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쪽바리들 개새끼들이 조선시대 예인문화를 근대 창녀로 만들었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제국주의적 미몽아래 한국, 중국, 동남아 각지에 정신대라는 위안소를 설치에 아시아권 주요 여염집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가 성노리개로 착취하더니
광복후 오늘날에는 일본의 발달된 세계적인 성문화의 폐해가 고스란히 동방예의지국 한국에 입국하여 전국을 집성촌과 공창으로 어지럽혔고요... 간신히 그 잡스러운 문화를 없애고 있는 와중에도 이제는 일부 젊은이들이 물들어가지고서리 N번방등
각종 성애문화 발달에 이바지한 작금의 현실도 있고요... 이에 영향을 받은 식자층들이 그 박 원순 전 서울시장부터 국민의짐 장 제원 의원까지 자살자들 원인이 됐고요... 오징어 게임의 그 원로 연극배우 오 영수씨도 결국 징역형인가요...
조선시대 흥선대원군같은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출현을 기다리는 강성 진보주의자이자 강력한 민족주의자인 게코(Gekko)가 이 글로 그 외국문물의 폐해를 지적함으로써 앞으로 출현한 새로원 정권에서 개선책을 마련해 보려고요...
일단 기생부터 시작합니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2개월안에 새로운 정권이 출현할 겁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매국노/주요 친일부역자 후손들인 토착 왜구들의 썩어빠진 정신을 개조하지 않는이상 나라 장래가 근본부터 무너질 걱정이 있기도 하고요...
하여튼 이 글로 시작합니다...
이 난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포함된 기생 사진 엽서.
명월관(明月館) 엽서 사진. 1919년 화재로 전소된 뒤 양옥으로 새로 지어올린 건물이다.
구한말에 찍은 기생 사진
민족대명절 구정을 맞이하여 이건 주요 사극을 보시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올림니다. "고려거란전쟁"에서의 그 '호장', "녹두꽃"에서의 유향소, 좌수, 별감은 이해의 주요한 키워드
https://samsongeko1.tistory.com/13794
아내와 GI IR실장, 이번 구정에는 GI 인터넷(홍보)팀장도 보고 있다기에 아니 이곳 세 곳의 블로거(Bloger)들에게도 앞으로 사극보시는데 이해의 도움을 드리고자 올림니다...
성리학이 한반도 고려에 들어온이후 이 사림들에 의한 유학은 조선조로 이어져왔고 그 유학에서 백성들을 교화하고 지방에 미치지 못했던 중앙정부의 각종 시책을 관아의 수령(사또)들과 협조해 전달하였던 이들의 순기능은 때론 각종 수탈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민초들을 괴롭히는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게 조선후기로 가면서 서구의 침략및 개항이후 일본 쪽바리의 국권 침탈로 이어지면서 때로는 의병을 조직했던 임진란이후 이 유향소의 양반사대부들이 민초들의 깨우치는데 일조한 면도 있습니다... 구한말 이 나라를 잃어버린 한반도에서 의병과 독립군, 광복군에도 일반 백성과 함께 싸운 양반/선비 출신의 진사들과 유향소 출신의 좌수/별감들도 많습니다...
한반도 500년이상 역사에서 이 세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극보기는 수박 겉핧기죠...
연말연시에는 영화 "전란"을 중심으로 SBS 대하드라마 "녹두꽃"을 다시 볼 예정이고, 26일 넷플릭스에 올라올 "오징어게임2"를 전편과 같이 볼 예정입니다... 정 여립이라..
https://samsongeko1.tistory.com/13700
대동사상을 개척하고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던 정 여립, 조선조 당쟁의 역사를 끝내려고 노력했던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영조대왕과 실학사상을 전파하려했던 영조의 손자 정조(사도세자의 아들), 수많은 조선후기 다산 정 약용을 중심으로한 실학자들, 동학을 창시한 최 제우/최 시형과는 달리 동학을 현실세계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투쟁가 전 봉준... 동학 농민들의 반외세및 항일투쟁을 이어 국권을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항거한 안 중근, 윤 봉길, 홍 범도, 청산리대첩의 영웅 김 좌진, 김 원봉을 중심으로한 수많은 독립투사들과 신 규식선생, 이 동녕선생, 이 시영선생등 주요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 독재자 이 승만에게 살해당한 민족주의자 백범 김 구 선생과, 진정한 진보주의자 죽산 조 봉암 선생... 이들을 계승한 고 김 대중 전대통령과 고 노 무현 전대통령... 진정한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없는 한국의 정치 상황... 여전히 국민/서민/민중/민초들을 겁박하고 억압하려는 기운이 느껴지는 2024년 한국의 검찰과 군대,경찰조직내에 "서울의 봄" 잔당의 반민주화 세력들이 또아리를 트고 있다는 생각에 아니 환율이 1500원을 넘어갈수도 있는 금융위기 상황이고만, 정치가 경제를 도와주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 역시 상모질이 윤씨 대단하네... 대가리가 크다고... 그 +10%의 지지율에서도 말이다... 이 양반을 찍은 2찍들은 거의 다 돌아섰는데도 영남당, "국민의짐"의 극우 꼴통들을 믿고 이제는 헌법재판소도 갖고 놀라고 그러네... 난 이 주말에 이 글로 갈음한다...
간만에 호외라... 전 어제부터 보고 있는 "고려거란전쟁" 서재에서 계속 보고 있으며, 오늘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는 거실에서 또 다른 5.18관련 영화 "택시운전사" 보데요.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76
각자 일들이 있어 전 주요 블로그(Blog) 관리중이고요^^
아내는 10시에 애들 재우고 재단관련 일로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있는 중^^ 저녁 먹으면서 내일 애들과 "소방관" 보러가자고 합의 봤습니다... 상모질이도 내려왔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내년 초등학생 되는 큰 놈과 작은 놈도 영화 좋아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놈은 모르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알테니 이제 헌법재판소에 맡기고 잠니다.
이제 '차기 대통령이 누구냐...?'네요...
어제 퇴근해 아내가 준 저녁밥상을 먹고 후식 디저트 먹고 있는데, 그러네요.. "여보, '퍼스트레이디' 보여주면 안되요.." 저 왈, "임자, 갈보로 의심되는 여자 보고 싶냐고"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71
암튼 전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
주인공들보다는 주요 조연들에 주목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살인마 전 두환이의 그 영부인 이 순자씨도 나옴니다... 영욕의 세월을 사는 이 여자도 아직 살아 있고요... 제 아버지가 38년생으로 향년 73세로 돌아가신게 2010년인데, 만주 출신인 1939년생인 이 순자씨도 살아 있네요... 현재 87세라는 이야기네요... 5공 당시 그 친인척 비리의 대표적 사건이였던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도 누가 영화화 좀 해줬으면 좋겠네요... 이 순자씨의 작은 아버지 이 규광(그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씨가 역대급 사기꾼 장 영자씨의 형부였고, 수사 과정에서 장 영자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라’며 으름장을 놓았고요...
전 영화 "살인의 추억"도 아니고 이 뭣같은 되돌이표 대한민국 상황이 너무나 곤혹스럽습니다... 하여튼 상모질이 대통령과 국격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범죄자 퍼스트레이디가 있는 한반도 상황이 말입니다... 두 양반다 징역이 더 어울리는 한쌍이네요...
오늘 끝냅시다...
12살 소녀는 최고의 기생 됐다… 전설의 미녀, 이 난향...
이 난향(1901~79)은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의 기생으로 손꼽혔습니다. 평양 출신인 난향은 열셋에 서울에 와 스물다섯에 조선권번의 취체 자리에 오릅니다.
