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부작이라 추석전까지 시간은
넉넉히 확보했고요^^
6월 한달만 폭등한후 3개월째 지리한 보합권 등락의 횡보장세를 이어가고 있는 추석전 코스피 상황도 6월이후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코스닥(KOSDAQ)도 3200p/800p대 벗어나 3500p, 4000p/900p 돌파는 기대난망하고요...
현재 월가와 같이 추석전 폭급락한다에 77.7% 걸고요... 추가 상승한다에 22.3% 걸고 대응하라고 주문중입니다... 다섯 제자들에게도 GI 자산운용본부 자산(투자)운용 관계자들에게도요... 추계운용 서둘지말고 차분히 대응하라고요^^
암튼 마음에 안드는 플랫폼 "넷플릭스"로
주요 드라마나 섭렵하게요^^
전 말입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쿠테타는 실패한 쿠테타로 고려 강조의 쿠테타는 성공한 케이스로 보는 역사관을 가지고 있네요... 상모질이 윤씨의 비상계엄이 나라 망하게할 뻔한 것으로
이 재명 대통령은 강조가 목종을 시해하듯이 상모질이 윤씨를 죽이고 국민들이 100년 치세를 바라면서 세운 고려 현종으로 비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상반기내내... 아시다시피...



연개소문의 사수 전투 기록화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흥선대원군과 강조를... 아니 고려시대 중랑장 후순인 충무공 이 순신이상으로 고려시대 양 규 장군과 강 감찬 장군을 알아야... 국짐은 정당해산만이 답.
https://samsongeko1.tistory.com/13286
혈맹(?) 미국 이상으로 왕서방 중국(그 동북공정부터 백두산까지... 이들의 주요 역사 왜곡 문제는 내 통일후에 집중 성토한다... 사실 만주는 원래 고구려 땅이며 한반도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는 이곳도 한민족이 주인이였던 우리 땅... 그러나 아직은 참는다... 분단된 국가의 남한인으로서... 내가 중국 사대주의자라는 일부 비판이 있는데 아님을 강조한다.)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이 재명 대표의 인식은 옳으며 우리와 (양안)대만문제가 뭔 상관인가.... 주변 4대강국은 중립으로 다스려야 한다... 강력한 1억명 내수 경제 체제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북한도 전쟁이 아니고 평화로 자꾸 유도하여 결국 내부 분열에 의한 점진적 통일 방향으로 가야한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는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근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의 인구 2500만명과 재외동포까지 합쳐 1억명은 있어야 우리는 부국강병의 강대국으로 올라설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기본적인 외교는 북한과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주변 4대강국을 우리의 입맛대로 조절하는 중립국 입장으로 기여코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심화되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의 남한의 소멸론이 부각되는 현 시점에서도 그렇고 가까운 미래 보호 무역주의 심화와 신냉전에 따른 자국 중심주의의 폐쇄경제가 대세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 외교정책의 방향은 이것이다... 가까운 미래 북한은 이렇게 예상하고 있는 중이다... 3대째 독재체제로 움직이고 있는 김 정은이 마지막이다... 이 양반 사후전 분명히 내부 붕괴가 일어나고 우린 급속하게 진행될 서독의 동독 흡수합병식 통일에 이제부터라도 대비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양키 코쟁이들부터 왕서방들이 보일 거부 반응과 일본과 러시아의 방해공작을 막아낼 수 있는 외교/국방 정책을 지금부터 수립해야 하며, 미국한테서는 정말로 전작권부터 돌려 받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한반도 남한의 자주적 방위를 방위비나 띁어내 자국 방산업체들의 글로벌 장악을 유지하려는 미국 주도하에 냅둬야 하는가... 양키 코쟁이들한테 언제 돌려줄것이냐고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우린 전작권도 필요하며 우주방위청 이상으로 주변 4강국을 다스릴 항공모함 도입도 필요하며 필요시에는 파키스탄도 가지고 있는 핵무장도 원한다... 이 아침 강력한 민족주의자이자 강성 진보주의자인 게코(Gekko)의 대북관과 외교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에 부합되는 정치인을 후원하고 있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리고 있는 중이다... 이 재명이라... 이 양반 뒤에 반드시 내 외교(국방)관에 부합하는 강력하고 진정한 진보성향의 인물이 나올 것이다... 그것도 전라도에서...

조만간 대종영할 예정인데, 난 아직도 강조의 마지막 일성이 메아리친다... "(야만인이 아니고) 난 고려의 신하다..." 이번에 말이다. 이 성계와 강조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204
조선조 사림화(이들은 영정조(고 김 대중, 고 노무현) 치세기간동안 실사구시의 실학을 죽였고 그 동학혁명도 잊었고, 반일항쟁투쟁도 잊었으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도 잃어버린 역적들)돼버린 이 수박(비명이든 친문이든)들을 다 걸려내야 민주당원및 대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현재 전 민주당원들과 지지 국민들은 이 재명 대표하의 강력한 친정체제를 원합니다... 수렴청정한 천추태후나 김 치양같은 간신들에 휘둘려 무능력했던 목종이 아니고 강력한 군주 현종을 원하고요... 전 그 강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국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3각균형하의 자주적 나라를 건설하게 한 외교/국방의 강 감찬, 호락호락하지 않던 지방의 있는 자들이였던 호족들을 통제하는 5도양계의 전국적인 체계를 만들도록 도운 행정/지방제도의 김 은부같은 명신을 얻어 고려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고, 원성황후/원혜황후가 낳은 아들들로 덕종, 정종, 문종의 100년 치세를 열었듯이, 이 재명 사단안에서 없는 자들인 중하위층및 서민들과 중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 중심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자주적 부국강병을 이루게 해줄 이들이 이 고 김 대중, 고 노 무현에 이은 이 재명 사단안에서, 강력한 진보/민주 성향의 대통령들과 명신들이 줄줄히 나오기를 원하고요... 이 재명을 반병신의 목종을 만들려는 모든 이들은 현재 강조(이 원종)역을 하고 있는 게코(Gekko)가 철퇴를 계속 내릴 것입니다... 제 생각에 좀 심하면 현종의 충신중의 하나인 친종장군 지 채문식으로 합니다... 평양성을 거란에 바친 간신 서경부윤을 철퇴로 죽이거나 발해 후손 대도수 장군을 사지로 몬 동북면도순검사 탁 사정을 죽이려한거나 왕을 겁박하고 반란을 일으킨 고려 중후반 대몽 항쟁에서 무능력의 대명사인 최씨 무신정권의 고조할아버지격인 최 질과 그 모사꾼 개경부윤의 목을 베듯이 저도 자객으로 기능하고자 합니다...

구정인사차 GI 큰 자본주 사무실을 예방했는데, 전 한과세트가 아니고 책을 구정선물로 주시네요^^ 역사관이 같은 제 블로그를 꾸준히 보고는 계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113
정통 진보주의자로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만약 한반도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역성혁명인 위화도 회군없이 고려가 800년이상 한반도를 지배했다면 역사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https://samsongeko1.tistory.com/12933
아따아~~~ 역시 고구려 후예들답군...!!! 내가 볼땐 미국과 우리가 똥줄타게 생겼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951

이 하늬 '애마'→ 임 윤아 '폭군의 셰프' 등, 센세이셔널한 넷플릭스 금주 신작 라인업...

