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고 있네요...
1979년 12월12일(일명 12.12 사태)에 내란을 일으키고 반란 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살인마 전 두환이 밑에서 오른팔 역할을 했던 보안사령관 전 두환의 비서실장이였던 5공의 설계자 개세끼 허 화평... 육군참모총장 정 승화 장군을 체포했던 보안사 인사처장 허 삼수, 80년대에 주요 글쟁이/기자 탄합에 주동자 역할을 했던 언론통폐합을 주도했던 허 문도... 이 3허에 수도경비사령부 장 태완 장군 소속의 30경비단장으로 그 상관을 배신하고 살인마 전 두환이게 붙허 반란군의 근거지를 제공하고 5공에서 전 두환 2인자로 행세했던 장 세동이도 아직 살아 있네... 내란죄는 형법상 사형이나 무기징역밖에 없고만 말이다... 실제로는 내란죄 우두머리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무기금고에 처하고 모의에 참여·지휘하거나 그 밖의 중요한 임무에 종사할 경우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에 처한다.
난 "서울의 봄"을 보면...
수도경비사령관 정 우성씨 주인공보다 극중 3허와 장 세동이 역할을 했던 조연들을 더 주목했다... 이 세끼들만 생각하면 이가 갈리거든... 5공의 설계자인 허 화평과 2인자인 장 세동이가 현재 주요 보수 우익 꼴통들의 원조거든...
여전히 한국땅에서 '정의사회구현'은 안되고 있고...
국민의 1/3은 여전히 이 보수 정권을 따른다...
상모질이 윤씨의 자유 민주주의 수호..??
제11·12대 대통령을 지낸 전 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사진은 1979년 11월 6일 전 두환 당시 계엄사 합동 수사 본부장이 박 정희 전 대통령 사망사건 관련 발표를 하고 있는 모습.
전 두환 정권의 군부 핵심으로 꼽혔던 허 화평 전 의원이 지난달 29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노 태우 전 대통령의 빈소 조문을 마친 뒤 나서고 있다. 2020.10.29
2.12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 허 삼수의원이 검찰에 출두하고있다.
국회 문공위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출석한 허 문도 전 청와대 비서관이 의원들의 80년 언론통폐합 상황에 대한 신문에 답하고 있다.
통일민주당 창당방해 및 5공비리 사건과 관련, 구속기소됐던 전안기부장 장 세동씨가 1993년 12월 구속집행 정지로 수감돼 있던 영등포구치소에서 출소,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밝은 표정으로 답례하고 있다.
허 화평 이사장의 미래한국재단이 시행한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 조감도.
미래한국재단이 시행해서 분양한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의 현재 모습.
인터넷 구인구직 정보 제공 업체인 '잡코리아'에 올라온 미래한국재단의 2014년 매출액
미래한국재단은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을 분양하던 2014년에 서울 송파구 가락동 소재 업무용빌딩을 매입했다.
미래한국재단이 지난 2014년에 매입한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업무용 빌딩
미래한국재단이 2014년에 매입한 서울 송파구 가락동 업무용 빌딩. 빌딩 안내판에 'THE NEXT KOREA FOUNDATION B/D'라고 적혀 있다.
지난 2023년 10월 17일 <영남경제신문>이 주최한 ‘영남경제포럼’에 참석해 강연하고 있는 허 화평 미래한국재단 이사장
난센스네요.. 1979년 12.12사태때 진압군이였던 수도경비사령부와 특전사령부를 계엄군으로 쓰려고 했던거네... 방첩사령관은 그 당시 헌병감 아니야?? 영화를 거꾸로 해석하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41
1979년 12.12 사태때 끝까지 반란군에 저항한 정 병주 특전사령관(부관이였던 그 당시 전사자 고 김 오랑 중령은 명예회복 됐고요, 육본 벙커를 지키려다 특전사 총탄에 전사한 정 선엽 병장도 있습니다.. 잊지 마시라고요... 그 당시에도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애국자들은 있었다고요... 살인마 전 두환같은 깡패를 막을려고요...)과 대포와 탱크로 전 두환을 처단하려고 했던 장 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이 이야기 들으시면 기가 차겠네요... 이 주말에 전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1980", "화려한 휴가"까지 이번주 상모질이 윤씨의 비상계엄 선언과 관련된 네 개의 영화나 정말로 봅니다... 고대 선후배들과 통화도 좀 해야겠네요...
이 밤에 영화들이나 봐야겠네..!!!!! "서울의 봄", "1980", "화려한 휴가"... 계엄군도 막지 않는 계엄선포나하는 이런 한심한 대통령을... 다시 글로벌 게망신...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30
와하아...................
