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elf-millionaire

청어무역의 그 한자동맹도 결국 보호무역 카르텔에 망했고, 1929년 세계대공황도 결국 자국 중심주의 그 보호무역주의때문에 왔다는 것을 또라이 트럼프는 얼른 깨달았으면 한다...

우리 진보수장 이 재명 대통령은

 

또라이 트럼프가 보이콧한 남아공 G20 정상회의에서 프랑스/독일과 연쇄 정상회담을 가지셨고, 그 전에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그 전에는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서 계속 국익 중심의 실용주의 외교전선을 넓히시고 있는 중입니다...

 

그나저나 또라이 트럼프에겐 주한미국대사 언제 파견할 것인지를 묻고 싶고, 집권여당은 언제 전세계 외교공관에 대사/영사 파견을 마무리지을 것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극우 꼴통들과 국가전복세력에 대한 발본색원이 중심이지만 더이상의 공석은 없었으면 합니다...

 

행정/외교가에 상모질이 윤씨 지지의 극우 꼴통들과 국가전복세력이 여전한지라 일단 집권여당의 속아내기를 지켜봐야할 것 같기는한데 말입니다...

 

내년도 전국지방선거전에 대대적인 사정이 필요하다고 주장은 해왔습니다만, 쉽지는 않고요...

 

현재 온갖 투서들이 난무하고 정치계쪽이 시끄럽기는한데, 토착왜구들과 극우 꼴통들부터 발본색원해야 이 재명 정부, 아니 민주당 19년 민주독재가 성공할테고요...

 

주요 3대특검, 검찰/사법개혁, 사정은

혁명의 중심이죠...

 

통일교부터 전 광훈/전 한길등 신전씨 두명과 연결되어 있는 천주교/불교말고 기독교계 널리 퍼져있는 '악의 축' 뿌리도 근본적으로 잘라내야 합니다...

 

대한민국 정치/경제, 사회/문화 발전을

막는 악의 축들입니다...

 

 

카톨릭(기독교?)에서는 말입니다...

 

중세때 정말로 빨간 육고기 먹는 것을 금지를 했었습니다... 푸른 생선을 권했고요... 모든 적그리스도들이 이 육고기를 먹어대면서 육욕의 욕심이 생긴다고 봤거든요^^

 

지금 한국은 이 "빨간"을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의 "파란색"이 19년내내 아니 대한민국의 미래 청신호를 보여줄 겁니다... 전국민들은 현재 이 재명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이것을 해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간 60년간 진행된 육욕의 "빨갱이"들을 전부 속아내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래야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고 미래의 희망이 보일꺼 같거든요... 저는 1961년 박통의 혁명이 필요하다고 했고요...

 

누가 "빨갱이"죠^^ 주요 국짐 모지리들입니다...

 

 

“아담, 이걸 먹어봐. ” 플랑드르 화가 피터 폴 루벤스가 에덴 정원을 묘사한 그림.

 

 

16세기 독일 화가 게오르그 플레겔이 그린 정물화. 청어와 과일이 놓여있다.

 

 

“기독교인은 탐욕을 절제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포드 메독스 브라운의 1852년(추정) 작품 ‘베드로의 발을 씻는 예수’.

 

 

“회덮밥으로 좋은, 대구탕으로도 좋은 생선 사세요~” 중세 플랑드르 화가 요아힘 베케라르의 어시장.

 

 

“우리 생선은 노량진보다 맛있다네.” 한자동맹 대표도시 뤼베크의 대표적 상징물 홀스텐토르.

 

 

“신안 천일염 보다 맛있는 소금 사세요.” 소금도시 뤼네부르크의 풍경.

 

 

“우리 영업비밀을 훔쳐보지 마시오.” 독일 한자 상인 게오르그 기제. 영국 대표 화가 한스 홀바인이 그린 그림.

 

 

“그 네덜란드라는 놈들이 사시미 좀 친다는데...” 독일 도시 뤼베크와 함부르크의 동맹을 묘사한 15세기 그림.

 

 

“자 청어에 청하 한잔합시다.” 네덜란드 청어 함선.

 

 

“청어 사세요, 네덜란드에서 온 청어 사세요.”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요하임 베케라르가 묘사한 어시장 풍경.

 

 

1656년 암스테르담 광장.

 

 

네덜란드 국민화가이자 세계적 화가인 반 고흐가 그린 훈제한 청어.

 

 

영국의 염장 훈제 청어인 블로터(Bloater).

 

 

자신이 발명한 칼과 청어를 든 빌럼 뵈컬손

 

알프레드 스태너드(Alfred Stannard)의 1841년 작품, <노퍽의 야머스 부두(Yarmouth Jetty, Norfolk)>. 해안에서 출항 준비를 하는 소형 어선의 모습을 담았다. 스태너드는 노퍽 지역의 향토 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주로 어민들과 바다를 그렸다. 본 작품은 오늘날 노퍽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네덜란드 청어 어업의 핵심이던 청어잡이 원양어선 하링부이스(Haringbuis). 오른쪽의 작은 선박은 소형 어선인 도거(Dogger)다.