넷플릭스가 금주 신작 라인업을 공개해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이고 있다.
'연개소문',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고구려 장수 연개소문의 일대기...
'연개소문'은 대제국 고구려의 역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대하사극으로, 고구려의 강력한 장군 연개소문의 생애를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고구려 말기, 강대국이던 나라가 점차 쇠퇴하고 외세의 위협과 내부 권력 다툼이 격화되던 시기, 뛰어난 지략과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연개소문이 등장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기개를 보이며 성장하고,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점차 고구려의 운명을 짊어지게 된다. 유동근이 대막리지 연개소문 역을, 이태곤이 청년 연개소문 역을, 이효정이 영양왕 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다.
드라마 '연개소문'을 통해 고구려의 마지막 영광과 몰락 직전의 치열한 시대상, 그리고 그 중심에서 나라를 지키려는 한 장수의 삶과 갈등을 만나보자. (드라마/액션, 한국, 2006)
'데이비드 장의 디너 타임 라이브' 시즌3...
셰프 데이비드 장이 스타 게스트들을 위한 요리를 선보이면서 각종 요리 비법까지 전수해 주는 날것 그대로의 요리 체험 라이브 '데이비드 장의 디너 타임 라이브'가 시즌3으로 돌아온다.
한국계 미국 요리사 데이비드 장은 프랑스 요리 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유명 레스토랑에서 경력을 쌓은 후, 2004년 뉴욕에서 오픈한 첫 식당 '모모푸쿠 누들 바'에서 독창적인 퓨전 메뉴로 성공을 거두며
미슐랭 가이드 별 2개,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이름을 올렸다.
'데이비드 장의 디너 타임 라이브'에서 조금의 편집도 없이 있는 그대로 실수까지 그대로 보여준 데이비드 장은 LA 다운타운의 주방에서 셀럽 친구들을 위한 맞춤형 요리를 즉석에서 완성해 낸다.
여기에 공동 진행자 크리스 잉이 여전히 특유의 위트와 통찰을 보여주는 가운데, 이번 시즌은 즉석 Q&A와 시청자 참여형 진행 등 새로운 방식의 실시간 소통을 접목시켜 시청자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예정이다.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은 데이비드 장의 진짜 요리를 오직 넷플릭스에서 확인해 보자. (리얼리티, 미국, 2025)
"당신은 옳은 선택을 할 거야"… '호스티지'
'호스티지'는 영국 총리의 남편이 납치되고, 프랑스 대통령에게는 협박 메시지가 날아들자 두 국가의 정상이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국에서 열리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영국 총리 애비게일 돌턴과 프랑스 대통령 비비안 투생은 이민 문제를 두고 치열한 협상에 임한다. 그러나 회담 직전, 괴한들이 애비게일 총리의 남편 알렉스를 납치하고 총리 사퇴를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동시에 영국에 머물던 비비안 대통령도 재선을 앞둔 민감한 시점에서 이민 정책과 관련한 협박을 받게 되며 두 정상은 정치적 미래와 가족의 생명을 놓고 불가피한 선택에 직면한다.
위태로운 상황 속 서로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두 여성 지도자는 이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손을 잡게 된다.
드라마 '닥터 포스터' 시리즈, '스콧 & 베일리]'시리즈 등의 서랜 존스가 총괄 프로듀서를 맡음과 동시에 애비게일 돌턴 역을 연기하고, 영화 '마이 조이', '해피 어게인' 등의 줄리 델피가 비비안 투생 역을 맡았다.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영화 '스파이 브릿지'의 작가 맷 차먼이 극본을 맡아 더욱 기대를 모으고 있는 '호스티지'를 오직 넷플릭스에서 만나보자. (스릴러/드라마, 영국, 2025)
생존을 위해선 폭군의 입맛을 사로잡아야 한다… '폭군의 셰프'
'폭군의 셰프'는 최고의 순간 과거로 타임슬립한 셰프가 최악의 폭군이자 절대 미각 소유자인 왕을 만나며 벌어지는 서바이벌 판타지 로코이다. 연지영은 프랑스 최고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후
쓰리스타 레스토랑의 헤드셰프가 될 날을 앞두고 우연의 사건을 통해 과거에 떨어지게 된다. 한편,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예민한 성정을 가진 왕 이헌은 미세한 맛의 차이도 모조리 잡아내는 절대 미각의 소유자다.
낯선 시대에 적응도 하지 못한 와중에 폭군 이헌을 맞닥뜨린 연지영은 자신의 주특기인 요리로 미식가 폭군의 입맛을 사로잡아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과연 연지영이 까칠한 왕 이헌의 입맛을 만족시키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증을 더한다.
임윤아가 연지영 역을, 이채민이 이헌 역을 맡아 달콤살벌한 케미를 보여줄 예정이다. 과거에 떨어진 프렌치 셰프와 절대 미각 폭군의 '맛 좋은 로맨스'를 넷플릭스에서 만나보자. (8/23 공개 예정)
'애마', 벗기려고만 하는 시대… 화끈하게 뒤집는다...
'애마'는 1980년대 한국을 강타한 에로영화의 탄생 과정 속,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어두운 현실에 용감하게 맞짱 뜨는 톱스타 희란과 신인 배우 주애의 이야기를 그린 넷플릭스 시리즈다.
가슴이란 단어로 도배된 '애마부인'의 시나리오에 분노한 톱스타 희란은 기자회견을 열고 더 이상의 노출은 없다고 선언한다.
신성 영화사 대표 구중호는 계약을 무기 삼아 희란을 조연으로 강등시키고, 신인 감독 곽인우와 함께 오디션을 열어 신인 배우 주애를 애마 역에 캐스팅한다.
어느 순간 카메라 너머에 있는 세상의 부당함에 눈을 뜨게 된 희란과 주애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반격할 준비를 한다. 배우 이하늬가 희란 역을, 방효린이 주애 역을 맡았다.
여기에 진선규가 구중호 역을, 조현철이 곽인우 역을 맡았다. 영화 '유령', '독전' 등 감각적인 미장센과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선보여 온 이해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기대를 높인다.
벗기려고만 하는 세상에 한 방 먹이려는 두 여자의 쎈세이셔날한 연대를 오직 넷플릭스에서 만나보자. (8/22 공개 예정)
스포츠한국 김 현희 기자

연개소문
(淵蓋蘇文)

1. 개요
삼국시대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 말기를 대표하는 권신이다.
아버지는 동부대인 연태조이며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받았다. 이후에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집권했다.
이후 연개소문이 신라, 당나라에 강경한 입장을 보임에 따라
고구려와 신라, 당나라 사이에는 수 차례 전쟁이 일어났다. 연개소문 생전에는 계속해서 승전했지만 사후 권력을 물려준 세 아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하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임금을 시해하고 전횡을 일삼은 면이 있다. 다만 혼란스럽던 고구려의 정계를 평정하고, 죽기 직전까지 강력하게 통치했을 정도의 정치적 능력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또한 당대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와 전쟁하여 계속해서 승리했다.
