할시) 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의 함성으로 가득했다. 당시 서울 대학가에서는 '서울의 봄'이라 불릴 만큼 민주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으나 실상은 반대로 흘렀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총칼로 무장한 계엄군, 그에 맞선 광주시민…

민주주의를 외치다...

 

군부를 장악한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을 포함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수천명을 감금하고 국회를 봉쇄했다. 이후 서울 대학가에서는 이를 규탄하기 위한 집회가 시작됐으나 학생 시위는 무력으로 진압됐다.

 

5월18일 광주에서도 격렬한 항거가 시작됐다. 전남대학교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 시민들의 참여로 번졌고 신군부는 11공수여단 병력을 투입해 이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원은 운동권 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살상하고 폭행했다. 곤봉과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에 맞선 시민들은 점차 조직적인 저항에 나섰고 시위는 도시 전역으로 확산했다.

 

며칠간의 충돌 끝에 5월21일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도청 앞에서 울려 퍼지는 애국가에 맞춰 집단 발포를 감행했다. 이날은 5·18 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됐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면서 시민들은 생존을 위한 저항자로 나서게 됐다. 결국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무기를 확보해 무장했고 계엄군은 같은 날 시내에서 철수하며 도시는 일시적으로 시민군의 통제 속에 놓였다.

 

그러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광주의 진실은 중앙 언론에 의해 철저히 차단되거나 왜곡됐고 정부는 이를 '폭도들의 반란'이라 주장했다. 고립된 광주는 다시 계엄군의 폭력에 휘말렸다.

 

5월27일 새벽 계엄군은 탱크와 중화기로 무장한 채 도청 진입 작전을 개시했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던 시민군은 거의 전멸했고 광주는 다시 철저한 통제 아래 들어갔다.

 

공식 사망자 수는 163명이지만 당시 실종자와 부상자,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이들까지 포함하면 피해 규모는 수천명에 달했다.

 

뒤늦게 알려진 광주의 진실…

45년이 지나도 고통 속에 사는 시민들...

 

이 참상은 독일 제1공영방송 ARD의 위르겐 힌츠페터(영화 "택시운전사"의 그 독일양반) 기자에 의해 알려졌다.

 

그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과 그 참상을 세계에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는 국제 사회의 압박과 국내 민주화 세력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주었고 민주화 흐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광주의 진실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조금씩 드러났다.

 

1988년 국회 청문회를 시작으로 1995년에는 '5·18 특별법'이 제정됐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 및 반란죄 혐의로 기소됐다. 법원은 이들에게 무기징역과 수천억원대 추징금을 선고하며 역사적 책임을 물었다.

 

하지만 45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5·18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 중 상당수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고 있다.

 

오수성 전남대 교수 연구진은

 

5·18 유공자 중 부상자와 구속자는 정당한 이유 없이 신체적, 정신적 상해를 입은 성폭행 피해자나 난민, 고문 피해자 등 인권 유린 피해자와 유사한 경험을 해 상당수가 PTSD 증상을 호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머니투데이 강 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