명기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기생조합 조선권번, 요즘으로 치면 하이브나 YG에서 일종의 교장 역할을 맡은 겁니다.
70대에 접어든 이난향은 1970년 12월 25일부터 이듬해 1월 21일까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명월관’을 연재합니다. 기생이 남긴 기생의 역사라는 흔치 않은 기록이었습니다.
오늘의 '추천!더중플'은 55년 전의 원고를 디지털 버전으로 다듬은 이난향의 '명월관'(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64)입니다.
조선왕조·대한제국의 몰락으로 궁중 나인과 관기가 내몰리면서 급격히 변화한 저잣거리의 풍속사, 독립투사부터 친일파까지 명월관을 드나들던 유력 인사들이 뒤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제1화. 기생이 되자, 아버지는 일평생 외면했다
안개가 자욱이 낀 1913년 여름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삼촌과 함께 어머니의 전송을 받으며 평양역에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어머님 말씀은 임금님 앞에서 춤과 노래를 보여드리는 진연(進宴)이 곧 열리며 이 진연에 내가 뽑혀 꼭 참석해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진연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다만 처음 타 보는 기차와 차창에 비치는 낯선 고을에 눈이 서려 신기하고 즐겁기만 했을 뿐, 내가 지금 가는 길이 무한한 고비를 앞에 놓고 있다는 것은 과연 짐작도 못 했다.
그때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다. 나는 그때 이미 평양 기적(妓籍·기생등록대장)에 올라 난향이란 기명을 갖고 있었다.
나는 평양에서 1남3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는 아버님이 좌수(座首·지방자치기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집안 살림이 넉넉했으나 아버님께서 물산 객주업을 하시다 실패함으로써 집안이 기울었고,
오빠와 언니들이 모두 결혼한 다음 어머님께서는 나를 의지해 살기 위해 열두 살인 나를 기생양성소라고 볼 수 있는 평양의 이름난 노래 서재에 보냈다. 이것이 내가 기생으로서 첫발을 디디게 된 동기였다.
이때 평양에서는 여염집에서 딸을 기생으로 만드는 것이 그렇게 큰 허물이 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일이 아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내가 노래 서재에 다니기 시작한 지 13일이 지났을 때였다.
동네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내가 노래 서재에 나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아버지와 오빠는 크게 노하시어 나를 불러다 꿇어 앉히고 야단이셨다.
그러나 이미 13일 동안이나마 기적(妓籍·기생등록대장)에 올라진 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문에 발을 드리운 채 일평생 나를 면대해 주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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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살 소녀는 기생이 되었다… 전설의 이난향, 그가 겪은 시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4651
제2화. 나라 잃은 ‘마지막 군주’의 서글픈 진연(進宴)
진연은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 중 하나다. 임금이 직접 나오는 엄숙한 잔치이기도 하지만 나라의 경사를 축하하는 잔치인 만큼 기생들이 빠질 리 없다.
진연이 있을 때에는 몇 개월 전부터 뛰어나거나 재질이 특출한 기생을 서울로 뽑아 올렸다. 정악원에서는 이들 기생들을 만에 하나 어전에서 실수가 없도록 하기 위해 맹연습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연에 뽑힌다는 것은 기생으로서는 더없는 영광이다. 진연에 참가했다가 대감들의 눈에 들어 대감이 떼들이면 금방 마나님으로 불렸다. 양반이 기생을 사랑해 맞아들이는 것을 ‘떼들인다’고 했다.
▶눈맞은 대감님들과 맞담배질… 그들은 ‘기생 재상’이라 불렸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6337
제3화. 맑은 바람과 밝은 달, 조선 요릿집 명월관
융희 3년(1909년)에 관기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발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됐다.
▶“땅 팔아서라도 취하고 싶다” 최고의 기생 몰려든 명월관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7989
제4화. 의친왕부터 이 완용까지, 명월관에 드나든 거물
초기의 명월관 손님들은 조정의 높은 벼슬을 지녔거나 현직 벼슬을 갖고 있는 사람 등 대감이라 불러야 하는 신분이 높은 분들이었다. 제일 높은 신분이었던 어른은 의친왕 이강공.
평양감사를 지냈고 후에 이왕직장관을 지낸 민병석, 순정효왕후 윤씨의 아버지이신 윤택영 부원군, 철종의 사위이며 개화파의 기수였던 박영효, 민충정공의 아우 되신 민영찬 대감,
조 대비의 조카 되는 조남승, 참판을 지낸 구용산, 친일파 거두 이완용·송병준·이지용, 이름 높은 화가 김용진 등 당대의 거물급은 거의 모두 드나들었다.
▶“한복 대감들 당구 200 쳤다” 명월관 기생 빵터진 그 장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09683
제5화. 의친왕의 항일
의친왕이 명월관에 나타나시면 종로경찰서 고등계 주임 미와(三輪) 경부가 사복 차림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면서 옆방에서 감시하고 있었다.
의친왕께서는 겉으로는 주색을 가까이하는 것 같았지만, 항상 친일파와 왜놈들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있었고 일인(日人)들도 이 점을 특히 경계했던 모양이다.
▶육혈포 품고 다녔던 의친왕, 日 경찰 앞 ‘대한남아’ 불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0582
⑥ “개돼지” 친일파에 침 뱉었다 … 기생들 놀라게 한 ‘상해마마’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2113
⑦ 더벅머리 창부 낀 술판에 분노 … 기생도 1·2·3패 ‘급’이 달랐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3749
⑧ 남다른 특기, 판사가 가르쳤다 … 양반댁 시집간 기생의 기술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315373
더중앙플러스 이난향의 '명월관'의 새로운 에피소드는 매주 금요일 발행됩니다.
기생
(妓生)
관기, 창기
제정 목적
기생은 국가에 대한 공적(公的) 의무를 져야 했던 특수 계층의 여성으로 조선시대에 국가 의례나 궁중의 연회에서 여악(女樂)을 담당했던 전문 예술인을 말한다.
이들은 궁중과 지방의 연회에 참석하여 쾌락과 유흥을 담당하였다.
또한 다모(茶母)의 역할이나, 관리들을 응대하고 성적 봉사를 해야 하는 수청기(守廳妓)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부여받았다. 이외에도 관아에서 바느질, 의료 보조 등의 여러 가지 일까지 담당하였다.
전근대 사회에서의 기생
조선시대 기생은 대부분 모계로부터 세습되었으며 관노비의 신분이었다. 반역자의 부녀자라서 기생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8도의 감영, 각 도의 군‧현 등 특정 관아에서 최하급의 관속(官屬)으로 관노비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작성된 ‘관노비안(官奴婢案)’에 등록되어 관리되었다.
흔히 기생 명부로 알려져 있는 기적(妓籍)은 관노비안의 기생 부분을 가리키는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한양에도 관기(官妓)가 있었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한양의 기생을 폐지하고 필요할 경우 지방 관아에서 차출하였으며 이들을 경기(京妓)라 불렀다.
차출된 기생을 관리하는 기관은 장악원(掌樂院)이었다. 경기는 임무가 끝나면 지방의 소속 관아로 돌아갔다.
기생은 관노비이므로 지방 관아 산하의 관노청에 소속되었으며, 그 아래 교방청 혹은 기생청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합쳐 교방이라고도 한다. 교방은 기생 교육을 담당한 곳으로 지방 관청 각 부서의 관리를 받았다.
일상적 업무나 여악은 호방(戶房)이 담당하였고, 급여나 수당 등은 예방(禮房)에서 관리하였다. 이들은 사적으로 기방을 통하여 경제 활동을 하였다.