천하의 당 태종 이세민과 으뜸 무장이었던 소정방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 줄 정도로 당대 손꼽히는 명장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쓰면서 유독 심혈을 기울여 복원하고 싶었던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
삼국사기에서는 외모가 웅장하고 기품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2. 본명에 대한 추론
현재 사학계 및 대중에서 널리 쓰이는 이름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지만 한국사의 고대 인물들에서 종종 발견되는 본명에 대한 논란이 연개소문에게도 있다.
알아둬야 할 점은 당시 한반도는 '한문식 인명'과 '순우리말 인명'이 교차하는 과도기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의 인명이 둘 중 어느 쪽에 속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 우선 연개소문의 성이 연(淵)씨라고 직접 언급한 사료는 일절 남아있지 않다. 정사의 기록에는 천개소문(泉蓋蘇文)이라고만 나오며 원래 이름이 '연개소문'이라는 것은 당나라의 피휘 문화에 근거한 후대의 추측이다. 당나라의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 〈천남생묘지명〉에는 연씨 가문의 성씨가 '천'(泉)씨로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이 내용이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천씨가 본래 연씨였다는 사실은 김부식이 살던 고려 중기에서 500년도 넘게 지난 조선 후기나 되어야 밝혀졌기 때문이다.
- 《삼국사기》의 〈천개소문 열전〉에서는 연개소문의 이름을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쇠를 뜻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소문'을 '금(金)' 자의 뜻을 빌려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의하면 현대인의 인명에 가까우며 삼국시대에 서서히 정착되기 시작한 한자식 이름으로는 연개금(淵蓋金)이 된다. 일본 기록인 《일본서기》와 《등씨가전》에도 연개소문이 '개금'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또한 일본으로 망명한 고구려 출신 승려인 도현(道顯)이 저술한 《일본세기》도 '개금'으로 적었다. 삼국시대 후기로 갈수록 한문 지식이 완숙해짐에 따라 고대 한국인의 인명 또한 단순 음차표기를 사용하기보다는 뜻까지 고려한 표기법이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을 고려해볼 때, 우리말 인명으로 지었더라도 대외 표기 상으로는 '개금' 쪽이 공식 한자 표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연남생 묘지명〉에서도 '개금'으로 표기되어 있다.
-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사신에게서 연개소문의 정변에 대해 직접 들은 내용을 기록한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는 연개소문을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 이리카스미)라고 적어놓았다. 여기서 '이리(伊梨)'는 '연(淵)'에, '가수미(柯須彌)'는 '개소문(蓋蘇文)'에 해당한다.
연개소문의 성씨가 연씨라는 설은 18세기에 이르러 국학자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처음으로 주장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구려의 대신인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통고(通攷)》와 《신당서》에 따르면 "정토는 개소문의 아우"였으므로, 사실 연개소문의 성은 연씨였으나
이름이 당고조 이연(李淵)의 휘와 겹쳐서 당나라에서 연개소문의 성을 피휘해 '천'으로 적게 됐다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이 한국 사학계에서 거의 정설로 인정받으면서 오늘날에는 개소문의 성을 연씨로 표기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과 일본의 학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여전히 천개소문이라 표기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최근에는 이런 추세가 어느 정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연개소문의 성씨인 '연(淵)' 또는 '천(泉)'은 한문식 성이라기보다는 고유어를 훈차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연못 연'과 '샘 천'은 각각 뜻이 통하므로 같은 단어를 표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서기》에서는 연개소문의 성을 '이리(伊梨)'라고 적어놓았는데, 이를 고구려 고유어로 연못 또는 샘을 뜻하는 단어로 간주한다면 '이리'는 음차, '연/천'은 훈차 표기로 가정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시대의 지명을 수록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고구려 지명 중 천정군(泉井郡)이 어을매(於乙買), 천정구현(泉井口縣)이 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고도 불렸다고 전한다.
여기서 매(買)는 한국어 '물'의 고대 한국어를 음차한 것이므로 '어을(於乙)'이 샘[泉] 혹은 우물[井]을 뜻하는 단어였다고 추측된다.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고 전하는 나정(蘿井)은 나을(奈乙)로도 표기됐는데 여기서도 '을(乙)'이 우물 정에 대응된다. 이리가수미의 '이리'도 이 '어을/을'과 동계어였을 것이다.
이름의 경우, 개소문(蓋蘇文)과 가수미(柯須彌)의 고대 음가가 일치하지 않아서 추정에 난점이 있다. 정확히는 첫 두 음절은 '가소'로 읽혔다는 게 거의 확실한데 마지막 음절의 모음이 불확실하다.
'개소문/가수미'와 '개금(蓋金)'의 대응 관계에 대해서도 말이 많다.
'소/수'가 한국어 '쇠'의 고어형을 축약 표기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며, '개금'은 가수미의 '수미(須彌)'가 황금의 산을 가리키는 범어 '수메루(Sumeru)'의 음차이기도 하다는 점을 고려한 불교식 언어 유희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려고기》라는 서적을 인용해 '소문'이 신라의 시중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이고, 성이 '개', 이름은 '금'으로 본명은 '개금'이라고 쓰고 있다. 즉 '개소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유황숙이나 김과장 같이 성+지위라는 것. 다만 현전하는 《고려고기》의 기록은 수나라 장수 양명(羊皿)이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연개소문으로 환생했다는 등 설화적인 성격이 짙어 그 정확성에 대한 논란이 많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편 신채호는 연태조가 '갓 쉰 살 때 얻은 아이'라고 해서 아이 이름을 '갓쉰'으로 지었고, 그것을 고구려 이두문으로 표기한 것이 개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갓쉰둥전》'의 갓쉰둥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주장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국어학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으며 근거가 상당히 부족하기 때문에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3 생애
3-1 출생
《삼국사기》 및 《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에는 고구려의 동부대인(혹은 서부대인)이었던 연태조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나온다.
서부와 동부 중 정확히 어느 쪽 출신인지는 관련 기록이 없어서 알기 힘들지만 동부대인이었다는 기록이 더 많기 때문에 동부 출신이 맞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 이를 근거로 연개소문의 가문을 동부여 계열 귀족으로 추론하기도 한다.
연개소문의 출생연도에 관한 설은 590년설, 594년설, 595년설, 601년설, 603년설, 614년설까지 다양하다. 그 중 614년설의 출처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이 인용한 《고려고기》란 책으로, 내용부터가 오류가 많은 책이다.
당장 연개소문의 성씨부터 제대로 써놓지 않았고, 개소문과 개금이 같은 말이란 것도 모르고 '소문'을 벼슬 이름으로 착각해 오기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까지 범해놓았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595년설, 《환단고기》는 603년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전자는 출처가 불분명하고, 후자는 현전하지 않는 《조대기》라는 사서를 인용하고 있으나 애당초 《환단고기》 자체가
근현대에 창작된 위서로서 사료적 가치가 없으므로 신용하기 어렵다.
