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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홍보)팀 게시판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흥선대원군과 강조를... 아니 고려시대 중랑장 후순인 충무공 이 순신이상으로 고려시대 양 규 장군과 강 감찬 장군을 알아야... 국짐은 정당해산만이 답.

혈맹(?) 미국 이상으로 왕서방 중국(그 동북공정부터 백두산까지... 이들의 주요 역사 왜곡 문제는 내 통일후에 집중 성토한다... 사실 만주는 원래 고구려 땅이며 한반도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는 이곳도 한민족이 주인이였던 우리 땅... 그러나 아직은 참는다... 분단된 국가의 남한인으로서... 내가 중국 사대주의자라는 일부 비판이 있는데 아님을 강조한다.)도 건드려서는 안된다. 이 재명 대표의 인식은 옳으며 우리와 (양안)대만문제가 뭔 상관인가.... 주변 4대강국은 중립으로 다스려야 한다... 강력한 1억명 내수 경제 체제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북한도 전쟁이 아니고 평화로 자꾸 유도하여 결국 내부 분열에 의한 점진적 통일 방향으로 가야한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일본, 중국, 러시아는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 근데 대한민국에서는 이 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북한의 인구 2500만명과 재외동포까지 합쳐 1억명은 있어야 우리는 부국강병의 강대국으로 올라설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기본적인 외교는 북한과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주변 4대강국을 우리의 입맛대로 조절하는 중립국 입장으로 기여코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심화되고 있는 저출산 고령화의 남한의 소멸론이 부각되는 현 시점에서도 그렇고 가까운 미래 보호 무역주의 심화와 신냉전에 따른 자국 중심주의의 폐쇄경제가 대세로 접어들고 있는 가운데 한반도 외교정책의 방향은 이것이다... 가까운 미래 북한은 이렇게 예상하고 있는 중이다... 3대째 독재체제로 움직이고 있는 김 정은이 마지막이다... 이 양반 사후전 분명히 내부 붕괴가 일어나고 우린 급속하게 진행될 서독의 동독 흡수합병식 통일에 이제부터라도 대비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양키 코쟁이들부터 왕서방들이 보일 거부 반응과 일본과 러시아의 방해공작을 막아낼 수 있는 외교/국방 정책을 지금부터 수립해야 하며, 미국한테서는 정말로 전작권부터 돌려 받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한반도 남한의 자주적 방위를 방위비나 띁어내 자국 방산업체들의 글로벌 장악을 유지하려는 미국 주도하에 냅둬야 하는가... 양키 코쟁이들한테 언제 돌려줄것이냐고 강하게 주장해야 한다... 우린 전작권도 필요하며 우주방위청 이상으로 주변 4강국을 다스릴 항공모함 도입도 필요하며 필요시에는 파키스탄도 가지고 있는 핵무장도 원한다... 이 아침 강력한 민족주의자이자 강성 진보주의자인 게코(Gekko)의 대북관과 외교관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에 부합되는 정치인을 후원하고 있다는 말씀도 아울러 드리고 있는 중이다... 이 재명이라... 이 양반 뒤에 반드시 내 외교(국방)관에 부합하는 강력하고 진정한 진보성향의 인물이 나올 것이다... 그것도 전라도에서...

 

 

조만간 대종영할 예정인데, 난 아직도 강조의 마지막 일성이 메아리친다... "(야만인이 아니고) 난 고려의 신하다..." 이번에 말이다. 이 성계와 강조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204

 