 

 

당시 야머스 부둣가. 빽빽하게 몰려든 어선들 전부가 청어잡이 어선이다.

 

그 어머니가 창녀(?)였던 윈스턴 처칠.?? 수많은 영국의 총리중에서 난 "나폴레옹 전쟁" 워털루 승리의 재정적 기반을 다졌던 '윌리엄 피트'를 가장 위대한 총리로 생각한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4740

 

현재 이 재명 대통령은 박 정희 전대통령에 버금가는 업적을 세워가고 있는 중이다...

 

문제는 김 민석 국무총리, 정 청래 더불어민주당 대표, 김 병기 원내대표, 구 윤철 경제부총리등 4인방이 내치에서 강력한 현 대통령을 받처줄 수 있는 정치(경제)적 역량이 있는지가 문제다...

 

내란특검 마무리후 지방선거 승리와 현대통령부터 연임이 가능한 헌법 개정부터 추진한다...

 

또라이 트럼프도 3연임을 하겠다고 지랄발광중인데 자주국방관이 뚜렸한 이 재명 현대통령이 못할 이유도 없고 우리도 연임체계로 가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집권여당이나 야당이나 재야인사쪽에서 현 이 재명 대통령에 버금가는 영도력을 보여주는 인물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난 분명히 이야기했다...

 

1980년 내란으로 시작해 2024년 내란으로 끝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체제는 실패했으며 다시한번 19년간 민주독재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국가, 국민, 민생만 생각하는 지도자 말이다...

 

현 자라나는 세대들의 민주주의 교양 능력을 더욱 배양하고 설득과 토론, 합의와 협상의 새로운 교육제도도 필요하다... 이런 1020세대들이 4050세대가 될때까지 민주독재한다...

 

기성 정치인들이 다 죽을때까지 현 이 재명 체계를 난 원한다... 6070 세대들과 기성 정치인들이 다 고려장되고 죽을때까지 난 19년 민주독재를 원한다... 이게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길이다...

 

 

집권여당관계자 정 청래, 김 병기... 국무위원 김 민석, 구 윤철... 심지어 이 재명 대통령까지 필독했으면 하는 글이다... 본인들이 루이14세나 그 하수인들이 아니라고요??

https://samsongeko1.tistory.com/14581

 

현재 대한민국은 프랑스를

 

부국강병의 절대적 왕정체계의 부국으로 만들었던 명재상 콜베르나 삼국시대 촉한을 취하고 나라의 틀을 만들어 조조의 위나라와 손권의 오나라와 자웅을 겨루었던 제갈공명이 필요하다...

 

하부 인프라스트럭처가 취약한 현재의 사변같은 뻥튀기 국정과제 123개가 아니고 말이다... 현재 필요한 것은 거의 불가능한 성장이 아니고 회복을 위한 강력한 조세개혁부터라고 했다아...

 

뭘 제대로 알고 거시경제정책을 추진했으면 좋겠다...

 

이 진보정권 5년동안 콜베르처럼 귀족을 규제하고 대개혁을 추진하지 않는다면 우린 프랑스처럼 국가부채위기와 빈민및 없는 자들의 프랑스 대혁명같은 파국을 맞는다...

 

민주독재 19년을 진정으로 원하고 민중의 삶과 민생고를 해결하는 기본적 복지 국가 완성만이 현재의 글로벌 관세전쟁 파고와 최악의 내수 경기 동향을 극복하는 절대적 정책이다...

 

이 완벽한 회복없이는 성장은 없다...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을 해소하는 소득재분배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일련의 정책없이 허약한 국가구조하에서의 성장이라는 것은 허울좋은 사변이라는 생각뿐이다...

 

월가의 금리인하에 기댄 지수상의 상승...

좋다... 자산효과...

 

하지만 여전히 하위 40%는 이 수혜를 누리지 못하고 있고, 전국민 60%는 공매도가 뭔지도 모른다... 내 주변에 말이다... 주식으로 중산층이 됐다거나 이걸로 부자됐다는 사람보다는

 

이건 있는 자들의 놀이터라는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아니 서민들이 아니 민중들이 더 많다... 난 중도 보수를 지향하는 진보정권의 허울좋은 사변보다는 기본적 복지 국가 건설에 더 관심이 많다...

 

아니 당장 필요한건 이번주에 지급되는

 

"민생회복지원금"의 연말연시 3차 준비와 내년도 지방선거 전후의 4차 계획이다... 내 이야기했다... 허울좋은 사변으로 국민들 기만하지말고 기업구조조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성장을 위한 회복 발판을 쌓은데 매진한다...

 

하여튼 영민한 왕을 만났는데, 회복을 위한 세수확보를 할 명재상들이 안보이네... 무슨 자금으로 123대 국정과제를 시행하겠다는건지 기본적 복지국가 건설은 요원하고요...