기생의 공식적인 역할에는 남성에 대한 성 접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이들의 활동 전반에는 섹슈얼리티가 매개되어 있었다. 성 접대가 공식 업무는 아니었다고 해도,
기생의 업무에는 남성에 대한 성적 접대가 관행적으로 개입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신분제의 변화가 생겼고, 1897년부터 지방 관기가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근대 이후의 기생
근대 사회에 들어서 기생은 관노비라는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났지만 「기생단속령」과 「예기작부예기치옥취체규칙(藝妓酌婦藝妓置屋營業取締規則)」(1916년, 경무총감부령 제3호)에 의하여 국가의 관리를 받았다.
1908년 「기생단속령」이 제정되면서 관기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단속령 공포로 인하여 관기의 관할 관청이 장악원에서 경무청으로 바뀌었다. 이는 기생이 예술가가 아닌 단속 대상자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기생단속령」에 의하면 기생들은 기생 조합에 가입하여 영업 허가를 받고 활동할 수 있었다. 기생 조합은 1914년 이후 일본식의 명칭인 권번(券番)으로 바뀌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 폐지될 때까지 존재하였다.
기생들은 또한 「예기작부예기치옥취체규칙」에 의하여 규제를 받았다. ‘예기’란 조선의 ‘기생’과 일본의 ‘예기’를 통칭한 범주로 요릿집에서 춤과 노래로 손님의 흥을 돋우는 이들을 말한다.
이 법령에는 기생의 성매매를 우회적으로 금지하고 성병 검진을 강제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기생을 사실상 성매매 여성으로 인식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성병 검진은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총독부가 도입한 ‘공창제’는 허가를 받은 업자와 성매매가 허용된 여성에 한정하여 성매매를 합법화하고, 성매매 여성을 등록하여 정기적으로 성병을 검진하도록 하였다.
기생의 경우 성매매는 금지되었지만 기생 조합에 소속되어 정기적인 검진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즉 기생은 등록과 검진을 중심으로 한 성 관리 제도에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개화기 이래 기생은 사치와 유흥의 상징으로, 선량한 사회의 풍속에 해악을 끼치는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 사회에서 기생들은 노비의 역할에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기생 노릇을 계속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기생 조합과 권번은 일종의 기생 양성소를 두어 전통 여악뿐 아니라 서양의 사교춤, 일본의 민요 등을 가르쳤으며 요리점의 요청이 있을 때 기생을 보내 중간 이익을 얻었다.
전통 여악은 이러한 형식을 통하여 상업화, 민간화 되었다.
기생들은 기생 조합과 권번을 통해 공연하면서 대중 예술인으로 사회에 진출하였으며, 실제로 일제시기 대중 예술계에는 기생 출신의 영화배우, 가수들이 많았다.
또 한시(漢詩)를 창작하며 시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기생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기생들은 혐오의 대상에서 벗어나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기 위해 다양한 사회 운동을 벌였다. 특히 3·1운동 때 기생들은 경기도 수원이나 안성, 황해도 해주, 경상남도 진주나 통영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원 예기 조합의 김향화, 황해도 해주의 기생 김월희, 문월선, 이벽도, 문향희, 해중월, 경남 통용 기생단의 정막래, 이소선 등이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문자 교육을 받고 경제적으로 능력을 갖추었으며, 춤과 노래라는 재능을 겸비한 기생들은 사회 운동이나 민족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들은 고아원, 학교 설립 기금 마련을 위하여
사회단체들이 개최한 행사에 참여하여 예술 공연으로 기여하고, 각종 사회사업에 기부금도 냈다.
그 외에도 수해 · 기근으로 이재민이 된 동포를 돕는 행사나, ‘재만 동포’ 구제 사업에 예술 공연을 하는 등 사회적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정칠성과 같은 기생 출신의 독립운동가도 있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기생은 외화 획득에 주요한 목적을 둔 관광 산업에서 ‘기생 관광’ 또는 ‘관광 기생’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였다.
다음(Daum) 백과사전
1, 기생
기생(妓生)은 관기, 민기, 약방기생(원래는 의녀), 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이다. 일패, 이패, 삼패 기생을 모두 통틀을 때는 '덥추'라고도 불렸다. 영어로 번역하자면 courtesan에 대응한다.
단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코르티잔은 왕족, 귀족들을 상대하거나 후원을 받는 대가로 성과 유흥(춤, 교양)을 제공하는 고급 매춘부이자 이들의 정부(情婦)에 속했기에 공식적으로 매춘부가 아닌 기생하고는 대응되지 않았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비슷하다고만 서술되어 있다.
현대에 받아들여지는 '기생'의 어감 때문에 조금 더 점잖게 느껴지는 '기녀'로 표기를 대체하는 경우도 많으나 오히려 기생은 기녀 중에서도 상층부 기녀에 속해 기생을 굳이 기녀라고 확장해 표현하면 의도와 달리 폄훼가 될 수도 있다.
2. 오해와 실상
현대인들에게는 단순히 매춘부처럼 인식되는 것과 달리 실제로는 상당히 광범위한 개념이었다.
일단 사회적 지위는 코르티잔, 일본의 유녀 계급과 다를 바 없다. 기생의 최하위 계급은 현대의 매춘부이며 중간 계급은 쩜오, 최상위 계급은 연예인과 비슷한 일을 했다고 이해하면 빠르다.
인식과 비슷한 기생은 중국의 관기에 가까운데, 중국은 역사적으로도 죄인의 가족들 중 여자는 교방사라는 전문적인 정부 조직에서 기생으로 교육시켰다. 연좌제 개념이 있었던 시대기에 당연 그 교육과정은 억압적이었으며
지향점도 매춘부를 넘어 성노예화에 가까웠다. 왕족,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분류되는 조선의 5가지 신분 중에서 기생은 가장 낮은 신분인 천민에 해당되었다.
잔치나 술자리에서 노래나 춤 또는 풍류로 흥을 돋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뜻하는 말로, 조선 시대에는 양인 여자가 성매매를 못하게 하는 법이 있었으나 기생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일패기생은 매춘을 거의 하지 않고 이패기생은 음지에서 경우에 따라 하였으며, 기생 중에서도 하급인 삼패기생은 매춘을 거의 업으로 삼았다. 매춘을 안 하고 멀쩡히 결혼해 남편이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인기 있는 극소수의 일패나 이패 기생들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다. 기본적으로는 유흥과 접객이 중심이였기에 매춘 등 성접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정부에서도 이를 알고도 그냥 눈감아주었다.
삼패기생들이 매춘을 업으로 삼은 것도 링크에 나온 것처럼 기생들도 급에 따라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한정되었는데 삼패는 일패, 이패 전용 노래와 춤을 못했으니 자연스레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식으로 빠진 것.
즉, 급이나 개인의 형편 등에 따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연예인에서 매춘부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일패 기생들은 그 자체를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한 데다, 왕족이나 양반, 부자들을 주로 상대하는 일패나 이패 기생들은 현대로 치면 톱 연예인인 만큼 함부로 건드리는 게 부담스러웠으므로, 진짜로 접대만 하고 몸은 팔지 않는 기생이 있었다.
이런 기생은 사실상 양인으로 취급하였으므로, 외국의 외교관을 접대하는 업무를 맡기도 하고, 은퇴 후에는 기방의 행수[6]가 되거나 일반인과 결혼하기도 했다. 즉,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접대부 정도로만 이해하면 오산이라는 얘기다.[7]
기생의 분류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 일패기생: 오직 임금 면전에만 노래와 춤을 하는 기생이다. 매춘은 거의 하지 않았으며 개인에 따라 유부녀도 존재했다.