조선조 사림화(이들은 영정조(고 김 대중, 고 노무현) 치세기간동안 실사구시의 실학을 죽였고 그 동학혁명도 잊었고, 반일항쟁투쟁도 잊었으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도 잃어버린 역적들)돼버린 이 수박(비명이든 친문이든)들을 다 걸려내야 민주당원및 대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한다... 현재 전 민주당원들과 지지 국민들은 이 재명 대표하의 강력한 친정체제를 원합니다... 수렴청정한 천추태후나 김 치양같은 간신들에 휘둘려 무능력했던 목종이 아니고 강력한 군주 현종을 원하고요... 전 그 강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국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3각균형하의 자주적 나라를 건설하게 한 외교/국방의 강 감찬, 호락호락하지 않던 지방의 있는 자들이였던 호족들을 통제하는 5도양계의 전국적인 체계를 만들도록 도운 행정/지방제도의 김 은부같은 명신을 얻어 고려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고, 원성황후/원혜황후가 낳은 아들들로 덕종, 정종, 문종의 100년 치세를 열었듯이, 이 재명 사단안에서 없는 자들인 중하위층및 서민들과 중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 중심의 나라를 다시 세우는 자주적 부국강병을 이루게 해줄 이들이 이 고 김 대중, 고 노 무현에 이은 이 재명 사단안에서, 강력한 진보/민주 성향의 대통령들과 명신들이 줄줄히 나오기를 원하고요... 이 재명을 반병신의 목종을 만들려는 모든 이들은 현재 강조(이 원종)역을 하고 있는 게코(Gekko)가 철퇴를 계속 내릴 것입니다... 제 생각에 좀 심하면 현종의 충신중의 하나인 친종장군 지 채문식으로 합니다... 평양성을 거란에 바친 간신 서경부윤을 철퇴로 죽이거나 발해 후손 대도수 장군을 사지로 몬 동북면도순검사 탁 사정을 죽이려한거나 왕을 겁박하고 반란을 일으킨 고려 중후반 대몽 항쟁에서 무능력의 대명사인 최씨 무신정권의 고조할아버지격인 최 질과 그 모사꾼 개경부윤의 목을 베듯이 저도 자객으로 기능하고자 합니다...

 

 

구정인사차 GI 큰 자본주 사무실을 예방했는데, 전 한과세트가 아니고 책을 구정선물로 주시네요^^ 역사관이 같은 제 블로그를 꾸준히 보고는 계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113

 

정통 진보주의자로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만약 한반도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역성혁명인 위화도 회군없이 고려가 800년이상 한반도를 지배했다면 역사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https://samsongeko1.tistory.com/12933

 

아따아~~~ 역시 고구려 후예들답군...!!! 내가 볼땐 미국과 우리가 똥줄타게 생겼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951

 

 

아래는 춘계운용 네번째 주간모임후 집에 돌아와 주요 6개 SNS에 올린 코멘트입니다...

 

 

"조만간 "깜깜이 여론조사 기간"으로 접어들어 저도 그 직접 개입형 과외서비스 이용자들인 부외계좌 고객들 74명과 이곳에서 GI 자산운용본부내 자산운용과 고객계정으로 넘어간 38명등 112명에게 물어봤네요^^ 강원도부터 제주도까지 전국 방방곡곡에 사시는 분들이라 말입니다... 더불어민주당 62명, 국민의힘 33명, 조국혁신당 13명, 개혁신당 3명, 새로운미래 1명을 지지한다시네요~~~^^ 참고로 돈벌어다(^^)주고 있는 주운용자 게코(Gekko)가 강성 진보주의자이자 전 민주당원임을 참조해 눈치들을 아주 안봤다고는 할 수 없으니 재미로 아시고요~~~^^"

 

 

"고려거란전쟁"에서의 강 조에 대한 해석을 이제는 인정한다...

 

 

황해도 지방의 토성(土姓)으로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穆宗) 때 중추사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1009년(목종 12) 김치양(金致陽)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사통해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켰을 때, 목종의 명을 받고 궁궐수비를 위해 개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경에 도착하기 전 동주(洞州: 현재 황해도 서흥)의 용천역(龍泉驛)에 이르렀을 때 내사주서(內史注書) 위종정(魏從正)과 최창회(崔昌會)가 거짓으로 전한 개경의 소식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의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해 다시 본영(本營)으로 되돌아갔다.