차라리 자주/자립/자조의 확고한 조국 근대화 신념이나 있으셨던 박 정희 전 대통령이 부활하셨으면 좋겠네... 최악의 내수 경기 상황에 글로벌 경제/산업/금융/증시에서 왕따중인 것도 서러운데, 이런 자중지란을 대내외에 보여주는 대통령이라면 나같으면 쪽팔려서 자진사퇴한다... 내려와라... 국민의 과반이상이 선출한 국회의원을 종복세력이라 규정하고, 경제는 폭망에 민생은 도외시한채 굴욕 외교와 행정 난맥상을 보여준 현정권에게 내각 총사퇴와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다... 국회의원이야 지역민들이 선택한 것이고 진정으로 국민들이 선택한 대통령이 이 정도의 자질이라면 이건 아닌 것이다... 야당 대표를 설득못해 대화를 거부라는 아집에 대국민 설득보다는 허울좋은 명분만 내새우는 이런 고집불통의 인간이 대통령이라는게 정말로 쪽팔리니깐이 제에발 내려와라... 그게 국민들을 진정으로 위한 것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비상계엄이냐...
오늘밤 외신들이 한국을 어떻게 봤을지....
쪽팔리고 창피해서 죽고 싶다...
[2021.11.23-전 두환 사망] '쓰리 허'와 장세동... 5공 실세들의 현재는...
'5공 설계자' 허 화평, 최근 노 태우 빈소서 "5·18 묻지말라"
'5공 2인자' 장 세동 대외활동 없어... "그분 모시는 데 정성"
"부패를 일소한 후 병영에 복귀하겠다."
23일 사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전씨가 즉흥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그의 최측근으로 불리던 허화평 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전씨의 지시로 작성한 '5·16 교본'에 있던 대사였다. 허화평은 전두환 정권 시절 허삼수, 허문도 씨와 함께 '쓰리(3) 허'로 불리며 핵심 실세로 꼽혔다.
'5공 설계자' 허화평 "5·18, 묻지말라"
허화평 씨는 '5공 설계자'로 불렸다. 허 씨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신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속했다. 그는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으로 12·12 군사반란 획책에 가담했다.
허씨는 전씨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청와대 정무1수석비서관으로 일하며 최측근 거리에서 전씨를 보좌했다. 그러나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 당시 전씨의 친인척 공직 사퇴를 건의하면서 전씨와 멀어졌다.
그해 말 청와대를 떠났다. 허씨는 노태우 정권 출범과 함께 국내 복귀한 뒤로 1992년 14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며 정치 행보를 이어갔다. 고(故) 김 영삼 전 대통령 지지를 선언하며 민주자유당에 입당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12·12 군사반란 관련자에 대한 사법 처리를 추진하면서 구속됐다. 15대 총선에서 '옥중 당선'됐지만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고, 16·17대 총선에서 연달아 낙선하며 정치권과 멀어졌다.
허씨는 지난달 26일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하자 유족 측 장례위원을 맡기도 했다.
그는 노태우 전 대통령 빈소에서 취재진과 만나 '노 전 대통령이 5·18 유족에 사과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그 부분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을 아꼈다.
'5·18 사격 지시'와 관련된 질문에는 "그건 저한테 물어보지 말라.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때 비서실장을 했기 때문에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허 화평 단짝' 허 삼수… 노 무현 전 대통령과 두번 맞붙어...
허삼수 씨는 육사 동기인 허화평 씨와 함께 하나회에 가입한 '단짝'이자 12·12군사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인사처장이었다. 당시 대령이던 허 씨는 12·12군사반란 직후 80여 명의 수사본부 병력과 함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씨 집권 이후 허 씨는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에 임명돼 실권을 휘두르며 실세로 자리매김했으나 허씨와 함께 눈 밖에 난 뒤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 연구원으로 활동하다 일본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1988년 국내 복귀한 허씨는 그해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당시 통일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부산 동구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허씨의 패배였다.
설욕을 노리던 허씨는 이후 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 노무현 후보와 재대결을 펼친 끝에 당선됐다. 15대 총선에서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낙선 뒤 구속됐다. 이후 더는 정치판에 뛰어들지 않았다.
허씨는 이후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당시에 유족 측 장례위원에 포함됐지만, 그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았다.
언론 통폐합 주역 허 문도… 2016년에 별세...
기자 출신인 허문도 씨는 1980년 신군부로부터 발탁돼 중앙정보부 비서실장, 문화공보부 차관, 청와대 정무비서관, 국토통일원 장관 등 요직을 지냈다.