- 이패기생: 관기와 민기로 나뉘며 관기는 문무백관을 상대하며 민기는 일반 양반을 상대하며 노래와 춤을 춘다. 원칙적으로는 매춘을 하지 않지만 음지에서 매춘(내지는 성접대)을 한다.
- 삼패기생: 일반 평민을 상대하는 기생으로 노래와 춤, 매춘을 병행한다.
또한 예술에 중점을 두던 기생과 매춘이 업무이던 유녀와는 따로 구분을 하였다. 성종실록에도 유녀의 음란한 짓을 금지한다는 기록이 있다. 고급 기생들은 각자 집과 상당한 재산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혼도 했다. 일패의 경우 궁궐에도 출입했다.
양반들은 자신의 후원에 따로 부르거나 교외로 나가서 춤과 음악을 즐기거나 학문이나 시, 글, 그림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하는데, 양반들조차 어지간한 명망이 있는 게 아니면 일패기생을 쉽게 부를 수 없었다 한다.
주된 고객층은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학문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했을 정도이다.
삼국시대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틀이 잡힌 것은 고려와 조선 시대인데, 각종 정치 제도와 사교적인 자리에 예인이 동원되다 보니 국가 차원에서 종합 예술인을 양성했다고 한다.
정부에서 재능, 성격, 인격의 고매함까지 육성하는 엄격한 교육을 관장했다.출처
일단 기예가 뛰어난 기생이라면 신분이 천민이라도 지식인으로 인정받는다. 아무리 삼패기생이어도 일단 낮은 수준의 기예나마 보장되어 있었으며, 이들조차 아무나 만날 수 없었다. 가장 낮은 삼패라도 만나려면 돈이 꽤 필요했다.
조선시대의 창녀는 들병이, 화랑유녀, 작부 등으로 분화되어 있다. 들병이는 들병에 술을 담아 떠돌며 파는 이들이었는데 매음도 했다. 화랑유녀는 절 주변에서 매춘을 하는 여자였다.
작부는 술집에서 술과 몸을 파는 이들을 가리켰다. 기생이 창녀인 것이 아니라 창녀는 따로 있었다. 사당패도 떠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매춘을 겸했다.
원래는 이처럼 예술인 취급을 받았던 이들이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회 기강이 무너지자 매춘 유무에 따라 은근짜와 더벅머리로 분화되고,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매춘부 취급을 받게 된다.
현재 한국에서 기생=창녀라는 인식은 이 시기와 현재 사극들의 영향이다. 이에 조선 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했다는 것과 결합하여 오해가 더 심해진 경향도 있다.
이는 기생 외의 예술에 있어서도 그렇다. 이례로 그 당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그림들, 대표적으로 민속화 등은 '환'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전통예술(춤이나 음악 등)은 상당수가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즉, 이들은 전통 예술을 전승하고 가르치는 역할도 겸했다. 다만 기생들에 의해 전승된 전통예술은 주로 여성들이 부르던 춤이나 음악의 경우로, 남성들이 주로 하던 탈춤은 아전들에 의해 전승되던 것이다.
이것도 실은 관찰사(오늘날의 도지사) 등의 높으신 분들을 관아에서 '접대'하는 과정에서 전승된 것인데, 아전들은 남자들인 만큼 당연히도 문자 그대로의 접대만 했다.
고려가요가 전승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기생 중 유명한 기생으로는 황진이, 논개, 운심, 홍랑, 이매창 등이 존재했고, 소설에서는 춘향,[12] 추월(이춘풍전) 등이 유명하다. 참고로 어우동은 기생이 아니다. 오히려 왕족과 혼인한 명문 종갓집의 영애였다.
기방에 우르르 몰려살며 매춘하거나 정말 운 좋게 첩으로 들어가는 것은 삼패기생인 더벅머리에 해당하는 모습인데, 커다란 방에 여러 무리의 손님들이 좌정하고, 여기에 한 명의 기생이 들어갔다고 한다. 각자 기생을 끼고 노는 것은 불가능했다.
돈 많고 높으신 분들은 수준 높은 기생을 자기 집 후원에 불렀으니 그런 곳에 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더벅머리(삼패기생)들이 상대한 손님은 주로 높아봤자 양반 가문의 한량이나 군관, 무뢰배, 혹은 돈 꽤나 있는 중인 계층이다.
조선시대에는 사신이나 북방 관리에게 기생을 두어 접대하게 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
'반계수록'에는 “오늘날 관아에서 창기를 길러 사객(使客)이 오면 얼굴을 단장하고 옷차림을 화사하게 하여 그를 접대하게 하는데, 술을 따라 권하고 악곡을 연주하여 흥을 돋우니 이름하여 방기(房妓)라 한다.”라며
관아에서 접대를 위한 창기를 양성했음을 시사했다. 병자호란 직후에 청나라에서 과도하게 기생의 시침을 요구했는데, 이에 반발한 기생들은 자살하여 항거했다고 한다.
벼슬아치에게 딸린 방기의 생활은 간혹 기생으로서 큰 연회같은 데에 동원된다는 것 빼고는 일반 어염집 아낙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한다. 자기가 모시는 군관에게 지급되는 양료로 살림을 하며 지냈다.출처
조선시대의 춘화를 보면 창기로 추측되는 이들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창기라고 할 수 없는 게, 상술했다시피 조선시대에는 창녀로 분류되는 이들이 따로 있었다.
일부 선비는 도저히 수준이 맞는 사람이 없다며 기생과 학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등 지적 교류를 나눴다고 한다. 실제로 기생, 특히 상류에 해당하는 일패들은 지적 수준이 매우 높았다.
지역에 따라 용비어천가나 유교 경전 등을 읊었고, 기생문학이 따로 남아있을 만큼 그녀들이 시를 쓰는 것도 흔했다.
이는 당연한 것이, 이패기생이나 삼패기생 같은 중하급이 아닌 이상 상대하는 손님들은 모두 상당한 학식을 지닌 선비들이며, 이들은 놀 때도 시를 읊고 사군자를 그리거나 학문과 나랏일에 대해 토의하는 것이 흔했다.
그러니 기생도 당연히 이에 맞춰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안동의 기녀는 대학을 암송하고, 관동의 기녀는 관동별곡을 읊고, 함흥에서는 출사표를, 영흥에서는 용비어천가를 읊었다. 북방이나 제주도에서는 말을 타며 기예를 뽐냈다 한다.
조선은 장신구까지 제재할 만큼 사치 금지법이 엄격했는데, 기생은 이에 대해 몇 안 되는 예외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이 입는 양식의 옷과 화장은 금세 유행되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사치금지법에서 자유롭지 못해 그대로 퍼지지는 못했다.
흥청망청이란 말은 기생에서 유래하는데 연산군 집권시 '기생 양성소'가 궁궐 내로 들어가면서 기생은 '운평'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운평 중에서 예능이 밝고 색기가 뛰어나면 그 운평을 흥청이라고 불렀다.
왕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천과흥청'이라는 직급이 된다.
그렇지 않은 흥청은 '지과흥청'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흥청의 뜻은 '맑음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마음의 맑음을 유지한다'라는 명목하에 연산군은 말 그대로 흥청망청(…) 놀았다.
망청은 후렴구로 흥청의 흥(興) 자와 반대되는 의미의 망(亡) 자를 써서 연산군을 비웃는 의미다.
다만 운평을 반드시 기생들 중에서만 뽑은 것만은 아니고, 기생 출신의 첩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했다가, 나중에는 그냥 얼굴이 예쁘고 춤을 찰 추는 민간인 여자들을 마구잡이로 데려갔다.