 

한편 천추태후는 군사들이 오는 것을 꺼려 내신을 보내어 절령(岊嶺: 현재 황해도 황주군의 자비령)을 막고 사람의 왕래를 차단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걱정한 강조의 아버지는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죽장(竹杖) 속에 서신을 넣어 보내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들어 와 국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편지를 받자 강조는 목종이 죽은 것으로 인식하고 부사(副使)인 이부낭중(吏部郎中)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갑졸(甲卒) 5천인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주(平州: 현재 황해도 평산)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왕이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듣고 즉시 군사이동을 멈추었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이제 와서 주저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자 다시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들어갔다. 목종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궁궐을 점령한 뒤 황보유의(皇甫兪義)와 김응인(金應仁)을 시켜 김치양 일파에 의해 신혈사(神穴寺)로 쫓겨나 있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 훗날의 현종)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도망간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30여 인을 귀양 보냈다. 또한 목종을 폐위시켜 태후와 함께 충주로 보냈는데 그 도중에 상약직장(尙藥直長)김광보(金光甫)를 시켜 살해함으로써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 뒤 새로운 국가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다. 은대(銀臺: 승정원)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해 세 관청의 기무를 모두 이곳에 소속시켰다. 은대와 중추원은 국왕의 측근보좌기구임과 동시에 그 동안의 정치가 모두 이 기관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의 혁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계속된 관직개편에서 자신은 중대사(中臺使)에 오르고 중대부사(中臺副使)에 이현운, 직중대(直中臺)에 채충순(蔡忠順), 상서우승 겸 직중대(尙書右丞兼直中臺)에 윤여(尹餘)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인사조처는 국왕 측근직의 단일화를 꾀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군사권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권력집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이 1009년(현종 즉위년) 3월에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에까지 오름으로써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거란의 침입으로 강조의 대권은 제대로 행사되지도 못하고 좌절되었다. 1010년 11월, 거란의 성종(聖宗)은 목종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쳐들어왔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의 제1차 침입 때 강동육주(江東六州)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가 송나라와 화친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에 있었다.

 

이에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거란군이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의 분전으로 난항을 겪게 되자 흥화진(興化鎭: 현재 평안북도 의주)을 단념하고 통주(通州: 현재 평안북도 선천)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강조가 이들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강조는 통주성 남쪽까지 내려와 물을 사이에 두고 세 곳에 진을 치게 하였는데 거란군이 중앙을 찌르면 양쪽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번번이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인 검차(劒車: 차체와 바퀴살에 단검을 빈틈없이 꽂아 적의 접근을 막는 2륜전차)를 만들어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승리에 자만하여 거란군이 공격해 온다는 보고를 듣고도 경계를 하지 않다가 결국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패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부장(副將) 이현운,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郎)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노의(盧顗),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이때 거란의 성종이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고 권유하자,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해 고려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반면에 이현운이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뜻을 굽히자 발길로 걷어차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나무라면서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1. 개요

 

고려 초기의 문관이자 권신. 고려 왕실 반정[7]의 시초 격인 강조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목종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으나, 되려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직접 출정했고, 초반에는 선전하다가 통주 전투에서 패배했다.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해 전장 한복판에서 최후를 맞았다.

 

2. 생애

 

ㄱ. 출신

 

강조의 본관과 세계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씨가 토성으로 나와 있는 곳이 주로 황해도 서해안 일대의 군현들이다. 따라서 강조의 본관은 신천(信川)·영강(永康)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영강 강씨의 시조 강증(康拯, 1049년 ~ 1120년)은 강조 사후의 인물이므로 강조는 신천 강씨의 인물으로 해석해야 한다. 신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조는 신천 강씨의 인물로 나온다. 부를 '태주'로 하는 1-1쪽(고려시대 인물)을 보면 조(兆)를 확인할 수 있다.

 

ㄴ. 강조의 정변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북방 군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알아챈 목종은 강조를 빨리 내려오게 해 자신을 호위하게 한다. 하지만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합천에서 갓 도착한 17세의 대량원군을 즉위시킨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讓國公)[9]으로 끌어내린 뒤 고향 충주로 내려가고자 하던 그를 부하들인 김광보와 안패를 보내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시해한다. 이후 천추태후를 황주로 유배시키고 친족을 섬으로 유배, 김치양과 그의 6살 아들, 목종에게 빌붙어 전횡을 일삼던 유행간 등을 죄다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내면서 천추태후 - 김치양 세력과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강조는 이어서 2월에 중대사(中臺使), 3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해 요직을 차지한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강조가 목종이 시해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개경 근교까지 휘하 군을 이끌고 진군하였는데 목종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하자 이미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와 버렸는데 반역으로 몰릴까 두려워 폐위시켰다는 설과 강조가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추문이 많은 목종에게 불만을 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폐위했다는 설이 있다.