단지 연개소문과 연남생의 나이 차이만 가지고 614년설이 옳다고 하기에는 기록에 모순점이 많다. 보다 정확한 것은 연개소문의 묘지명이 발견되어야 분명해지겠지만 최소한 610년대 출생이라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직위를 계승한 연개소문은 642년 1월 영류왕으로부터 천리장성의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고구려 북부의 국경지대로 파견나가게 되었다.
이는 6세기 이래 고구려의 귀족 연립 체제를 위협해오는 연씨 가문의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류왕과 관료들이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을 북쪽으로 내보낸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이 된 이후에도 흉포하고 잔악무도한 행동을 계속했다고 관련 기록에 전하며, 《구당서》에는 연개소문이 관직을 거머쥐고 왕권을 범하려 했다고도 적혀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 내에서 강성한 세력으로 올라선 연씨 가문, 영류왕, 귀족들 간의 정치 투쟁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영류왕까지 포함된 연개소문 제거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연씨 가문의 힘은 고구려의 왕권마저도 위협할 정도로 비대하게 성장해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암살 모의도 이미 조정 깊숙히 세력을 심어두었던 연개소문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모두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가운데 연개소문은 대담하게도 역습을 꾀한다.
3-2 10월의 유혈 쿠테타
642년 10월, 영류왕과 대신들이 한통속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개소문은 대담하게도 역으로 정변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다. 연개소문은 성 남쪽에 여러 부의 군사들을 전부 불러 모아 놓고는 술과 음식을 성대히 차린 후에
대신들을 불러 들여서 함께 군대 사열식에 참여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에 참석하기로 했던 대신들은 사열식 도중 들어닥친 연개소문 밑의 동부 군사들에 의해 무참히 목숨을 잃었는데, 이때 살해당한 인원들이 임금과 대신들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연개소문이 어떻게 대신들을 어육으로 만들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구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사열식을 하던 중에 갑자기 동부의 군사를 휘몰아쳐 대신들을 죽였다고 나오나 《신당서》에서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군사들을 숨겨두었다가 대신들이 도착하는 족족 하나씩 죽여버렸다고 적혀 있다.
의문점이 있다면 왜 하필이면 고위 대신들이 자신들의 정적인 연개소문이 군사를 이끌고 사열하는 행사에 참석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연개소문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까지 짜놓은 상태에서 왜 그랬는지는 이해하기 꽤 힘든 부분이다.
참석하는 행사가 보통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 고구려 귀족들이 반드시 참석해야만 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행사였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무래도 해당 행사는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의 지위를 내놓는 이임식 행사나, 혹은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위해 변방으로 떠나기 전에 베푼 송별식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인다.
이런 정도의 행사면 연개소문이 주관했다고 해서 반 연개소문파 귀족들이 행사에서 빠졌다가는 바로 척을 지는 상황이라는 것을 셀프 인증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 대신들을 없애버린 연개소문은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갔다.
다른 4부의 군사들이 저지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궁성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궁궐을 향해 달려가면서 일부러 창고에 불을 질렀다고 나와 있다.
이는 수도 경비병들의 시선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경비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창고로 달려가는 동안 연개소문 휘하 병력들은 큰 저항없이 왕이 거처하는 궁전에 다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위해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계략을 짜놓았고, 이를 신속히 행동으로 옮겼다.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난입한 연개소문은 마침내 영류왕을 찾아내고는 그를 시해해버렸다. 《신당서》에 의하면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시해한 후에 그 시체를 토막내서 시궁창에 내팽겨쳐 버렸다고 한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더욱 스산하게 기록되어 있다.
642년 9월에 대신 이리카스미(연개소문)가 정변을 일으켜 고구려 대왕과 대신 이리코세시 등을 비롯한 180여 명의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으며, 이어서 왕의 조카(고보장)를 신왕으로 세우고, 동성(同姓)인 츠스루코무루를 대신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동성'(同姓)이라는 기록이 또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직관적으로 봐도 츠스루코무루보다 이리코세시 쪽이 연개소문과 동성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따라서 이 기록은 아예 그냥 오기라 하거나 혹은 동성(同姓)은 같은 부(部) 소속을 의미하기에 츠스루코무루도 연개소문과 같은 부의 인물이었으며,
이리코세시는 연씨 가문 내에서 연개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는 등 해석이 제각각이다.
3-3 쿠테차를 일으킨 이유
이처럼 기록마다 조금 차이는 있지만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포함한 집권 세력들을 도륙내고, 보장왕을 옹립하며, 자신의 세력들을 조정 대신으로 임명했다는 사실은 명확해 보인다.
연개소문이 왜 이처럼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난립하고 있다.
- 첫 번째로는 《구당서》와 《삼국사기》 <개소문열전>에 나온 것처럼 영류왕 및 당시의 집권 세력들과 연개소문 사이에 일어난 권력 다툼의 결과라는 설이다. 위에서도 여러번 설명하였듯 연개소문의 가문은 이미 할아버지 대인 연자유 때부터 2대에 걸쳐 막리지 직위를 역임하며 조정 내에서 그 세력을 넓혀가던 중이었고, 동시에 강력한 무력과 동부대인의 지위를 바탕으로 당대 고구려의 막강한 신흥 귀족 세력으로 부상하던 중이었다. 또한 연개소문의 기반은 국내성이었고 당시 집권층의 기반은 평양성이었다. 당시 집권층이었던 고구려 왕실과 기존 권력층은 날로 강대해져가는 연개소문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가 동부대인의 지위를 이어받지 못하도록 훼방을 놓는 한편 천리장성 건축의 감독을 맡긴다는 핑계로 사실상 변방으로 좌천하려 하는 등 그들의 권력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를 강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씨 가문의 힘이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결국 연개소문을 암살하려 계획까지 짰는데 이미 이를 사전에 파악해버린 연개소문이 먼저 선수를 쳐서 영류왕과 집권층을 갈아 엎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 두 번째는 당시 연개소문이 영류왕의 조카인 보장왕과 결탁했다는 설이다. 영류왕은 사실 선왕인 영양왕의 배다른 아우였으나 여수전쟁 당시에 큰 전공을 세웠으며, 또한 영양왕에게 아들이 없어서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영양왕의 또다른 아우였던 고대양과 그의 아들인 고보장이 이에 불만을 품었고, 그들 또한 왕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에 불타 당시 영류왕과 대립하던 연개소문과 결탁하여 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다는 것이다.
- 세 번째는 대당외교 문제와 관련된 설이다. 당시 영류왕은 당나라에 대해 온건하고 저자세적인 외교 정책을 펼쳐 전쟁을 피하고자 했는데, 대당강경파이자 신흥귀족 세력의 대표였던 연개소문이 이에 반대하며 영류왕과 충돌한 끝에 결국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는 영류왕과는 달리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해 강경한 외교 정책을 펼쳤다는 기록을 들고 있다.