나중에는 연산군이 명한 2천 명이란 수를 채우기 어려워 얼굴이 추해도 춤과 노래만 되면 죄다 끌고 갔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주류 학계에 속한 학자들은 이런 기록이 신빙성이 있어 보일 만큼,
연산군이 개막장 폭군이었음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후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다.
원래 의녀는 부인의 진료를 위해 뽑힌 일종의 의료직이었으나, 연산군 대에 의녀도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기생과 겸업하게 되었다.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 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뿌린 악습을 거둬내려고 한 중종의 노력이자, 기생에 대한 민중의 민심을 다잡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의녀의 연회 참여는 이어져서 결국 '약방기생'이 의녀의 별칭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일패기생 등 고급 기생들의 능력과 대우가 높은 수준이었다고는 하나,
한계도 있었다. 지체 높은 남성을 접대하는 여성으로서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 재산을 모을 수는 있었으나, 상류층을 대하지만 지체 높은 여성들 같이 정식으로 상류사회에 속하지는 못했다.
어쨌건 조선시대의 기생은 꽤나 알 만한 것도 아는 나름의 지식인이었기에 조선시대엔 기방오불이라고 기방에서 하지 말아야 할 다섯 가지가 있었다.
1) 기생의 약속을 믿지 말 것
기생은 돈이 중한 처지이니 손님들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공수표를 날리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
2) 문자를 읊고 자랑하지 말 것
이것은 기생도 나름대로 교양이 있는 편이라 어설프게 문자 읊다가는 되려 망신당할 수 있고, 반대로 정말 학식 좀 있다 하는 양반가 사람이 문자 읊는 건 잘난 놈이 설교하는 꼴이니 이쪽이나 저쪽이나 좋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라서다.
3) 꽃을 선물하지 말 것
기생을 다른 말로 해어화, 말하는 꽃이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꽃을 선물하는 건 이들을 우롱하는 모양새라 좋지 않기 때문이다.
4) 자기 처를 자랑하지 말 것
5) 가문의 열녀를 자랑하지 말 것
이 두 가지는, 기생은 온갖 남자를 접대해야 하는 처지인데 그 앞에서 누구의 번듯한 정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나 열녀로 칭송받는 사람 이야기를 하면 당연히 듣기 좋을 리가 없다.
3. 유래
한반도에서의 유래는 삼국시대 때로 올라간다.
백제에서는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 생각된다.
고구려에서는 정복 활동을 하고 끌고온 여자들이 '유녀'라는 이름으로 이러한 역할을 했다고 하며, 백제에서는 꽃쟁취라 했다고 한다. 신라에서도 천관녀 등을 보아 기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시대 이전에도 이러한 계층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이후 고려에서도 기생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천관녀 설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회적인 인식이 좋았던 것은 아니라고 추정된다. 그러니까 아래에서 언급되는 기생들의 특징은 성리학이 국시로 자리잡은 조선시대 이후에나 확립된 것일 수도 있다.
4. 기본신조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즉, '노래를 팔지언정 몸을 팔지는 말라'였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매매춘을 불법 취급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자리를 잡는 기생들이 매춘을 할 수가 없었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매춘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춤, 노래, 기악, 학문, 그림, 글, 용모, 화술 등 모든것에 능통한 종합 예술인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외모보다 빠른 눈치와 화술이 더 중요했다고 한다.
불려간 연회에서 단번에 주최자를 가려내고 참석자들의 관계를 추측해야 했으니 당연하다. 천민으로 분류된 것은 매음을 하는 창기(娼妓)였다. 격있는 기생은 본인들부터가 유교적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정조관념이 있었다.
절개에 대한 유교의 인식상 매음이 기생의 주업무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보통 사극 등에서 비춰지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격하된 인식과 창기에 대한 인식이 이어져 원래의 기생보다는 창녀의 유곽문화에 가깝게 묘사된다.
그러나 원래의 기생은 예술가로서 궁이나 관아의 잔치에 동원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 매춘을 하면 안되는 계층이었다. 국가대사에 매춘부를 동원할 수는 없었기 때문.
기방 역시 사극에서는 오늘날의 유흥주점 같은, 여러 기생들이 술상을 받는 손님들 곁에 하나씩 붙어 앉아 술을 따르고 메인이 되는 가무를 하는 기생이 따로 있고 술과 흥에 취하면 손님도 일어나 같이 춤추며 스킨쉽도 하는 식으로 표현하곤 하지만
실제 기방에는 보통 기생은 단 한 명이고 고객들은 그녀의 가무를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기에 스킨쉽은 커녕 가까이 앉을 수도 없었다. 현대로 치면 지하 아이돌의 소극장 공연 혹은 디너쇼의 연예인과 더 유사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부터가 법을 어겨가며 이들을 성행위 대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꽤 있는 것을 보아 모든 기생이 이러진 못했을 것이다.
성종 때에는 승지가 장악원(掌樂院) 청사에서 기생과 성행위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생 가희아의 경우 그를 얻겠다며 군의 높으신 분들이 납치 대결을 벌이다 대낮에 휘하의 병사를 동원하여 패싸움을 벌였다.
이외에도 양반들이 기생을 얻겠다고 싸움을 벌였다는 기록이 더 있다.(...) 심지어 친상이나 국상 때에 기생과 성행위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양반들이 법이나 원리원칙을 어겨가며 이런 짓을 한 것이다.
아래의 글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들더러 지식인이니 기예인이니하고 미화를 해도, 이런 인식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높으신 분들 대상으로 지식이나 기예만 보여주고 교류하는 선에서 끝났으면,
굳이 여자들로만 구성된 집단을 만들 필요는 딱히 없었을 테니까. 위의 각주를 보면 알겠지만, 관아의 아전들이 높으신 분들을 접대할 때 기생들의 원 업무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근데도 구태여 관아에 속한 기생인 관기가 따로 있었다는 사실은 결국 기생의 본업이 '접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뒤로 몰래 성접대를 하던 이패기생의 존재를 보면, 정말로 기생이 성접대를 안했는지도 의문이다.
이런 은밀한 이야기가 기록에 남을 리가 만무하니 말이다. 당장 현대에 정치인이나 고위급 법조인이나 관료같은 높으신 분들이 자주 출입하는 고급 술집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수사도 증거 부족으로 인해 난항을 겪는 마당에,
전근대 기생들의 성접대 여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소수록을 보면 관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지킨 기생도 있기 때문에 결국 케바케다. 원래 관기제도는 국가 연향을 위해서 존재했지, 양반에게 성적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공노비인 기생(관기)을 불법으로 점유하고 마음에 드는 기생을 속신하여 빼낸 뒤 자기 집 노비로 대신 채웠는데, 조선시대 노비 역시 양반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계층이었다.
서얼이 서자와 얼자를 합친 말임을 생각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외지에 간 관리나 군인에게 현지처 노릇을 하면서 잠자리도 제공한 관기인 방기(房妓), 방직기(房直妓) 등이 존재했던 것을 보면 관기를 빼돌리는 것은 금할지라도 조정의 묵인하에 관기의 수청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녀들이 약방기생이라고 불리거나, 다모들의 취급도 점점 안 좋아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명백하게 공노비에서 시작한 의녀들이 약방 기생이라고 불린 것을 생각하면, 이게 기생을 낮잡은 것인지 의녀를 낮잡은 것인지 조차도 애매할 지경이다.
5. 되는 법
기생 학교를 ‘교방(敎坊)’이라 한다. 교방은 고려 시대의 기록에서도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체계적인 기록보다는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명창 박녹주의 경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스승을 만나 배웠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는 권번(券番)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조합에 소속되어야 했다.