 

ㄷ. 제2차 여-요 전쟁

 

그런데 문제는 북적(北狄) 거란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요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주를 시해한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의군천병(義軍天兵)[14]이란 이름을 붙인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물론 요성종이 진짜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다. 성종은 모후의 사망 이후에 황제 단독으로 친정을 하여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조정과 군부에 보여주고 1차 여요 전쟁 이후에 고려가 통제력을 갖고 개척한 강동 6주를 빼앗거나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기존에는 송을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든든히 하려는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는 설이 정설처럼 여겨졌지만, 이미 송 - 요 양국은 전연의 맹을 맺어 평화를 이뤘고 서로가 상대방을 완전히 끝장낼 수 없음을 인식한 상태였다. 역사적 기록에서도 성종은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고 철퇴할 때에도 현종의 입조를 약속받고 퇴각했다. 이후에도 송으로부터는 세폐를 받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는 침공하는 모습을 보면, 대송 전쟁 때문에 고려를 침공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성종의 침공을 알게 된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직위를 받아 군권을 위임받고 직접 출진한다. 사료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본문에 언급했듯이 강조가 이미 실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도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권의 위임 과정도 조정의 결재는 요식 행위이고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2차 여요전쟁 때 고려는 3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

 

강조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사령관으로서 직접 출전했다.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의 행적을 보면 고려의 장수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전했다는 해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강조가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해도 출전이 불가피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 취약한 권력기반 : 이때 강조는 전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음에도 권력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당장 중신 중 한 명이자 목종으로부터 현종의 호송 임무를 명 받았던 최항이 정변을 일으켜 군왕을 끌어내린 강조를 보고 "고금에 이러한 일이 있었느냐?!"며 대놓고 일갈할 정도였다. 당시 명백한 권력자였음에도 면전에서 대놓고 비판을 다 들을 정도로 초기부터 권력 기반과 입지가 불안정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거란이 자신의 집권을 명분으로 침공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반대 세력에게는 "강조 저 놈 때문에 거란이 쳐들어 왔는데도 자신은 겁나서 출전도 하지 않고 비겁하게 숨어 있다."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 빈약한 인력풀 : 게다가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 거란의 침략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병력 지휘를 맡겨서 출전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인사도 전혀 없었다. 아니, 신뢰 이전에 그런 능력과 위치를 가진 인사부터가 없었다.[18] 결국 본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전해야 했던 것이다.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진에서 양규가 지휘하던 고려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하천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棋.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강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군영을 세워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을 차지하였는데 강조가 그 중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군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차로 진을 쳤다가 거란의 군병이 들어오면 검차가 합공하여 꺾거나 쓰러뜨리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항상 이겼다는 뜻)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였다. 강조는 점차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자 강조는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방심하기 시작했다. 한편 거란군은 대군이 한 번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전략을 바꿔 소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나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봉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파견해 삼수 쪽 진영을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으로 나온다. 허나 강조는 처음 삼수 쪽 진영, 즉 자신이 있는 진영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믿지 않았다. 아니면 소수만 잠시 들어온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많이 들어오게 해라."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인데, 거란군의 최고 정예인 이들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였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 · 김계부(金繼夫) · 이원(李元) · 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

 