 

대미투자 480조...?? 기가 차다...

 

우리경제도 죽을판인데, 그곳의 고용, 소득, 소비를 위한 480조원 투자... 정말이다... 양키 코쟁이들 아가리에 들어갈 돈... 차라리 전국민들에게 나눠준다...

 

단 한푼도 투자하지말고

관세 차라리 맞는다...

 

기업들의 별도 대미투자 1500불 투자... 야하.... 돈많아...

 

나라 곳간이 비여 있는데, 여전히 각종 감면/공제/면세로 나라 돈이나 뜯어가는 재벌 대기업들 골드칼라 노조원들 살리려고 나라 운영하냐... 그들이 알아서 하라고 그래...

 

1500억불은 간섭안한다... 내수도 죽을판인데, 하지 말라고 안할 놈들도 아니고 이거말고 480조원은 40분기 내내 13조원씩 국내 "민생회복지원금"으로 풀어라...

 

난 수출 포기하고 내수를 살려야 한다고 했다...

 

 

[히코노미]“성욕 억누르는데 좋습니다”... 기적 일으킨다는 이 음식, 세계 경제 흐름도 바꿨다...

 

 

“혀의 쾌락이 우리를 낙원에서 추방되게 했다.”

 

기독교에서 인간의 원죄(Original sin)는 입에서 시작됩니다. 신이 금지한 음식인 선악과를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먹어서였습니다.

 

낙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다시 몸을 ‘정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욕구를 일으키는 음식을 자제하고, 정연한 마음으로 신께 다가갈 채비를 갖춥니다.

 

기독교는 ‘뜨거운 음식’인 육류를 금할 것을 권했습니다.

 

고기의 열이 인간의 하체를 달궈 육체를 향한 욕망을 일으킨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4세기 성인 히에로니무스는 말했습니다. “고기를 배가 두둑할 때까지 먹는 행위는 육욕의 온상이다.”

 

인류는 태곳적부터 고기를 먹었습니다. 영양소가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 대로 완전히 고기를 끊을 순 없었습니다. 타협안이 도출됩니다. “최소한 성스러운 날만이라도 고기를 금한다.”

 

해가 갈수록 성스러운 날은 늘어만 갑니다. 기독교가 공인한 성인이 매년 추가됐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축일은 1년의 절반이 넘었습니다.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지방과 단백질을 향한 욕구는 DNA에 내재해 있었기에 이를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생선’이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생선으로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셨습니다.

 

두 마리의 생선과 빵 다섯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 교회의 아버지들은 이야기합니다. “축일엔 고기 대신 생선을 드세요. 생선은 성질이 차갑습니다. 고로 성욕을 억누르기에 좋습니다.”

 

기독교의 숱한 금식일에 사람들이 생선을 먹게 됐다는 의미였습니다. 세계 경제가 물고기 떼에 의해 움직이게 됐다는 의미였습니다.

 

기독교의 부흥...

 

“신께 한발짝 다가서자.”

 

새 천 년에는 언제나 종교적 열망이 재점화되기 마련입니다. 신의 왕국이 열릴 것이란 믿음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신에게서 멀어진 지난날의 과거를 씻어 줄 메시아의 재림에 대한 믿음이 확고히 자리합니다.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십자군 전쟁이 벌어진 때도, 신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교회의 첨탑이 높아진(고딕양식) 시기도 새 천 년이 열린 11세기 직후였습니다.

 

당대 유럽인들은 교회 교리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조만간 열릴 신의 세계에 들어갈 입장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육즙이 흐르는 고기 생각이 절실하지만 생각을 고쳐먹고 비릿한 생선을 입에 넣습니다.

 

종교적인 열망이 절실할수록, 뜨겁게 달아오르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발트해에 면한 도시들. 신선한 생선이 가득한 지역들. 독일의 뤼베크, 노르웨이의 베르겐이었습니다. 청어가 발에 치이도록 많은 도시였지요.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올 즈음, 발트해와 북해 앞바다는 부옇습니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청어 수컷이 정액을 뿌려댔기 때문입니다. 암컷은 엄청나게 많은 알을 산란합니다.

 

알들이 성체가 되면 이곳은 그야말로 물 반 물고기 반입니다. 전 유럽이 ‘신의 음식’ 물고기를 간절히 원하니, 도시의 상인들과 어부들은 웃음이 날 수밖에요.

 

보관의 혁신, 한자 동맹을 만들다...

 

북해와 발트해 도시 어부들은 엄청나게 많은 청어를 낚았습니다. 그러나 절반은 버려야만 했습니다. 청어가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수출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요.

 

엄청난 수요의 증가는 혁신의 마중물이 되기 마련입니다.