조선 전기의 서울 기생들은 나흘에 한 번 관습도감에 나가 악기와 춤을 배웠다. 추운 11~1월과 더운 5~7월은 쉰데다 나흘에 한 번 꼴이었기에 나머지 시간은 연습에 할애하거나 생업에 종사했다.
이후 성종 대에 관습도감을 다른 관서와 통합하여 장악원이 되었는데, 이 때에도 체제는 관습도감과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가곡과 악기를 배울 땐 스승을 정해 그 스승에게 배웠는데, 부지런하게 배우지 않으면 스승도 함께 벌을 받았다.
또한 관습도감 제조에게 기예 시험을 봤는데, 능하지 못하면 벌주고, 심하게 못하면 돌려보냈다고 한다. 재색이 없어도 돌려보내 일정 이상의 수준을 유지했다.
주요 지방은 교방을 설치하여 교습했는데, 기생이 많으면 거주를 위해 기생청(妓生廳) 혹은 기생방(妓生房)이라는 별도의 거주 공간이 있었다. 교습 내용은 전해지지 않으나 한양과 비슷했을 것이라 여겨진다고 한다.
관습도감에서는 가곡과 당비파, 현금, 거문고, 가야금, 장구, 아쟁, 향비파, 해금, 대금, 소금, 필률 등 다양한 기악을 익혔다고 한다. 악기는 능하지 못한 자는 한 가지만을, 능한 자는 여러 악기를 배웠다.출처
애초에 기생이 체계화된 이유가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종합 예술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던지라, 기생이 되는 일은 어지간한 사대부들이 관직에 오르는 것과 별반 다를 것 없는 무지막지한 난이도였다.
당장 갈고닦는 것만 해도 온갖 춤과 노래, 급에 따라 판소리나 잡가, 민요, 온갖 기악, 화술, 용모, 각종 재주뿐 아니라 선비들이 공부하는 것들을 똑같이 공부해야 했다.
어찌보면 선비들과 교류를 하는 직업이니 당연한 일. 여기에다 옷을 짓고 자수를 놓는 일 등 당대 여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 역시 연마해야했다. 심지어 지역에 따라 말을 타며 재주를 부려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해도 일정 수준을 만족하지 못하면 신세가 천양지차로 나뉘고 허락되는 예술 종류마저 제한되었다. 유일한 이점은 엄격한 복식금제의 유일한 예외 대상이라는 점이다.
하나만 제대로 하는 것도 어려운데, 혼자 만능 엔터테이너이어야 했던 이들이다.
일제강점기 기생이었던 박녹주의 증언과 구전에 따르면 '화초머리 올리기'라고 하여 일종의 성인식이 있었다. 기생이 등장하는 사극에서도 이게 나오기도 한다. 교육을 받은 기생이 '첫 손님'을 받은 뒤 화초머리라는 가체(加髢, 가발)를 머리에 얹는 것.
이는 일반 민가의 혼인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화초머리를 올려줄 사람이 가체를 얹어 기혼자의 머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첫 손님의 자격 또한 상당히 중요했다. 상당히 명망 있고 직위도 높은 인물이어야 했으며, 비용도 많이 필요했다고 한다.
화초를 올려주는 사람이 기생의 집과 가체 등의 장신구, 세간살이 등을 모조리 대줬는데, 이 사람이 가난하여 이를 제대로 대주지 못하면 그 기생의 앞날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고 한다.
후기의 여러 증언이나 기록에 따르면 이 때에 첫날밤을 치르는 경우도, 치르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화초 올려주는 사람의 성향에 따라 달랐던 모양이다.
기생이 본래 매춘이 금지되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매춘 유무에 따라 계급이 분화되었다는 점과 삼패가 아닌 이상 기생도 평범하게 결혼할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원래는 화초를 올려준다 하여 첫날밤을 치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일보 1974년 1월 16일 자에 투고된 명창 박녹주의 「나의 이력서」기사에도 '낭군을 맞지 않고 머리만 얹는 풍습'이라 언급되었다. 따라서 얹어주는 사람이 유명하거나 부자여야 했으며, 풍습으로는 세간살이를 모두 대주고, 나중에 유명해지면 보답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박녹주는 충청도 부자 변 씨가 화초머리를 올려주었는데, 그가 댕기를 풀자 동료와 선배들이 머리를 빗기고 쪽 쪄줬고, 하룻밤도 같이 하지 않은 변 씨는 풍습에 따라 세간살이 등을 모두 대주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 시기가 일제강점기 이후인 것과 게이샤의 후원자인 단나 역시 이렇게 집부터 세간까지 전부 지원한다는 것, 원래 기생은 국가에서 양성했다는 걸 생각하면 일본 유곽문화가 들어온 것일 수도 있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황해도의 남편이 없는 무부기는 경무소 소장이 기생조합으로 와서 허가를 하면 기생이 될 수 있었고, 동래권번에서 가무를 가르쳤던 강옥남씨와 동래 출신 문장원 명인의 증언에 의하면 동래,
동래권번의 경우에는 남편이 있는 유부기였는데, 손님과 기생어머니가 금전적으로 합의하여 초야를 치르고 그 뒤로 기생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이 부분은 성(性)과 관련된 부분인지라 후대에 활동한 권번기생출신 명창, 명인들이 이야기를 꺼린 부분이라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고 해방이후 활동했던 다른 동래권번출신 기생들의 증언에 의하면 권번기생이라 할지라고
정조관념에 굉장히 엄격했던 모습도 보인다.
<모던일본·조선판> 쇼와14년(1939년) 판에는 평양기생학교의 3학년 시간표가 실렸다.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된 일제강점기였던지라 조선이나 고려의 체계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자.
6. 구분
기강이 무너져 기생의 계층이 생기고 이에 따라
매춘 유무가 달라졌던 조선 후기의 기생은 일패기생(기생), 이패기생(은근짜/慇懃-, 隱君子), 삼패기생(더벅머리/搭仰謀利)로 나뉘는데, 등급에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 등이 제한되었으며, 취급 역시 차별이 있었다.
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본인의 실력과 매춘 유무. 기생은 예술과 학문의 수준이 떨어질수록, 기생으로서의 급이 낮을수록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해야만 하는 구조이기도 했다.
그럴 경우에 같은 기생, 특히 일패기생이나 정조를 지키는 은근짜들도 곱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같이 싸잡아 기생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했을 정도라고. 이전에는 국가에서 기생을 양성했기에 수청을 들더라도 기생과 창녀의 구분이 확실했다.
원래 조선은 성리학으로 인해 매춘이 금지된 국가였고, 관리의 수청을 들었던 관기의 경우조차 제도권 내에서나 허용되었지만 심하면 지탄받았다. 소위 창녀라 할법한 부류는 천민 여종이나 정조를 잃어 오갈 데 없는 여인이었다고 한다.
매춘 행위가 발각되면 노비가 되었으며, 양반조차 수청이 아닌 강간은 금지되었으며, 상중이나 국가 위급 상황에 기생과 어울리거나 그에 너무 빠지면 탄핵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록이 남아있는 명기들의 사례를 보면 마냥 문란하고 사회적 인식이 나쁜 계층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랬다면 그 콧대높은 양반들이 어울렸다는 기록을 남겼겠는가? 애초에 기생이 천한 매춘부로 동일시되기 시작한 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로 조선의 기반이 붕괴되어 가던 시기였다.