고려사절요》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적이 이미 안까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보고를 또 받자 그제서야 사태가 여간 심각해진 게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다. 다른 두 진영이 협공하기 전에 본인의 진영이 먼저 붕괴되자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에서는 이때 목종의 혼령이 강조 앞에 나타나 "이제 네 놈은 결코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호통을 치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한다.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 볼 때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강조의 방심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일부 평가에서는 "전술적 부분보다는 병사들의 숙련도가 강조의 지시에 대해 그만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혹은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한군데 뭉쳐 기동력이 제한되어버리면 그냥 앞줄의 병사 때문에 안 쪽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해버려 뭉치가 되어버리기 십상인데 이런 점을 이용해 강조는 "거란군은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군이라 이를 제한시켜 버리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란이 그것을 무시할 정도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줬다는 것. 실제 거란이 기동력을 살려 소수 정예군만으로 휘젓는다면 정예 '우피실군'이 많은 손상을 입기는 하겠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회복하니 전 같은 몰아죽이기 전략은 안 통했을 것이다. 결국 거란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썼고, 강조는 이 점을 놓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지휘하던 30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파되면서 순수 전사자만 무려 3만 명이나 발생했으며, 그 외 이현운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덤으로 사로잡혔고,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ㄹ. 장렬한 최후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후 포로로 잡힌 강조는 결국 거란 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요나라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후세인들이야 고려가 거짓말처럼 승리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강조 입장에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라는 나라의 사활을 자기 손으로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만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과 죄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오랫동안 자신의 부하로 활약한 이 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했다. "난 고려 사람이다, 어찌 너(汝)의 신하가 되겠느냐?"[20]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했다.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3. 평가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심은 없었다.

 

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강)조가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강)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

 

이후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선위 받기에는 시기상조이거나 명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단 "나는 절대로 왕이 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새로운 분을 왕으로 모시려 할 뿐이다."라고 허울 뿐인 충성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이후 강조의 행적을 보았을 때 권력욕 자체는 있었어도 역심은 없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무리해서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얼굴마담 하나 세워놓고 본인이 권신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강조가 실권을 잡고 뭘 해보기도 전에 거란군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된 탓에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게 가설의 영역이 되어 버렸긴 하다.

 

외치 부분에서는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닌 최고 권세가가 직접 최전선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점만큼은 분명 호평받을 만하다. 물론 상기되어 있듯 일단 명분론적으로는 거란의 침공 자체가 자신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강조가 출전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이상하기는 하다. 또한 자신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강조 자신이 직접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그래도 포로로 잡힌 뒤 요 성종의 회유를 받아들여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고, 특히 살이 찢겨나가는 극형을 받으면서까지도 스스로를 "나는 뼛속까지 고려인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것을 보면 강조는 고려 왕가에 대한 충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고려인이란 정체성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간신들처럼 단순히 권력만을 탐하는 것이라면 그냥 요 성종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였을테니. 심지어 정벌의 명분이 반역을 저지른 강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로잡자 황제 본인이 직접 나서서 투항을 권유한 데다가, 강조 본인의 참패로 고려의 전쟁 수행 능력이 박살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개를 부르짖은 만큼 이 부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내치 부분에서 강조는 집권 이후 본인이 선전한 대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천추태후김치양과 그 휘하 일당들을 전부 보내버렸다. 문제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목종마저 폐위 후 시해해버리고 현종을 옹립해 졸지에 권신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 가 거란의 침입으로 본인과 휘하 세력이 전부 쓸려 나가면서 순식간에 정적들이 사라져버린 현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건 어찌 보면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기도 한 것이, 당장 강조의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현종은 왕권 강화고 나발이고 나라 멸망 직전의 사태를 맞이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의 나주시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고, 피난 와중에도 사실상 반란군이나 다름없던 지방 호족들에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현종이 《고려사》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군이라 이후 전란을 수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건 불행 중 다행이다. 덕분에 강조도 의도한 건 아닐 텐데 얼굴마담 현종이 알고 보니 능력자라고 재평가받는 측면도 더러 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임금을 시해하고 권신이 된 점이 못마땅했는지 《고려사》의 <반역 열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26] 사실 함부로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위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해한 것이 가장 임팩트가 컸지만, 목종에게 멋대로 시호, 묘호, 능호를 올린 것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군주의 시호와 묘호, 능호를 정할 때는 먼저 신하들과 논의한 후 現 왕이 최종 결정을 하는데, 강조는 신하들과의 논의와 왕의 재가도 무시한 채 멋대로 올려버렸다. 이렇게 올려진 시호와 묘호, 능호는 후에 현종에 의해 수정된다.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조를 위인으로 대우해 줄 수 없었고, 고려사에서 죽을 때 비로소 목종의 혼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식의 서술을 추가했다.