 

청어를 더 먼 곳으로 운반하는 방법을 궁리하던 상인들이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합니다. 청어를 소금에 절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염장한 생선이 쉽게 상하지 않았다는 걸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독일 뤼베크에서 등장한 혁신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이제 한 도시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시나브로 다른 도시 하나하나 건너가기 시작합니다. 새 도시의 상인들과 계약하고, 연대하면서, 서로에게 이익이 되자고 다짐합니다.

 

발트해에서 북해의 도시들까지 서로서로 연결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각각의 상인들은 해로와 육로에서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고 외부 세력을 배척하는 동맹을 형성합니다. ‘한자동맹’이었습니다.

 

최전성기에는 가맹도시가 200개에 달할 정도로 아주 강력한 상업 세력이었지요(한자는 독일어로 단체를 뜻하는데, 오늘날에는 독일 대표 항공사 ‘루프트한자’에도 녹아있습니다).

 

지중해가 틀어쥐고 있던 유럽 무역의 중심이 발트해와 북해로 흘러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한자동맹 바다를 장악하다...

 

한자동맹에 속한 무역선들은 청어를 가득 싣고 유럽 전역을 누빕니다. 유럽에서 이름난 도시 대부분에는 한자 동맹의 무역기지 상관이 세워집니다. 뤼베크는 당대 무역의 핵심으로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청어가 만든 도시나 다름없었지요. 인근 소금 도시 뤼네부르크도 부유함이 절정에 달합니다.

 

소금이 염장에 꼭 필요한 재료였기 때문입니다. 1205년 연간 6500톤의 소금을 생산하던 뤼네부르크. 100년 만에 생산량이 3배가량 늘어납니다. 그만큼 청어 무역이 폭발했다는 의미입니다.

 

한자 동맹은 유럽이 무역으로 통합된 최초의 사례입니다. 한 국가가 아니어도, 같은 민족이 아니어도 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었지요. 오늘날 지역별 FTA(자유무역협정)의 초기 모습인 셈이었습니다.

 

공동체가 지켜야 하는 정관도, 상비군도 없었지만 그 체제는 500년이나 유지됩니다. 영국 런던부터 러시아의 노브고로드까지. 한자 상인들의 독무대였습니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 그 사이...

 

우정의 상업적 동맹과 배타적 카르텔은 한끗 차이입니다.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무역의 부흥을 열망하며 일어났지만, 점점 다른 상인들의 권리를 배척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자동맹에 속하지 않은 상인들에게 고관세를 물리거나, 아예 무역을 금지하는 등 극단적인 정책도 실행합니다. 자유무역으로 시작해 보호무역으로 끝나고 있었던 셈이었지요.

 

한자동맹의 모습은 전기와 후기가 각각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청어의 싱싱한 비린 내음이 부패한 썩은 내로 변하고 있던 것이었지요. 카르텔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넘치는 창의로 무장한 도전자들의 파괴적 도전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한자 동맹에 속하지 못한 도시가 그들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밉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상인들과 어부들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누구입니까. 해수면보다 낮은 지면에서 나라를 일군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재주와 계산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청어가 모이는 곳을 계산해 ‘황금어장’을 찾아냅니다.

 

청어로 넘쳐나는 잉글랜드 앞바다는 네덜란드 상인들의 놀이터였습니다. 16세기 잉글랜드 역사학자 윌리엄 캠던은

 

저서 ‘브리타니아’에 썼습니다. “네덜란드 놈들이 살이 실하게 오른 청어를 우리 앞바다에서 몽땅 잡아들이고 있다. 이들이 얻는 이익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듣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혁신이 부른 대역전극...

 

잡는 기술만 뛰어났던 게 아닙니다. 염장에 있어서도 한자동맹을 앞섰습니다. 거대한 갑판에 엄청나게 많은 청어를 걷어 올리면, 일련의 작업자들이 전면에 나섭니다.

 

길어 올린 물고기는 그 어떤 요리사보다 신선하게 염장을 쳤습니다. ‘빙겔루이빙’이라는 청어 절임 기술이었습니다.

 

앞 바다에서 잡아 항구로 가져온 뒤에서야 작업을 하는 한자동맹의 청어와는 급이 달랐습니다.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네덜란드발(發) 혁신이었습니다.

 

유럽의 미각을 네덜란드 청어가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많은 도시가 한자동맹 대신 네덜란드 상인들이 가지고 온 청어를 찾습니다. 프랑스, 영국, 플랑드르 항구에 한자동맹 깃발을 단 배보다 네덜란드의 상선들이 더 많이 집결합니다.

 

더 많은 무역, 더 많은 국부가 암스테르담으로 모이고 있다는 의미였지요.15세기부터는 국가적으로 청어 어업을 육성하기 시작합니다. 1560년 1000여척이던 청어잡이 배는 1620년 2000여척으로 늘어납니다.

 

모두 100톤이 넘는 대형 선박이었습니다. 네덜란드는 더 이상 유럽의 소국이 아니었습니다. 식민 모국이자 대제국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성취했을 정도였습니다(히코노미 2화 참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대 위에 세워진 도시라고 부르는 이유였습니다.