- 일패(一牌/기생)는 주로 최상류층과의 교분이 깊고 풍부한 교양을 자랑했으며 가장 상급의 춤, 노래 등의 예능을 익혔다. 궁중에서 국가 행사나 연회를 위해 이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가무나 창, 기예, 시, 서, 화, 학문 등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잘하는 만능 엔터테이너여야만 했다. 매창불매음을 잘 지키며 정조관념이 투철했다고 한다. 궁궐에 출입하던 이들인지라 기생재상(妓生宰相)이라 불리기도 했던 만큼 어지간한 명망과 수준이 안되면 금을 준대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한다. 아예 옥관자를 달았을 정도. 상것들은 이들에게 감히 말조차 걸지 못했다 한다. 표면적인 위치는 천민이나, 워낙에 다재다능한지라 대부분 동네 양반 “따위” 는 손님 취급도 안 해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기생들은 각자의 집이 따로 있었다. 양반의 집에 따로 불려가 기예를 선보이거나 약방기생[23]이나 상방기생으로서 그 소임을 다했다. 궁중을 출입하며 왕이나 그에 못지않은 재상, 혹은 높은 왕족이나 양반들을 상대했다. 이들은 굉장히 지조있는 예술가이자 지식인이었다. 원래는 관기도 일패기생으로 분류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기강이 무너져 그 관기들이 매춘을 하게 되면서 은근짜나 더벅머리 수준으로 전락했다. 원래 관기는 관리를 상대하며 매춘을 하는 게 아니라 궁이나 관가의 잔치에서 기예를 선보이는 이들이었다.
- 약방기생과 상방기생은 대한제국 시절에 존재했다고도 하지만 연산군 때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종 때 수차례 이들을 원래 하던 일만 시키려 했으나 한 번 물이 흐려지자 돌이킬 수 없었다고. 혜민서나 내의원 의녀 출신인 약방기생과 공조나 상의원 침선비 출신인 상방기생으로 나뉘는데, 내의원 출신 약방기생은 궁초(宮綃)댕기를, 혜민서 출신 약방기생은 통견(通絹)댕기를, 상방기생은 갑사(甲紗)댕기를 드렸다. 원래 전문적으로 오랫동안 기예를 배운 이들이 아닌데다 진짜 기생들처럼 오랫동안 온갖 학문과 재주를 익힌 것도 아니기에 진짜 예술가적 면모로서는 기생이라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대한제국 시절에는 이 약방기생과 상방기생들이 한성기생조합소, 다동기생조합, 광교기생조합 등을 거치며 일패기생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의사나 간호사로서 환자를 치료하거나 옷 만들고 자수놓던 이들에게 예술가처럼 춤 추고 노래하라고 하면 과연 얼마나 잘 하겠는가. 사실상 그냥 궁궐 연회에 같이 동원되니 싸잡아 일패라 분류된 것이라 보면 된다.
- 이패(二牌/은근짜)는 일패와 같이 예능을 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모자랐다. 애초에 할 수 있는 기예가 일패보다 급이 낮은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겉으로는 기생의 품위를 유지하면서 뒤에서 몰래 매음하는 경우가 자주 있던 부류였다. 주로 남아있는 기생에 대한 기록 중 고급 기생이라 보일만한 것들은 대부분 이들에 대한 것이다. 은근히 매춘을 한다고 은근짜(慇懃-/隱君子)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은근짜라 하여 무조건 몰래 매춘을 했던 것은 아니고, 개개인의 신념에 따라 달랐다. 후대에 태어났다면 은근짜였을 황진이의 예를 보면 더벅머리에 비해 굉장히 취급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24]. 자기 집이 따로 있기도 했다. 주로 일반 양반과 각 관아의 관리를 상대했다. 기본적으로 이들 역시 예술가였지만, 자신의 의지와 환경에 의해 좌우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고객이 높은 신분인데다 이들 자체의 수준도 높기때문에 무턱대도 천하게 취급하지는 못했다. 돈 많은 양반들이 경관 좋은 교외나 자기 집 후원에 불러서 기예를 즐기거나 지적 교류를 했다.
- 삼패(三牌/더벅머리)는 기생 중 가장 하급으로, '더벅머리(搭仰謀利)'라 불리기도 했으며 술자리에서 낮은 수준의 잡가나 민요만을 부르며 상위 등급에 비해 대놓고 매춘을 하였다고 한다. 매춘 자체가 업이었으며 기생처럼 가무를 할 수는 없었다. 보통 여겨지는 기생, 즉 창기(娼妓)가 바로 이들이다. 하지만 더벅머리도 조선시대 서민이 건드릴 정도는 아니라서 보통 백성도 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지 삼패라도 만날 수 있었다. 서민을 상대로 매춘하던 여인들은 따로 있었다. 들병이[25], 각 마을을 오가는 사당패, 절 주변에서 몸을 파는 화랑유녀(花娘遊女), 술과 함께 몸을 파는 색주가의 작부[26] 등이 있었다.참조1참조2 기생에 대한 기록의 상당수가 이들에 대한 기록이며, 사극 등의 매체에 등장하는 기생 역시 더벅머리에 가깝다. 원래는 이들의 매춘 등에 대한 제재가 확실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기강이 해이해져 문란한 기록이 나타나는데, 기방에서 지낸 경우에는 어려서부터 성적 경험이나 수치심을 강제로 많이 당했다는 후기의 기록이 있다. 원래 기방에 출입하는 이들은 고상한 양반이 아니라 거리의 한량이나 왈자패, 하급 관리 같은 다소 신분이 낮은데 돈을 꽤 가지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런 거친 남자들로 구성된 여러 무리의 손님들이 있는 방에 1명의 기생이 들어갔는데, 어린 기생의 경우 강제로 옷을 벗겨 희롱하거나 추행했다고 한다. 이것은 기생이 기방에 빨리 순응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고 하는데, 기생서방[27]들이 손님들에게 일부러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역시 경우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줄곧 정절을 지키던 기생이 한 양반에 의해 강제로 겁탈 당하자 매우 수치스러워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관아에 보내져 지방관들을 상대하기도 했으니, 결국 케바케였던 셈. 애초에 매춘을 하는 기생은 예술인이라기보단 천민으로 봤다. 천민으로 분류된 이들 중 창기(娼妓)가 있을 정도이니. 사극에서 주로 나오는 기방에서 남자와 희롱하는 그런 부류가 이들이고, 꽤 높은 수준으로 나오는 기생은 대부분 은근짜다.[28] 격이 높은 진짜 기생, 즉 일패기생들은 잘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리 몸 파는 천한 하급 기생이라 해도 일반인이 건들지는 못 했다. 보통 매체 등에서 접해 알고 있는 화려한 기방에 사는 기생들이 바로 이들이다. 아무리 더벅머리라 해도 어느 정도 위신이 있고 돈이 많아야 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만일 이들이 기첩으로 들어간다면 그 앞날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보통 기첩이라 천시받는 이들이 보통 더벅머리 출신이다. 매춘 자체가 직업이라 굉장히 천시되었음에도 후에는 정계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신창조합(新彰組合)을 만들어 스스로를 기생이라 했다고 한다. 출처
이들 사이에서 은근한 신경전도 있었는지 조선 말~일제강점기 초에 서양에서 양산이 들어오자 패에 관계없이 모두 붉은색 양산만을 사용해 서로의 패가 구분이 가지 않는다며 일패는 진홍색, 이패는 연홍색, 삼패는 그 외의 색을 쓰기로 정하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길에 양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하나는 진홍색 하나는 연홍색 다른 하나는 다른 색이니 오호라 일패, 이패, 삼패로구나
어린 기생은 동기(童妓), 서울 기생은 경기(京妓), 지방 기생은 지방기 혹은 향기(鄕妓)라 했으며, 기생집의 우두머리 기생은 행수기생이라 했다. 나이에 따라 1살 위면 언니, 2살 위면 형님, 5살 위면 아주머니라 불렀다.