 

한편으로 현종과 강조의 관계에 있어 짐작해 볼 기사가 있는데, "현종 2년 8월에 강조의 일당들을 유배 보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때 강조의 일당으로 지목된 5명 중 3명이 정변 당시 강조의 부하였거나 강조의 편에 섰던 이들로, 탁사정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붙었고,[28] 최창과 위종정은 강조의 부하들로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들이다. 물론 대부분은 잘 나갔지만, 저 5명을 강조의 일당이라고 엮어 부른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강조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대에 실제로 강조에 대한 평가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강조를 대놓고 반역자로 규정했다면 그 가족들도 연좌제로 처벌을 받았을 텐데 정작 강조의 가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어서 이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없다.

 

4. 기타

 

  • 고려사 최초의 쿠데타 성공자이던 강조의 죽음은 이후 후대 쿠데타 세력에게 교훈을 줬는지 후대의 최씨 무신정권몽골의 침략에 본인들이 직접 싸우지 않고 도망쳐 수비만 하면서 몸보신에만 신경썼다. 당연히 그 와중에 국토는 짓밟히고, 죽어나간 건 힘없는 백성들이었다.
  •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도 묘하게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다.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일대 회전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고 패배로 이 피난까지 갈 정도로 나라가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는 점이 비슷하다.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고, 신립은 선조사돈이라 당시 왕과 밀접한 관계인 인물들이라는 점도 겹친다. 신립과 비교했을 때 강조는 기록상으로는 통주 전투를 뺀 특별한 전적이 보이지 않지만[30] 신립은 임진왜란 이전 니탕개의 난에서 활약한 조선 수위급 용장이었다. 그렇지만 본인들의 마지막 전투인 통주 전투와 충주 탄금대 전투를 비교하면 강조는 초반에는 선전했지만, 신립은 일본명나라한테 모두 놀림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졸전을 펼쳤다. 그래도 최후는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참히 생을 마감했으니 비슷할지도 모른다. 다만 반론도 있는데, 신립도 사실은 탄금대 전투에서 초반엔 상당히 선전했으며, 어차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이겼다고 해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군에게 협동당해서 참패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령 사수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대다수 병력이 농민 징집병이라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매복기습작전 수행 능력에 차질이 있으며, 도주의 우려가 컸고, 기병의 기동성을 살리기도 어려웠으며, 당시 조령에는 요새시설조차도 전무했다. 그리고 고니시군과 가토군, 구로다 군이 모두 한꺼번에 북상중이었기에 한양북상저지는 현실적으로 불가하며, 아마 더 끔찍하게 패전했을 것이다.
  • 600년 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과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북방의 방비를 담당한 장수들이었으며,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다는 점까지는 비슷하다. 그러나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 다른 공신들에 밀려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고, 이괄의 난 때는 초기 승승장구에 자만했는지 전략을 잘못 짜서 실패하고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고 만다. 그에 비하면 강조는 자신이 거사를 안 하면 꼼짝없이 왕위가 김치양의 아들에게 넘어가 왕씨의 사직이 끊길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정변의 명분이 충분했으며, 애초에 목종의 명으로 개경 진격을 준비한 것이었다.
  • 이괄이 국왕으로 세운 흥안군은 강조가 국왕으로 세운 현종보다 능력과 평판이 좋지 않다. 오죽하면 일반 백성들조차 이괄이 흥안군을 국왕으로 세웠으니 오래 가지 못하겠다는 발언까지 하였을 정도다. 실제로 이괄이 패한 이후 흥안군도 국왕이 된지 단 3일만에 목숨을 잃었다.
  • 본래 임금의 충신이었고 최전방 방위 총책임을 맡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으나 임금이 죽었다는 헛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제국 시대 인물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비슷한 모습이다.
  • 강조는 형 강억(億)이 있다. 즉 부모가 이름을 억, 조로 지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