언론 통폐합을 주도했고, 청와대 정무비서관이던 1981년 5·18민주화운동 1주년 분위기를 무마하기 위해 이른바 '국풍 81'을 일으키기도 했다.
허삼수·허화평 씨와 달리 전두환 정권에서 끝까지 남았던 허문도 씨는 1989년 5공 비리 관련 국회 청문회에서 언론 통폐합은 잘한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1996년 총선에서 낙선했고, 1998년 경남지사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16대 총선을 앞두고 자민련 공천을 받았지만, 공천장을 스스로 반납하고 불출마했다. 허문도 씨는 2016년 향년 76세로 별세했다.
'5공 2인자' 장 세동… "그분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다"
'쓰리 허' 외에 실세로는 5공 말기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있다.
장 씨는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으로 12·12군사반란에 가담했으며 대통령 경호실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 등을 지내며 '전두환 후계자'로까지 거론된 인물이다.
1987년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안기부장에서 물러났다.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5공 청문회에 출석해 전씨와 관련해 끝까지 입을 닫았다. 이후 5공 비리에 연루된 혐의 등으로 수 차례 옥살이를 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대선을 하루 앞두고 사퇴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무소속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해 정치 무대에 서지 못했다.
장씨는 이후 전씨의 연희동 자택을 꾸준히 찾으며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최근에는 전씨와 별다른 접촉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장씨는 특별한 직함이나 대외활동 없이 지내고 있다.
장씨는 2019년 5월 뉴스타파 취재진과 만나 "나는 그분(전씨)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했고, 그분은 그 정성을 사랑으로 저한테 갚아주셨다"고 말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이 동환 기자
[2024.11.18-단독]사유화 의혹 '허화평 재단' 재산 1000억 넘나...
미래한국재단, 판교 오피스텔 시행해 수백억 수익... 이후 서울 가락동 소재16층 건물 매입...
허화평 이사장의 재단 사유화 의혹과 재단 재산의 국고 환수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미래한국재단(이사장 허화평)이 10년 전 수천억 원대의 오피스텔 개발사업을 시행하고,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업무용 빌딩을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오마이뉴스>의 취재에 따르면, 허화평 이사장의 미래한국재단은 지난 2014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에서 3개 동 1000세대 이상의 오피스텔 개발사업을 시행해 분양했고,
같은 해 서울 송파구 가락동 소재 16층짜리 업무용 빌딩을 사들였다.
오피스텔 개발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으로 수백억 원대 건물을 매입한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에 600억 원대 안팎으로 추정되던 재단의 재산은 1000억
원대가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미래한국재단은 어떻게 판교 땅을 개발했나...
<오마이뉴스>가 '판교역 SK HUB'(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역로)의 등기부등본(등기사항전부증명서)과 건축물대장 등을 확인한 바에 따르면,
허화평 이사장의 미래한국재단은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의 시행자였고, 시공사는 SK건설이었다. 지난 2012년부터 분양에 들어갔고, 2014년 준공됐다.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은 판교업무지구 3BL에 위치해 있고, 지하 6층과 지상 8층 3개 동 1084세대(상가 제외) 규모의 대단지 오피스텔이다.
특히 주변에 NHN, SK케미칼, 네오위즈, 엔씨소프트, 넥슨, 삼성테크윈 등이 입주한 판교테크노밸리와 수도권 최대 규모 복합쇼핑몰을 내세운 알파돔시티가 있어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가진 오피스텔 단지로 평가받았다.
대지면적은 1만 906㎡(약 3305평)이고, 오피스텔은 전용면적 22.68(약 7평)~84.79㎡(약 26평)으로 구성돼 있다.
개별적으로 보면 전용면적 22.68~28.51m² 200실, 30.93~32.28m² 491실, 34.72~48.34m² 341실, 84.23~84.79m² 52실 등이다. 지난 2012~2014년 분양할 당시 분양가는 3.3m²당 990~1170만원 수준이었다.
(상가는 3.3m²당 1500만원 )
상가(42실)까지 합치면 총 1126세대이기 때문에 시행을 맡은 미래한국재단의 수익은 수백억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인터넷 구인구직정보 제공 사이트인 '잡코리아'에 나오는 미래한국재단 자료를 보면, 지난 2014년 재단의 매출액과 영업이익, 단기순이익은 각각 2251억여 원과 510억여 원, 약 430억 원이었다.