 

한자동맹이 남긴 유산...

 

“외국 선박의 무역을 금한다.”

 

한자동맹은 여명에 저물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밀린 데다가 유럽의 정치체제가 도시국가에서 국민국가로 전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은 1651년 바다에서의 주권을 잡기 위해 외국 선박의 무역을 금하는 ‘내비게이션 액트’(항해조례)를 도입하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도 프로이센 등에서 군주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상인이 주인인 도시국가의 시대는 끝자락에 섰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후로 무역의 거점이 대서양으로 옮겨간 것 역시 한자동맹에 치명적이었습니다. 1669년 한자동맹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아무도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마지막인 걸 알았습니다. 한자동맹의 종식이었습니다. 모든 주체는 역사에 그 흔적을 남깁니다. 한자동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무역 장벽을 낮추고자 했던 도시국가들의 혁신적 시도는 다자간 무역체제의 비료가 되었습니다. 막강한 경제력으로 도시 주권자에게 당당히 권리를 요구한 상인들의 정신은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네덜란드는 한자동맹의 강력한 경쟁자면서 강력한 추종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성공방정식을 그대로 진화시켜 도입했기 때문입니다. 네덜란드는 강력한 청어 무역을 기반으로 금융시스템을 발전시켰습니다.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을 만든 것도 네덜란드였습니다. 현대 자본주의의 근간에 청어의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는 셈입니다. 성욕 억제로 사용되던 생선이 부른 나비효과였습니다.

 

<네줄요약>

 

ㅇ11세기 새천년의 도래로 기독교가 다시 교리를 강조하면서 성욕을 부르는 육식을 금하고 생선을 먹을 것을 권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ㅇ이를 기반으로 북해와 발트해에 청어를 잡는 무역도시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도시의 무역 연합인 한자동맹으로 연결됐다.

 

ㅇ무역의 촉진을 위한 한자동맹이 이후 카르텔로 변질하면서 네덜란드가 청어 가공의 혁신으로 강력한 경쟁자로 떠올랐다.

 

ㅇ네덜란드는 이 청어 무역을 바탕으로 금융업을 발전시키며 현대 자본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 자본주의에 청어의 비린내가 서려 있는 셈이다.

 

<참고문헌>

 

ㅇ김영술, 발트해 지역의 글로컬라이제이션에 관한 연구: 한자동맹을 중심으로, EU연구 제30호, 2011년

 

ㅇ오치 도시유키, 세계사를 바꾼 37가지 물고기 이야기, 사람과나무사이, 2020년

 

매일경제 강 영운 기자

 

 

대서양청어

大西洋靑魚(Atlantic herring)

 

 

1. 개요

 

청어과 청어속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북대서양에 분포하며, 최대길이와 몸무게는 각각 43cm, 680g이다.

 

2. 특징

 

난생이다. 보통 거대한 무리로 다니는데, 약 100만 마리 이상 모이면 무리 전체 길이가 27km가 된다.

매년 초 노르웨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간단히 알아볼까요? 먼저, 플랑크톤 대증식이 발생하여 영양이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청어 떼가 몰려든 후 노르웨이 피오르드 깊숙이 내려가 산란장소를 물색합니다. 이어서 대구, 대서양 대구, 참치, 광어, 고래와 같은 큰 물고기들이 청어사냥에 나섭니다. 심지어 바닷새와 곰들마저 청어와 청어알을 만찬으로 즐기러 모여듭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청어는 대서양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 노르웨이 수산물 위원회의 대서양 청어 생태에 대한 설명.#

출처 입력

태평양청어와 함께 해양 생태계의 중요한 어류다. 매일 상하 수직으로 이동하는데, 낮에는 바닷속 바닥에 있고 밤에는 표층으로 올라와서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원린이 계속 새 것으로 바뀌는 게 특징이다.

 

3. 대서양청어와 인간

 

물 반 청어 반이다 싶은 어마어마한 개체 수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서양의 바닷가에서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 등이 대서양청어를 이용한 대표적인 보존 식품이다.

 

또한 청어 어업이 창출한 거대한 규모의 경제는 한 지역과 국가의 흥망이 청어의 어획량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서양대구와 함께 대서양청어를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라고 부르기도 했다.

 

바이킹들의 식사를 소개하는 영상. 청어포가 나온다.

청어를 잡는 기술, 청어를 연기에 그을려(청어를 팔기 위해서는 훈증을 했다) 제대로 처리한 뒤 상인들과 행상인들에게 넘기기까지 수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중략) 청어는 목수, 배 대목, 낚싯줄, 밧줄, 케이블 제조인, 대마 일꾼, 방적공과 그물-직조공 등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소금집이 세워지고, 소금 위에 소금을 쌓고 (중략) 통 제조업자, 맥주 제조업자, 제빵사들도 청어 때문에 소득을 올렸던 사람들이며, 그 외에도 청어 아가미를 제거하고 난 뒤 씻어 포장하여, 옮기고, 옮긴 것을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 토머스 내쉬의 기록. 데이비드 커비 및 멜루자-리자 힌카넨의 저서 <발트해와 북해> 제8장 '어업'에서 발췌함.