3-4 정권 장악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아우인 고태양(太陽)의 아들 고보장을 불러와 그를 임금 자리에 앉혔으니 그가 바로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이었다.
이후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莫離支)라는 직책에 올랐는데 당나라의 병부상서 겸 중서령에 비견되며, 나라의 군사력과 궁중의 행정에 관여하는 직책이었다.
《삼국사기》의 <김유신 열전>이나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개소문이 태대대로의 벼슬을 지냈다고 기록했는데 정권을 일으킨 이후 어느 정도 세력이 안정되자 제가회의의 장인 대대로 직위까지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일로 말미암아 연개소문은 왕을 뛰어넘는 권세를 누리는 고구려의 최고 실력자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사실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의 고구려사를 기록한 <보장왕본기>는 사실상 <연개소문본기>라 해도 할 말 없을 정도.
이후로 연개소문은 권위적인 성격을 마음껏 뽐내고 다녔는데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이 자신의 관복을 온통 금으로 장식했으며, 평소에도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고,
말을 타고 내릴 때는 장수를 받침삼았다고 묘사했지만 실제로 모든 고구려 장수들은 기본적으로 다섯 자루의 칼을 가지고 다녔다. 이를 보면 《구당서》와 《신당서》의 경우, 연개소문의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짙게 각색하기 위한 내용일 수 있다.
《삼국사기》의 경우 이러한 《구당서》와 《신당서》를 참고하여 만든 것이므로 논외로 한다.
연개소문이 행차를 할 때에는 호위병들로 하여금 엄중하게 대오를 이루어 다녔으며 길을 지날 때에는 행차를 큰 소리로 알리게 하였는데 이럴 때면 길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구덩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숨었다고 한다.
당태종이 들은 풍문에 의하면 안시성주는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이에 대항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안시성주는 이를 기어코 막아냈고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을 그에게 맡겼다고 한다.
이러한 소문 속의 불화는 고당 전쟁 수행에 차질이 있었다는 가설로 설명하거나 반대로 당나라의 패배를 희석하기 위해 삽입된 과장된 풍문이라는 견해가 있는 등 진위 여부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647년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30,000명의 병력이 동원되어 안시성이 지휘를 받는 것을 보면 안시성의 반발은 과장되었거나 642년 당시에는 실제로 있었으나 고당 전쟁 시기 이전까지 어떻게든 봉합된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당나라와의 대전쟁 때 명확히 알 수 있는
신성과 국내성의 지원군 40,000명을 시작으로 중앙의 통제에 따라 각 성에서 유기적으로 도움을 주고 받고 있었던 것과 645년 주필산 전투에서 150,000명, 667년 금산 전투에서 200,000명을 동원하고,
이후에도 남소성에서 150,000명과 말갈족 수만 명이 당나라와 전투를 벌이는 등 전력을 백제와 신라에다가 들이부었으면 과연 두 국가가 버틸 수 있었을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물량을 동원하는등
국가 통제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전국을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5 신라 김 춘추와의 회담 결렬
한편 642년 겨울 백제 의자왕의 대야성 공격과 김품석의 부하였던 검일에 의해 딸, 사위, 손주들을 모조리 잃게 된 신라의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넘어와 고구려 조정에 있던 연개소문한테 함께 백제를 칠 것을 요청해 왔다.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직후의 일이었는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보장왕의 명을 받들어 김춘추를 맞아들이고 그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이처럼 신라와의 회담은 처음에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으나
다음날에 김춘추가 보장왕과 만나 논의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많은 군사의 호위를 받는 가운데 위엄있는 모습으로 나타난 보장왕은 고구려가 신라와 함께 백제를 치는 조건으로 죽령 서북의 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죽령은 지금의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길목으로 고구려에서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영토로 이어지는 요충지였는데 고구려의 전성기인 장수왕 때에는 고구려의 영토였으나 신라의 진흥왕이 이 곳을 빼앗아 신라의 영토에 넣었다.
비록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행세하고 있었던 김춘추라고는 하나 그의 입장에서는 난처한 게 이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다.
그 요청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가는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강 유역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차단되고, 고구려에게 신라로 통하는 진격로를 열어주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이는 곧 보장왕이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뜻이 되는데, 보장왕의 뜻은 사실상 실권을 움켜쥐고 있었던 연개소문의 뜻이었다.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보장왕과 연개소문은 그를 옥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자 신라 조정에서는 이를 구하도록 조치하였고, 곧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와의 국경 지대로 나아가 무력 시위를 벌였다. 이후 고구려 조정에서는 곧 김춘추를 풀어주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김춘추가 풀려나 귀국하게 된 사연은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라본기>의 내용에 따르면 김유신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의 남쪽 국경에 나타나 무력 시위를 벌이자 보장왕이 그제서야 김춘추를 풀어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유신 열전>의 내용에 따르면
보장왕의 측근이었던 선도해가 김유신으로부터 뇌물을 받고는 '토끼의 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꾀를 내주자 김춘추가 이를 받아들여 보장왕에게 땅을 내어주기로 약조하고는 정작 국경에 이르자 이를 어기고 달아났다고 했다.
이 기록에도 김춘추 석방의 결정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김유신이 고구려 국경으로 군사를 끌고 가 무력 시위를 벌였다고 했다. 김춘추에게 기만당한 보장왕과 연개소문이 폭발한 건 당연했다.
연개소문이 무슨 까닭에서 김춘추의 제의를 거절하여 신라와 동맹을 맺지 않고, 적대 관계를 만들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연개소문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부러 다른 나라와의 갈등을 빚어내 군사적인 긴장 상태를 유지하려 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연개소문이 애초부터 신라를 전혀 믿지 않고 있었으며, 후방의 신라와 당은 북쪽의 말갈 & 돌궐과 남쪽의 백제 & 왜를 이용해 견제할 수 있다는 연개소문의 판단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설은 당시 고구려가 신라보다는 백제와 동맹을 맺는 것이 더욱 이득이 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에 신라의 제의를 거절했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는 무왕, 의자왕의 2대에 걸쳐 신라를 압박했는데 이 때 교통 및 군사의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곳의 성주이자 김춘추의 사위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이자 딸인 김고타소의 목을 베기까지 했으며
이후 40여 개의 성까지 수중에 넣었다. 더욱이 의자왕은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이후 고구려와 화친을 맺고 있었다.
고구려 측의 입장에서는 한창 신라를 신나게 몰아붙이던 백제와 사이좋게 동맹을 맺고, 신라를 둘이서 견제하여 후방을 안전하게 만든 후 곧 닥쳐올 당태종 이세민의 침략에 대비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으로 여겨졌을 공산이 크다.
《조선상고사》에는 백제의 성충이 연개소문에게 김춘추가 제의하러 왔을 시점에 맞춰 글을 보냈는데, 만약 신라와 손을 잡는다면 백제는 당나라와 손을 잡고 그렇게 되면 당나라는 고구려에 진격할 길과 자원을 쉽게 공급받아
고구려가 앞뒤로 압박받게 된다는 서술이 있다. 원 출처가 되는 사료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한 속사정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도만 보면 한강 쪽은 신라 영토에 가로막히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 싶지만 당시 신라는 백제의 맹공에 시달리며 국가 존망 자체를 걱정해야 했을 정도로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다.