매년 수십억 원에 불과했던 매출규모가 이렇게 커진 데는 오피스텔 분양 수익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잡지나 정기간행물 발행업을 주로 하는 공익법인 미래한국재단이
어떻게 판교 땅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
미래한국재단의 전신인 현대사회연구소는 원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산운동 산 26-4번지(서판교)에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판교신도시 개발이 시작되면서 정부는 서판교에 위치한 현대사회연구소 부지를 공공택지로 수용하고, 동판교 땅(경기도 성남구 분당구 백현동 529번지)을 대토(代土)했다.
재단은 이렇게 대토 받은 땅에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 개발사업을 한 것이다. 대토보상제는 토지를 강제수용당할 경우 토지보상법('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평가기관에 의뢰해 토지의 감정가격을 확정한 뒤 가격에 맞는 사업 지역에 토지 조성 공사가 완료된 토지를 수용자에게 돌려주는 제도다.
2013년 감정가 341억 원, 현재 시세는 최소 524억 원 이상 추정...
흥미로운 사실은 미래한국재단이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을 분양하고 준공하기 전인 지난 2014년 4월 서울 송파구 가락동 소재 오피스텔 건물(효원빌딩)을 매입했다는 점이다.
판교 땅을 개발해서 얻은 부동산 수익을 건물 매입에 투자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3년 지어진 효원빌딩은 지상 16층, 지하 6층의 업무용(근린생활시설·업무시설) 빌딩이다.
효원빌딩의 등기부등본과 건축물대장 등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최초 소유자는 유동천 전 제일상호저축은행 회장이었다. 효원빌딩 바로 옆 건물(현재 제일오피스텔)은 제일상호저축은행 본점이 있던 곳이다.
빌딩의 소유권은 유동천 전 회장에서 제일캐피탈, 유훈씨(유동천 전 회장의 차남), 제일상호저축은행을 거쳐 지난 2014년 미래한국재단으로 이전됐다.
미래한국재단이 효원빌딩을 매입할 수 있었던 계기는 지난 2011년에 일어난 상호저축은행 불법대출사건이었다.
창업자인 유동천 전 회장은 지난 1972년 제일상호신용금고를 설립한 뒤 약 40년간 제일상호저축은행을 이끌었지만, 고객 명의를 도용해 1400여억 원을 불법대출하고,
약 100억 원을 횡령해 개인적으로 사용한 혐의로 구속됐다. 결국 제일상호저축은행(현 KB저축은행)은 영업정지를 당했고, KB금융에 매각됐다.
빌딩 인근의 한 부동산중개소 대표는 "3호선과 8호선이 지나는 더블역세권이기 때문에 가치는 상당하다"라며 "군인공제회에서 그 건물을 매입했다고 들었는데 미래한국재단이 샀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효원빌딩 근처 오피스텔이 최근 평당(3.3㎡) 1억 7700만 원에 팔렸다"라고 전했다. 빌딩의 대지면적이 978.2㎡(296여 평)임을 헤아리면 현재 시세는 524억 원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13년 4월 예금보험공사는 전국 11개 파산재단 사무실에서 26개 부실 저축은행 보유 물건 600여 건에 대한 공매를 열었다. 이 가운데 감정가가 가장 높았던 물건이 효원빌딩이었다.
대지와 건물을 모두 합친 감정가가 341억 1000만 원이었다.
미래한국재단이 예금보험공사의 공매를 통해 효원빌딩을 샀는지, 얼마에 매입했는지 등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등기부등본상 등기 원인이 '매매'라고 적시돼 있다.
그동안 확인된 미래한국재단 보유 부동산은 서울 종로구 신교동 개인주택과 효자동 4층 건물(재단 서울분소), 서울 강남구 신사동 상가건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 판교역 SK HUB A-244호(재단 본부) 등이었다.
이 부동산들의 가치는 600억 원 안팎으로 추정됐는데 판교역 SK HUB 오피스텔 개발사업과 효원빌딩 매입을 추가하면 재단의 재산은 1000억 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김 충립 "재단의 자산 국고로 환수해야"... 재단측 "어렵게 조직 운영"
미래한국재단의 전신인 현대사회연구소는 지난 1981년 국무총리 소속기관이던 사회정화위원회 산하 정부 출연기관으로 설립됐다.
지난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허화평 이사장을 연구소장에 임명하고, 93억 원의 일해재단(전두환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전두환의 호를 따서 만든 조직으로 현 세종연구소) 자금과 3억 원의 정부 자금을 연구소에 지원했다.
하지만 허화평 이사장이 지난 2005년 연구소를 '재단법인 미래한국재단'으로 개명하면서 사유화 의혹이 제기됐다.
5공 수립 전후 신군부의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충립 전 특수전사령부(특전사) 보안반장(전 5.18진상조사위원회 전문위원)은 허화평 현 미래한국재단 이사장을 '전두환 비자금 횡령·착복 혐의'로 고발했다(8월 30일).