출처 입력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식재료였다. 일명 "바다의 (The Silver of the Sea)". 중세 유럽에서는 금육일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소비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였다.

 

게다가 비타민 D 함량이 많은 음식 중 하나라서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적인 북유럽에서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은 청어가 유럽 식문화에서 감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고까지 설명한다.

 

유럽에서도, 청어 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몰락에 청어 서식지의 변경이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으며,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 어획고가 감소하자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대구와 함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청어는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유럽에서도 청어를 지칭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목록은 아래와 같다.

 

  • 헤링(Herring)
  • 일반적인 청어를 지칭한다.
  • 브리슬링(brisling)
  • 작은 청어를 지칭한다.
  • 스트뢰밍(strömming)
  • 발트 지역 북쪽의 유난히 작은 청어를 지칭한다.
  • 마트예스(maatje)
  • 산란을 마쳐 체내에 알도 정자도 없는 성체 청어를 지칭한다.

 

3-1 북유럽과 한자동맹

 

유럽에서 청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9세기경이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리로 인해 사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육류의 취식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은 반드시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는 곧 종교적 제한에 걸리지 않는 청어와 대구 가공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되었던 곳은 발트해 연안, 그 중에서도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방이었다. 스코네 어시장(덴: Skånemarkedet/스: Skånemarknaden)은 청어 어업의 핵심적인 장소로, 덴마크 정부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

 

초기에는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가 주도하였으나 곧 북해와 발트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도시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청어 가공의 중심지는 독일 북부의 뤼겐 섬.

 

이 지역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일대에서 캐낸 암염을 조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령 스코네보른홀름, 에스토니아 등에서 잡힌 청어는 뤼겐 섬으로 모여 뤼네부르크산 암염으로 염장된 후 한자동맹 상인들을 거쳐 독일 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의 상회들로 이동했고, 여기서 다시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이는 물론 덴마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발트 해의 도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패권국이었던 덴마크는 한자동맹이 자신들의 영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을 좌시하지 않았고, 한자로부터 청어 산업의 주도권을 방어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온갖 규제와 통제가 도입되었고, 한자 상인들은 스코네 어시장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1109년에 아예 뤼겐 섬을 공격해 점령하여 지역의 청어 거래 시스템을 아예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이 결과로 덴마크는 스코네 어시장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주요 자금줄 하나를 지켜냈다. 전 북유럽에서 상인들과 어부들이 스코네로 몰려들어 청어를 거래했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약 3500명에서 5000명에 달하는 이들이 청어 어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일했다. 외레순 해협 일대에서 조업하는 선원들은 2만 5천 가량이었다.

 

하지만 스코네 외에도 발트해 남부의 여타 지역들 역시 청어 거래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했다.

 

독일 북부의 뤼베크로 중심지가 이동한 후 동유럽 슬라브 계통의 가맹도시 출신 상인들은 꾸준히 청어를 실어 뤼베크로 가져왔고, 이를 가공한 한자동맹의 청어 어업은 계속 번창했다.

 

1370년 한자동맹은 아예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슈트랄준트 조약을 맺어 발트 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어업을 할 권한을 덴마크로부터 받아내면서 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자동맹과 발트 해 청어 어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청어의 주 산지인 발트 해에서 한자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자 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내었고, 이는 곧 청어 어업의 무대가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청어 어업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한자동맹이 몰락하는 반면에 이들 국가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며 청어 어업에서 한자의 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때마침 16세기에 청어들이 이동하여 발트 해에서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다.

 

3-2 네덜란드 독점

 

네덜란드가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던 주된 이유는 혁신적인 어업 지원 시스템 덕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통, 어선 규격, 건조 방식 등에 대한 엄격한 품질 관리 조항들을 규정하였다.

 

정부 요원들, 그리고 '대형어업감독협회'의 직원들이 생산과 유통을 일일히 감시했으며 저질의 상품을 납품하는 이들은 처벌받았다.

 

동시에 약 9000 길더의 가격으로 건조할 수 있던 네덜란드 청어 어선인 '하링부이스'는 유망을 사용하고 선체 중앙부 어창에 활어를 보존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했으며 이후 북해 일대 각국의 표준 청어잡이 어선으로 채택된다.

 

다만 하링부이스는 3번의 조업을 나간 후에는 배 전체를 폐기해야 했다. 1년에 3번 조업을 나갔으니 대략 1년마다 한번씩 배를 갈아타야 했던 셈. 이 때문에 네덜란드 업자들은 여럿이 자금을 모아 배를 구매하곤 했다.

 

그 외에도 이러한 주도권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영어로는 윌리엄 버클스(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였다.