백제는 후방 걱정없이 모든 전력을 신라 방면에 집중시킬 수 있었던 반면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ㄱ자로 국토가 길게 뻗었고 백제보다 지켜야 할 국경선이 2배 가까이 길어져 있었다.
고구려도 간간히 신라의 북측 영토를 침범하는데다 후방에는 백제의 우군인 왜국이 수도 서라벌과 가까운 동해 바다를 직접 공격한 전례가 있었으니 신라는 양면전쟁을 넘어 3면에 수비병을 배치해둬야 해 지정학적으로 백제보다 열세에 있었고,
실제로도 거의 공세를 하지 못한채 수세에 몰려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원 공급 쪽으로 가면 신라보다 백제 쪽이 훨씬 빠르고 수월했다. 당장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가로막는 요충지이자 당나라와의 교역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당항성을 고구려와 백제에게 나란히 공격당하며 큰 위협을 느꼈다.
해로나 수로를 통해 일시적으로 군사를 보낼 수도 있기에 고구려 입장에서도 꽤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특히 오랫동안 백제와의 마찰이 적었던 것과 달리 신라와는 알게 모르게 마찰을 빚었고 대표적으로 김유신이 함락한 성이 고구려의 낭비성이었다.
그러니 연개소문과 고구려 입장에서는 신라보다 백제의 제안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연개소문은 옛 장수왕 때의 영토 반환이라는 무리한 요구를 김춘추에게 하면서 거절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대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백제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 맞았다. 만약 신라와 손을 잡았다면 백제와 당나라의 손에 신라나 고구려가 멸망했을 가능성도 있다.
연개소문이 내건 죽령 서북 땅이라는 무리한 요구 또한 납득이 되는데 완곡히 신라와 결렬하는 이유로도 충분하고 만에 하나지만 수락이 되어 백제와 척을 진다 해도 이 정도의 땅을 가진다면 당나라가 수로를 통해 오는 것도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한 이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득보다는 손해가 많으니 거절할걸 노려 요구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어찌 되었든간에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일어났던 회담 결렬의 결과는 매우 큰 것이었으며, 백제와 말갈,
고구려의 틈바구니에서 고립된 처지가 된 신라는 이후 당나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고, 고구려와 백제, 말갈의 연합군은 나당연합군과 대립하는 형국이 된다.
그리고 김춘추가 적국 고구려까지 와서 무리한 협상을 시도한 것에 대해서 현대의 역사학자들 중에서는 협상 자체 외에 신라 내부의 결속 목적도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성골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왕이 즉위했고, 결국 언젠가 성골 여자도 모두 사망하면 진골이 왕에 올라야 하니, 이미 선덕여왕 말년쯤 되면 신라 내부에서도 나중에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적국에 가서 담판을 지으려 했으니, 신라인들에게는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각인시켜주는 행동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춘추는 연개소문이 만약 우호적으로 나와주면 가장 좋지만, 그게 아니면 아닌 대로 나름대로 이득이 있다는 식으로 이미 계산을 해 두었던 셈이다.
3-6 당나라와의 대립
이처럼 다루기 힘든 성격의 연개소문이 고구려의 실력자가 되면서 당태종의 해동 삼국에 대한 영향력 행사 및 고구려 정벌에 대한 준비 등에 걸림돌이 되었고,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는 차츰 나빠져만 갔다.
거기다 이세민은 당시 내부적으로 황태자 이승건 교체(643)의 후유증으로 인해 꽤나 통치력이 줄어든 상황이었고, 장손무기를 필두로 하는 외척의 힘이 역으로 커져서 한참 정국이 어지러웠던 시기였다.
심지어 인도에서 귀국한 현장에게 환속해서 자기 좀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정치적 어려움이 매우 심각했던 시기였으며,
스스로가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이기도 했으니 고구려 정복이라는 군사적 활동을 통해 당태종 자신과 막 세운 태자 이치의 권위를 세우고 정국을 안정화하고자 할만한 충분한 동기가 있었다.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당태종은
연개소문을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문란케 하는 역적이라 일컬으며 고구려를 칠 것을 계획하였으나, 측근이었던 장손무기가 아직 방비가 단단하니 상황을 지켜봐야 옳다고 만류하자 계획을 보류하였다.
3-7 도교 우대와 불교 탄압
643년 3월, 연개소문은 "우리 나라에는 유교와 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라고 하면서 보장왕에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 줄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을 전해주도록 했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이미 당시 고구려에는 도교가 번성하고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류왕본기>에도 당시 고구려에 도교가 번창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으며, 그 즈음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도 이전에 불교적 색채가 짙었던 것과는 달리 도교적인 요소가 매우 늘어났음을 눈여겨 볼 수 있다.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도 도교적이라는 시각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 연개소문이 새삼스럽게 당나라에 도교 전파를 요청한 이유는 당시 당나라의 농서 이씨 황실이 스스로를 노자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도교를 무척 떠받들었기 때문이다.
즉, 연개소문이 당나라 황실이 받드는 도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나라에 대한 유화책이라 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연개소문이 당나라에서 온 도사들에게 절을 숙소로 내준 것은 불교에 대한 탄압책으로 여겨진다.
<보장왕 본기>에는 650년 6월에 변룡사의 승려인 보덕화상이 나라가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를 가까이한다 하여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당시 고구려 불교계의 반발이 상당히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삼국의 불교가 왕실을 보위하는 호국불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왕실의 친위세력인 불교의 권위를 약화시켜 왕의 위상 자체도 떨어뜨리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아마도 당시 스님들은 귀족 가문의 출신들이 많았고, 학문과 무예를 익힌 엘리트였으며, 스님들이 숙식하는 사찰은 유사시 대규모 병력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군사적인 기능도 수행했기에 그 대항마로 도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도교 우선시 정책과 상대적으로 불교를 탄압한 점 때문에 이후 불교계에서는 연개소문을 수백 년 동안 굉장히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듯 하다.
해인사 창건 기록인 《가야산해인사고적》(伽倻山海印寺古籍)에 의하면, 고구려가 불의(不義)를 많이 저질렀으니 제석(帝釋)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인간세상에 보낸 괴물 무상대귀(無常大鬼)가 바로 개금(=연개소문)이라고 쓰고 있다.
그리고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도 수나라 장수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해 환생한 것이 연개소문이라는 전승을 싣는 등 대체로 당대 불교계 기록에서는 고구려를 망친 장본인으로 연개소문을 지목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3-8 신라 공격
한편 연개소문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했다. 결국 643년 9월에 신라에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가 40여 개 성을 빼앗고 고구려가 당나라로 가는 신라의 뱃길을 끊어 버렸다.'라면서 당에 직접 도움을 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644년 정월에 당태종은 고구려 조정에 사농승 상리현장을 보내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을 그만 두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하였다. 이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하여 2개의 성을 격파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보장왕이 사자를 보내 부르자 그제서야 조정으로 돌아왔다.