그는 고발장에서 "허화평이 전두환이 조성한 비자금 93억 원과 노태우 정부 지원금 3억 원 등 96억 원을 지원받은 후 600~700억 원으로 추정되는 재단의 자산을 개인 사유재산으로 착복한 죄가 있다"라며
"허화평의 범죄 행위를 철저히 조사하고, 이 재단의 자산을 국고로 환수하기 바란다"라고 촉구했다.
김충립 전 반장은 지난 9월 5일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전두환도 추징금을 다 못 내고 있는데 허화평의 재산 600~700억 원을 추징금으로 환수하면 되지 않겠나?"라며
"국회가 새로운 법을 제정해서 허화평뿐만 아니라 정호용·장세동·허삼수· 고명승 등 전두환 비자금을 받았거나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부당하게 축재한 사람들의 재산을 환수 조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관련기사 : "600억 허화평 재산, 전두환 미납 추징금으로 환수해야" https://omn.kr/2a4ak).
장경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2일 "헌정 질서를 파괴한 범죄자가 얻은 범죄 수익의 경우 당사자가 사망해 공소 제기가 불가능하더라도 국가가 몰수·추징해야 한다"라며
일명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몰수 법안'(범죄수익의 규제 및 처벌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하지만 미래한국재단 측은 "현대사회연구소가 재단의 전신은 맞지만 당시 재산은 다 사라졌고, 지금은 정부 지원이나 출연금을 받지 않고 어렵게 조직을 운영하고 있다"라며
"여러 명의 이사들로 구성된 기관으로, 자금 착복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반박했다.
한편 김영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공개한 국세청의 공익법인 결산서류에 따르면, 미래한국재단의 총 자산규모는 352억여 원이고, 그 중 약 312억 원이 토지와 건물이었다.
하지만 공익사업 집행비용은 1억 4000만 원으로 총자신 대비 공익사업 수행률은 0.4%에 그쳤다.
김 의원은 "총자산 규모가 높을 뿐만 아니라 자산 중 많은 부분을 부동산 등 투자사업에 활용하고 있고, 공익사업수행률은 1%도 채 되지 않아 공익법인이라 보기 어렵다"라며
"국세청은 공익법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의무사항 미이행시 엄격한 제재를 시행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5공 설계자' 허 화평 이사장은 누구?
육사 17기인 허화평 이사장은 제1군단 작전처 교육장교, 제1공수특전단 게릴라전 교관, 제9보병사단 대대장과 작전참모, 정보사령부 특검단 검열담당관을 거쳐 국군보안사령부(보안사)에 근무하며
10.26(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12.12(신군부 군사쿠데타)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허삼수 보안사령부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령부 대공처장 등과 함께 '보안사 3인방'으로 불렸다.
전두환 대통령이 군사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에는 대통령비서실 보좌관으로 임명돼 '5공의 설계자' 혹은 '전두환 정권 2인자'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그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하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정무제1수석으로 좌천됐다(1981년 12월).
지난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사건이 터졌을 때 전두환 대통령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했다가 전두환 대통령의 눈 밖에 났고, 결국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1982년 12월).
이후 육사 17기 동기이자 '쓰리허'(허화평-허삼수-허문도)의 멤버인 허삼수 전 보안사 인사처장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헤리티지재단의 연구원으로 있다가 노태우 정권이 출범하자 현대사회연구소 소장으로 부임했다(1988년).
두 차례(1992년과 1996년)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12.12 군사반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과 관련해 구속기소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아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사면된 이후 두 차례(2000년과 2004년) 각각 민주국민당과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허 이사장은 지난 2021년 12월 <펜앤마이크>와 한 인터뷰에서
"단순한 민주화 요구를 넘어 민족적 차원의 민중혁명 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 무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이를 저지해야 하는 계엄군은 필연적으로 이들을 무력진압할 수밖에 없었다"라며
"이러한 충돌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이 바로 광주사태의 본질"이라고 '무력진압'을 합리화했다.
<허화평, 굽은 길도 바로간다>, <지도력의 위기>, <이념은 날개가 아니다 : 허화평의 이데올로기 백서>,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하여 : 허화평의 개헌 청원론>,
<경제 민주화를 비판하다 : 임현진, 김종인, 백낙청, 송호근 주장의 허구>, <사상의 빈곤 : 사상이 빈곤하면 역사가 표류한다>, <나의 생각, 나의 답변>, <고독하지만 자유민주주의 사상가 허화평의 사자후>, <한국, 미완의 기적> 등의 책을 썼다.
오마이뉴스 구 영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