 

그는 1380~1386년 시기에 갓 잡은 청어의 이리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 대신 함수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했다.

 

옛날부터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고 비싼 필수품이었고,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은 기후 탓에 바다에서 소금을 만들기 어려웠던 북유럽과 서유럽은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이 때문에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소금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을 수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소금 대신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일부 날려 염도를 높인, 굉장히 짜게 만든 소금물인 함수를 소금 대신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완전히 증발시켜 고체를 만들거나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해야 하는 소금과 달리, 함수는 전자의 과정에서 바닷물이 일부 증발할 만큼만 끓이면 얻을 수 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뵈컬손은 이로 인해 네덜란드 지역에서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며, 독립 전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총독들도 새로 부임할 때마다 그의 동상에 와서 경의를 표할 정도였다.

 

이를 통해 네덜란드는 발전한 자국의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원양어선 하링부이스 선단을 구성하여 북해의 청어를 쓸어담았고, 강대한 네덜란드 해군 함대는 이들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이 방법으로 청어를 기존보다 수십 배나 많이 생산했고, 기존의 노르웨이, 스웨덴, 한자동맹 등 경쟁 세력들을 밀어내고 대성공하였다.

 

당대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했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청어절임은 지금도 여전히 먹고 있는데 그것이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하링(Haring)이다.

 

다만 이후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영국인들이 청어의 주 어장인 영국 연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무너뜨리면서 점차 쇠락했다. 청어 어획고의 감소는 쇠락을 가속화하였다.

 

동시에 새로 등장한 유럽의 보호무역 풍조로 인해

 

잡은 청어의 80%를 수출하던 네덜란드인들은 각국의 높은 관세와 부닥쳐야만 했다. 청어는 유럽 서민들의 주요 식단이었기에 낮은 가격을 유지해야만 했으나 관세가 높아지면서 네덜란드산 청어 수입은 바로 경쟁력을 상실한 것.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주도자들이었던 북유럽 국가들과 새 경쟁자인 영국이 네덜란드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왕실이 출자하고 노르웨이인 요훔 룬드가 관리하던 '덴마크 왕실 청어 회사'는 네덜란드의 시스템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넘어 기존 발트 해 어장을 벗어나 아이슬란드와 오크니 일대까지 규모를 확장했다.

 

그물 역시 무거운 대마 그물을 가벼운 그물로 대체하였으며 이는 어획량이 높은 후릿그물 사용을 가능케 했다. 아이슬란드 일대 선단 역시 네덜란드식 유망 어업과 같은 신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영국 역시 '영국청어어업협의회'를 설립하여 추격에 나섰다. 이 결과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이후 유럽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인들의 청어 어업 기법을 배우고 강대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3-3 영국의 주도권 장악

 

유럽 대서양 청어의 주된 어장은 북해, 그중에서도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연안과 북해 중앙의 거대한 모래톱인 도거 뱅크이다. 이 해역은 수온이 낮고 템스 강라인 강에서 흘러드는 영양 염류가 풍부하며, 수심도 매우 얕아 청어의 중요한 산란지이다.

 

특히 잉글랜드 동남부 노퍽 주의 그레이트야머스(Great Yarmouth), 일명 야머스 시의 앞바다가 가장 경제성 있는 청어 어장이었다. 야머스 앞바다에는 해저에 헤이즈버러 사주(Haisborough Sands) 등의 길다란 모래톱이 곳곳에 분포하여

 

여러 해양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

 

덕분에 중세 이래로 야머스의 어민들은 백사장에서 보트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청어로 만선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썩기 전에 바로 가공된 후, 야머스 시내를 지나는 야레 강(River Yare)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노리치에 도달했다.

 

노리치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2의 도시였고, 그 이후에도 이스트 앵글리아의 중심지였기에 전국의 많은 상인들이 모였다. 야머스산 청어도 여기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부터 야머스의 청어 산업은 확장된 철도망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량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이전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는 야머스였다고 할 정도였다.

 

19세기에는 영국에서 흰살 생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갈수록 뻗어나가는 철도는 내륙으로의 수산물 운송을 용이하게 하면서 어업의 번창에 기여했다. 동시에 동력선과 저인망[10] 도입은 보다 많은 어획고를 올리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전통적인 무동력선 위주의 어업을 하던 영세 어부들이 몰락하고 비싼 동력선을 장비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회사들 위주로 어업 체계가 개편됨을 의미하기도 했다.

 

또한 유럽 내부에서도 철도가 깔리면서 덴마크독일 제국 등지에서 청어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외국 상인들이 영국을 찾기 시작했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스코틀랜드 선단으로,

 

그들은 상업적 어업 회사 외에도 협동조합과 가족노동이 결합된 형태를 띄기도 했다.

 

청어잡이 시즌이 되면 어부들은 동업자들 및 가족들과 함께 유망어선을 타고 청어를 쫓아 영국 동부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건조업자들과 내장제거 업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노포크가 최종 목적지였다.