상리현장은 연개소문에게 신라를 치지 말라고 만류했으나 연개소문은 지난날 수나라와 싸우는 중에 신라가 고구려를 쳐서 땅을 빼앗아갔으므로 이를 되찾아야 한다며 듣지 않았다.
사실 이 해에 이미 양국은 교전 상황에 돌입했다.
대릉하 일대에서는 고구려군과 당군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한편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은 당에 백금을 보냈으나 당의 대신인 저수량이 이를 고구려 측이 보낸 뇌물이라 주장했고, 당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백금을 받지 않았다.
또한 당 태종은 연개소문이 보낸 50여 명의 사신들을 가리켜서 '왕을 죽인 막리지를 섬기는 죄인들.'이라 하며 붙잡아 처벌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분노하여 당 태종이 보낸 사신 장엄을 김춘추한테 한 것처럼 인질로 삼고는 굴방에 감금해 버렸다.
3-9 고구려와 당나라 전쟁
서로 사신을 가두는 등 연개소문과 당태종 사이의 기류는 계속 험악해지다가 결국 645년에 수십만 대군이 격돌하는 본격적인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기세를 올렸으나 1차적인 함락 이래로 진군조차 지지부진했고, 안시성, 신성, 건안성 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강력한 요동 방어선을 뚫지 못한채 패퇴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도 당태종은 소모전, 상륙전 등을 시도하며 고구려를 공략했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며 병사했다.한편 그 뒤를 이은 아들 당고종 역시 650년대부터 내몽골과 요서 일대에서 고구려군과 각축전을 시도했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연개소문은 당과 전투를 벌이면서도 신라에게도 칼을 겨눴는데 말갈과 백제와 연합하여 655년 정월에 신라 북쪽 경계의 33개 성을 뺏들어가는 괴력도 보였다.
660년대에 들어서는 소정방, 임아상, 계필하력, 정명진, 방효태 등을 필두로 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회심의 일격을 날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연개소문은 외교력과 용병술을 발휘하여 이들을 모두 물리쳤고,
야전에서의 활약도 두드러져 사수에서 좌효위대장군 방효태 지휘하의 옥저도행군을 전멸시키고,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 전원을 절멸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이것이 바로 사수 전투이다.
3-10 죽음과 사후
고구려-당 전쟁 중에 동맹국이던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멸망하면서 고구려는 후방이 위험해지는 등의 위기를 맞았으나 연개소문은 당나라군을 전멸시키는 무용을 보인다.
이러한 난세 중에 연개소문은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신당서》,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따르자면, 642년 겨울에 반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를 제거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한 지 20여년이 지난 후인 666년이었다.
그러나 천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665년에 그의 장남인 연남생이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을 총괄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하여 연개소문이 이미 665년에 죽었거나, 혹은 그때에 큰 병이 들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미리 연남생에게 직위를 넘겨주었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편 《일본서기》 덴지 덴노 3년 10월조의 기록은 연개소문이 664년에 죽었다고 전한다. 연개소문은 죽으면서 세 아들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며 죽었는데 죽으면서도 아들들이 서로 분쟁하여 나라를 분열시킬까봐 두려웠는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맏아들이었던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직위에 올랐으며, 남생의 두 아우였던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을 도와 국사를 돌보았다.
그러나 주위의 여러 사람들은 이들 삼형제들의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연개소문의 아들들은 처음에는 이간질하는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결국 맏아들 연남생의 마음이 흔들려 남건과 남산에게 첩자를 보내 염탐하게 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과 연남산은 형 남생을 의심하여 왕명을 칭하며 연남생을 불렀으나 연남생은 이미 동생들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연남생은 국내성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무리들과 거란, 말갈병 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해 버렸다.
이렇게 연개소문의 뒤를 이어 고구려를 통치하던 그 아들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버려 결국 당고종과 신라에게 침략할 기회를 허용하게 되었고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3-11 가족관계
아버지로 연태조, 동생으로 연정토, 아들로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이 있다. 연개소문의 부인에 대한 기록도 전하는데, 당나라에서 죽어서 중국에 지금도 남아있는 <연헌성 묘지명>에 '조모'(祖母)란 인물이 등장한다.
이 조모는 679년 아들 연남생이 병으로 먼저 죽었을 때 슬퍼하던 손자 연헌성에게 끼니 거르지 말라고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고, 이후 682년에 당나라에서 죽었다. 연헌성의 조모는 당연히 연남생의 어머니이자 연개소문의 아내를 의미한다.
이를 보아 연남생이 당나라로 도망치면서 어머니를 모시고 간 걸로 보인다.
아니면 668년 고구려 패망 후 따로 모시고 왔든지. 가족사에서 특이한 점 중 하나로 연남생 삼형제는 돌림자(男)를 쓰고 있으며, 연남생의 아들들인 연헌충과 연헌성 또한 돌림자(獻)를 쓰고 있다.
연남생의 손자대부터는 가문이 당나라에 정착하고 태어났으니 중국 문화의 영향으로 돌림자를 썼다고 볼 여지가 있긴 한데 연남생 삼형제와 연남생의 아들들은 명백히 고구려 출신인데도
이름에 돌림자를 쓰고 있는 걸로 보아 삼국시대 말기부터 한국사에서도 돌림자를 사용하는 문화가 시작했던 걸로 보인다. 백제의 경우도, 의자왕의 손자인 부여문선과 부여문사가 돌림자(文)를 쓰고 있었다.
한편 옛 고구려 지역에 전하는 전설 중에 연개소문의 여동생이라 하는 연수영이 있다. 수군을 양성하고 지휘하여 당 수군을 격파했다는 내용의 금석문이 발견되었다는 주장은 있으나 해당 금석문의 존재가 확인된 바가 없어 실존 여부는 희박하다.
사서에서도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연수영의 존재를 신뢰하지 않는다.
4. 평가
4-1 과거의 평가
근대로 들어와 연개소문이 '민족적 영웅'으로 재평가되기까지 그에 관한 평가에는 대역죄라는 틀이 강하게 작용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연개소문은 임금을 자기 입맛대로 갈아치우고, 전횡을 일삼은 포악한 역적이라는 것이 당시 비판의 요지였다.
기본적으로 왕조 시대에 왕을 참살한 신하가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능력 여부를 차치하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특히나 조선시대 문집이나 자료를 찾아보면 해동이 배출한 대역 죄인의 대명사 정도의 취급이었으며,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깔 때 곧잘 소환당하곤 했다. 이런 평가는 조선 시대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고려 시대 때의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연개소문을 신랄히 비판했다.
'《고려고기》'라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사서를 인용하여, 수양제의 신하가 고구려를 멸망시켜 양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환생하여 태어난 것이 바로 연개소문이라는 전설을 대놓고 언급해 놓았을 정도였다.
또한 연개소문이 불교를 탄압하고 도교를 도입함으로써 고구려를 쇠망하게 만들었다는 기록까지 적었다.