 

청어잡이 시즌만 되면 수백 대의 스코틀랜드 어선이 야머스와 남쪽 로웨스토프에 몰려들었고, 유망 또는 저인망을 이용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청어를 잡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청어 가공 공장에서 날마다 청어를 가공,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완제품을 납품했다.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 그리고 폴란드에서도 많이 수입해갔지만, 주된 고객은 남유럽 국가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남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앤초비 젓갈 등으로 익숙해서 그런지 청어 절임을 많이 수입했다고 한다. 특기할 만한 이들이 있다면 바로 '피셔 걸(Fisher girl)'이라 불린 이들이다.

 

야머스의 향토사 박물관인 Time and Tide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피셔 걸들은 부둣가에서 어선들이 잡아온 청어의 내장을 손질하던 스코틀랜드인 여성 계절노동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걸(girl)로 불렸다.

 

또는 영상에서처럼 피셔 래시즈(Fisher Lasses)나 스코티시 래시즈(Scottish Lasses), 또는 헤링 래시즈(Herring Lasses)라 불리기도 했다. Lass는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방언으로, 젊은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는데, 두 명이 내장을 제거하면 남은 한 명이 이를 받아 나무 통에 담는 방식이었다. 현지에서는 이를 스카치 큐어(Scotch Cure) 방식이라 하는데, 사실 빌럼 뵈컬손이 개발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위 영상에서 그들의 작업 방식을 잘 볼 수 있다. 작업 시간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였으며, 주로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고된 작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거대했던 그레이트야머스의 청어 어업은 1950년대까지 성업하였으나,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과 1953년의 대홍수로 시내가 파괴되면서 주춤하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바로 청어 어획량의 감소였다.

 

남획과 청어의 서식지 이동으로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1960년의 청어 어획량은 전성기인 1913년의 2~3%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야머스 항의 마지막 유망(Drifter) 어선 역시 1963년에 팔려나갔고, 청어 조업은 1968년 가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한때 야머스 항구를 가득 채웠던 피셔 걸들 역시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동시에 영국 국민들은 흰살생선을 선호하였지 청어는 별로 익숙해 하지 않았으며 이는 국내 판로 개척에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 전후복구기에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이 증가하고 기존에 청어를 소비하던 각국의 노동자 계층마저도 청어를 외면하면서 영국의 청어 어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청어는 시장에 나오는 대신 동물 사료 공장으로 직행하였으며 이는 남획으로 이어지다 결국 1977년 북해 청어 어업 금지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렇게 어업이 쇠퇴한 대신, 석유 시추 산업이 성장했다. 오늘날의 야머스는 소규모 석유 정제 및 물류 기점이자 국내 관광도시로 재개발되었다. 한때 성업했던 청어 어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 뿐이다.

 

시내 인근에 정박해 있는 야머스의 마지막 유망 어선인 YH 89 리디아 에바(Lydia Eva) 호, 그리고 실제 청어 건조장을 개조한 시간과 조류(Time and Tide) 박물관이 바로 그곳.

 

리디아 에바 호는 남쪽 로웨스토프의 마지막 트롤어선인 LT 412 민카를로(Mincarlo) 호와 함께 한데 묶여 '리디아 에바와 민카를로'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종종 항해도 한다.

 

한편 Time and Tide 박물관은 야머스의 어업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역사까지 총망라하는 향토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3-4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으로

 

오늘날 청어 어업의 주도권은 다시 네덜란드북유럽 국가들에게 돌아왔다. 북유럽은 19세기 인구가 폭증하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스웨덴 서부 해안 지대에까지 마을들이 들어섰다. 새로 개척된 지역들은 농업에는 매우 부적합하였다.

 

동시에 철도의 발달로 국제적인 어류 수요가 늘어나면서 스칸디나비아의 농민들은 살기 위해 부업으로 어부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반농반어 문화와 이에 수반된 청어 건조 산업 등이 발트 해 연안을 따라 확산되었다.

 

1870년대에 보후스 지방에 청어들이 되돌아오면서 청어잡이가 활기를 띄기 시작함에 따라 북유럽의 영세 어업도 점차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소형 동력선과 1인 그물이 보급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어업의 개인화가 진전되었다.

 

3-5 2020년대

 

2020년대 시점에는 네덜란드가 전 세계 청어 어획량의 36% 가량을 공급하여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인 노르웨이가 24% 가량을 공급한다. 노르웨이에서는 노르웨이 수산물 위원회가 청어 생산을 철저하게 감독하고 있다.

 

이 두 국가가 청어 생산의 쌍벽이다.

 

3위인 미국은 9%를 차지한다. 그 뒤로 독일, 대한민국,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라트비아가 이어진다. 한때 독보적 1위였던 영국은 고작 1~2%를 생산하여 9위이다.

 

기타 대서양청어에 대한 음식, 민요, 여담이 추가적으로 궁심하신 블로거(Bloger)들은 나무위치백과를 참조하시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