물론 이건 친불교적 관점에서 도교를 도입한 연개소문을 까는 내용의 설화이기는 하지만, 연개소문의 정책이 당시 불교계에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능력이나 업적에 관한 평가만큼은 꽤 높은 편이다. 요약하자면 "역적인데 인물은 인물이다." 정도로 강조점이 다를 뿐 이것은 사실 당대부터 근대의 신채호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진 내용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천하를 대표하는 영웅의 대명사로 언급되었고, 한국에서는 역적이라고 욕을 하다가도 막상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통쾌하게 질러버리는 연개소문을 은근히 그리워하고, 또한 안시성의 일도 그의 공으로 여기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현대에는 사료의 행간을 더듬어 짐작만 할 뿐이지만 1차 사료가 편찬될 시점의 중국에서는 연개소문의 영웅적인 능력이 당태종과 같은 거물들을 이길 정도였음이 익히 알려져 있었다.
김부식을 비롯하여 연개소문에 대한 대체적인 평은 '재주는 뛰어나지만, 나라를 올바르게 받들지 못했고 성질이 더러워서 끝내 대역죄까지 저지른 인물'이었고 일단 나라를 구한 공만큼은 높이 쳐주었지만,
함부로 임금을 죽이고 오만하고 잔인한 행동을 한 데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그나마 병들어 천수를 누리다 간 것도 반역자 치고는 운이 좋은 최후였다고 사론에 대놓고 실어놓기도 했다.
다만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평과는 미묘하게 다른 듯하다.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나라를 말아먹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등은 그냥 대놓고 나라 말아먹은 것들이라고 적어 놓았으니.
군사적으로는 명장이라는 평가가 많다. 마멸되고 은폐된 기록의 편린 속에서도 광역 전선, 공성전, 수성전, 회전, 기동전, 시가전까지 산전수전을 겪은 전력을 행간에 남긴 수십 년 동안,
그는 영양왕 시절 시가전에서 불세출의 기량을 보여준 영류왕 고건무를 같은 방식으로 처리해버린 후 집권했으며, 총사령관으로서는 대륙의 제1인자인 당태종 이세민에게 비참한 패배를 안겨주는가 하면
야전으로는 당나라 제1인자였던 소정방에게도 굴욕을 안겨주었으며, 사수 전투와 같이 최전선에서 굵직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각 분야마다 도장깨기를 하듯 천하의 1인자들을 모조리 제압하고 중원 대륙에 천 년 넘게 명성이 울려퍼진 사례는 한국 역사를 통틀어 비견할 이를 찾기가 힘들 지경이다. 집안 싸움에서만 칼 들고 무적으로 군림하다 정작 외세에는 무력하던 여타
무신 집권자들과 격이 다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서도 당나라의 쟁쟁한 명장들을 압도한 연개소문의 존재감은 매우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당태종이 비참하게 패배한 직후인 650년대에 이미 연개소문은 사람들을 잡아먹는 마왕 같은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관련된 전승이나 소설로 가면 거의 최종 보스급의 위엄을 자랑할 정도다. 대표적인 것이 설인귀가 주인공인 《설인귀정사략》이 있으며, 산동성이나 강소성에도 그런 형태의 연개소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요동에서 북경을 지나는 기행문을 보면 연개소문의 고장으로 아직까지도 연개소문의 강대함을 논하고 상을 세워 기리는 이야기까지 실려 있는 등, 고대 로마에서의 한니발 바르카에 준하는 위용을 보였다.
일례로 당나라의 병법서 《이위공문대》의 한 대목에 따르면 전체적으로는 스스로와 이세민을 띄우면서 연개소문을 깎아내리는 발언이지만 역으로 병법가로서의 연개소문의 면모 내지는 이미지를 파편적으로나마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4-2 현대의 평가
근대를 거치면서 연개소문의 평가는 조금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데 다른 면으로 극단적인 모습까지 보인다.
외세에 유린당한 무력한 시대를 거치고 왕조시대의 군신 간의 충의라는 가치에서 한결 자유로워지면서 외세를 무찌른 영웅으로서의 용맹하고 자주적인 모습이 한층 더 부각되는가 하면
이전까지 단순히 당태종의 침략을 막아냈다는 개략적인 부분을 넘어 그 행적이 왜곡되고 은폐된 정황까지 찾아내어 그 업적을 복원하려는 시도도 이뤄지며 경우에 따라서는 민족주의적인 욕구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오판이 고구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실패임에는 분명한 사실이기에 호국정신 고취 외에는 큰 영향을 줄 순 없는 상황이다. 연개소문은 그를 중심으로 고구려를 재편하여 당나라와 오랫동안 맞서 싸울 수 있게 했지만
불리한 시대적 여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한 지도자라 할 수 있다.
비록 전쟁의 발발여부를 온전히 결정할 위치는 아니었지만 일단 고구려와 당나라는 기본적인 체급 차이가 현저했으며 돌궐은 망한 지 오래였고 토번은 아직 어그로 끌기 전이라 모든 국력이 고구려를 향했고 이는 고구려에 치명적이었다.
백제가 오래 버텨주지 못했기도 하고 신라까지 당나라를 도와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연개소문은 연회장에서 유력인사 180명을 한방에 죽여 나라의 인재들을 싸그리 몰아치우는 짓거리를 감행해 자기 외에 유력한 인재들을 제거했다.
게다가 그의 후계자 선정 실책이
고구려 멸망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 대한 책임은 이견이 거의 없다. 장남이었든 차남 이하였든, 누군가를 내정했다면 그에게 권력을 제대로 몰아주고 나머지는 공식 후계자에 개길 수 없도록 권력을 한정시켰어야 했다.
그렇지만 연개소문은 세 아들 모두에게
어릴 때부터 높은 관직을 줘서 국정에 참여하게 하였고, 후계자인 장남 남생의 관직은 막내인 남산과 차이가 크지 않았다. 이는 연개소문 사후 3년도 되지 않아 고구려가 내전으로 인해 자멸에 가까운 파국을 맞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고구려 멸망이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싸웠던 점이 크다고 본다면
향후 분쟁의 씨앗을 낳음으로써 서로 싸울 판을 깔아놓았던 연개소문의 책임은 적지 않다.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정에 대해서 최근엔 연남생을 후계자로 삼고, 가문 일원들이 그를 보좌하는 공조 체계를 만들려고 시도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생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최후엔 삼형제 주위의 측근들의 이간질로 인해 바로 무너지는 취약한 패착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연씨 가문의 내분에 대해 고구려가 국가적으로 할 수 있는 그 어떤 적극적이고 제도적인 수습책도 없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권력구조 증발을 야기한 연개소문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서, 연씨 가문에 내분이 발생한 건 삼형제들 개인의 인격 문제이지만, 연씨 가문의 내분이 고구려의 멸망으로 직결된 건 연개소문의 책임이란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태돈 교수는, 연씨 가문 내분에서 야기된 고구려의 멸망을 '후세대의 인격 문제'를 넘어 '연개소문이 뿌린 씨앗'으로, 고구려의 국제정세적 위기(특히 대신라 관계)를 '연개소문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이 아닌
'연개소문 개인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으킨 결과'로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