기생끼리도 계급과 나이에 따라 상하관계가 엄격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한 기생을 의기(義妓)라 했는데,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기생들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의기 현계옥의 사례 이외에도 노래를 잘하면 가기(歌妓)나 성기(聲妓), 춤을 잘 추면 무기(舞妓), 가야금을 잘 타면 금기(琴妓), 예술이 뛰어나면 예기(藝妓), 시를 잘 지으면 시기(詩妓),
의로운 행위를 한 기생은 의기(義妓), 절개를 지킨 기생은 절기(節妓), 수청을 드는 기생은 수청기(守廳妓), 방직을 하면 방기(房妓)[30], 성적 접대를 하면 창기(娼妓)라 하였다.
간혹 가능성이 보이는 젊은 선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소속에 따라 관기, 민기, 사기, 가기 등으로 나뉘었다. 기본적으로 조선은 관아에 소속되는 체제였다. 관기는 관아에 소속되었고, 민기, 사기, 가기는 모두 민간의 기생이었다.
관기는 주로 관아의 관리를 상대했는데, 집안이 몰락하여 관기가 된 경우는 주로 바느질 등의 잡일을 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와 사극의 영향으로 기생들이 모여있는 공창이나 집창촌이 있었다고 잘못 아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일본의 요시와라에 가까운 체계다. 하지만 집창촌에 버금가는 곳은 없었으나 기생들이 모여사는 마을은 있었다.
그 예로 북촌한옥마을이 되겠다. 기생들은 관기인 경우는 관아에, 이외에는 자기 집이나 기방에 있었다. 게다가 원래 기강이 무너지기 전의 기생은 매춘이 금지된 이들이었다.
관아나 기방에서 매춘을 하는 경우는 창기(후기의 삼패기생)라 하여 천하게 취급받았다. 신분도 아예 천민이었다.
영업 체계도 달라서 자기 집에 머물며 양반들의 후원이나 교외에 불려가 대화를 하거나 기예를 선보인 고급 기생과 달리, 기방이나 관아에서 의무적으로 상대하는 식이었다.
창호지나 비단실을 질에 넣어 피임했다고 한다. 페미돔같은 것을 원했겠지만 저게 별 효과가 있을 리가(…). 오히려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다른 균에 감염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피임을 하려고 노력하기는 했다. 일반적인 피임법은 배란주기관찰법과 돼지 창자로 만든 콘돔같은 물건이었다.
6-1. 구분법에 대한 의구성
하지만 이러한 구분법이 실재했는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본래 기생(관기)은 왕조시대 궁중 진연이나 지방관청 행사 때 가·무·악을 담당했던 여악(女樂)을 일컫는다.
그들은 전통 예인(藝人)으로 관청의 기적(妓籍)에 등록되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관리되었다. 나라가 혼란스러웠던 조선 후기에도 기생들은 여악의 전통을 이어받은 예인으로 법적, 정책적으로 인정받는 존재였다.
일본 가고시마국제대학 이노우에 가즈에(井上和枝) 교수는
"조선 기생의 사회적 위치와 자기 변혁 등을 연구하면서 조선 기생은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였고,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나타내는 기생도 존재했음을 알았다"며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기생은 신여성임과 동시에 근대 조선의 현대사를 말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고 평가했다. 민속학자 이능화는 1927년 자신이 쓴 <조선해어화사>에서 신라시대 원화(源花·화랑의 전신)가 기생 제도의 본류라고 정의한다.
이어 '제35장 갈보종류총괄(蝎甫種類總括)'에서는 '기생=갈보(매춘부): 기생(일패), 은근자·은군자(이패), 탑앙모리(삼패)'로 분류하였다. 이는 어디에 근거를 뒀는지 밝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조선 기생을 세 종류(일패·이패·삼패)로 나눠 매춘부에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김유신과 천관녀 일화'를 인용하며 '기생의 집(倡家)'을 매음녀 집인 '창가(娼家)'로, '아름다울 요(媱)'를 '음란할 음(淫)'로 바꿔 음방(淫房)이란 용어를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야기 주인공인 천관녀를 일제강점기 매소부(賣笑婦), 즉 창녀(娼女)로 왜곡시켜놓았다. 이는 이능화가 한반도 풍속은 물론 매춘사(賣春史)까지 왜곡, 변질시켰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이정남 일본 동경대학교 CBF연구소 소장은 지난 7일 통화에서 "이능화는 근대 사학자로 식민지시기 많은 연구와 저술을 남기는 등 한국 근대사 연구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라며
"그가 쓴 <조선해어화사>의 왜곡된 '기생의 정의와 분류법'은 어떠한 의심이나 반론, 구체적인 고찰·검증도 없이 모든 내용이 마치 정설인 듯 여과 없이 재인용, 재생산되어 왔다"고 주장했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는 우리나라 기생 역사 왜곡의 시작이었죠. 다양한 왜곡 중 ▲ '화랑의 전신인 원화가 기생의 기원'이라는 설, ▲ '화랑은 동성연애자인 남색(게이)들이었고, 낭도들은 성을 밝히는 오입쟁이였다'는 설, ▲ '기생 종류의 일패, 이패, 삼패' 설 등이 대표적입니다. 현존하는 기생관련 최초 기록은 고려 중기(994년) 이며, 최초로 확인된 기생은 1100년대 진주 기생 '월정화(月精花)'로 나타나거든요.
또한, '일패'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기록에서 단 한 건도 발견된 바가 없고, 우리는 기생·관기라고 불렀는데, 일본인들만 1901년 쓰네야 세이후쿠에 의해 '일패'를 사용하기 시작했지요. 그때도 우리는 독도, 동해라고 했고 일본인들은 다케시마, 일본해라고 불렀는데요. 지금도 일패, 다케시마, 일본해 등의 역사 왜곡과 억지 주장이 반복되고 있어 우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 소장은 '기생의 정의'에서 다양한 학술적 오류가 발견되고 기생의 분류(일패 기생, 이패 은근자·은군자, 삼패 탑앙모리) 역시 조선 시대 기록에 없는 역사 왜곡이라며 <조선해어화사>, <조선개화사>, <조선풍속집> 등을
한국 기생 역사 및 기생 이미지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훼손시킨 대표적인 3대 문헌으로 꼽았다. 논문에 따르면 이능화는 1993년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소장에 의해 친일행적 문제가 처음 제기된다.
이어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고 4년 후인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식 규명됐다.
또한, <조선개화사>(1901)를 쓴 쓰네야 세이후쿠는 '식민지 정치인'이었으며, <조선풍속집>(1914)을 쓴 이마무라 도모는 일제 경찰 관료였다. 두 일본인은 기생 연구자도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광복 후 발표된 기생 관련 논문과 서적 대부분은 이능화가 쓴 <조선해어화사> 내용을 인용, 기술하고 있다.
모 학자는 이능화의 '기생 분류법(일패·이패·삼패)'은 조선 후기 들어 더욱 세분화 된다고 적었다. 하지만 '기생 분류법'은 조선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게 통설이고, 이정남 소장 또한 그렇게 주장한다.
이 소장은 "조선시대, 대한제국기, 식민지시기를 통틀어 조선왕조실록, 조선인 개인 문헌, 근대신문, 근대잡지, 관보, 공문서, 경찰 문서 등 지금까지 공개된 모든 '한국의 기록 및 사료' 에서 '일패'라는 용어는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1924년 잡지 <개벽>의 '경성의 화류계'와 1927년 <조선해어화사>에 '일패=기생'으로 등장한다"라며 한마디 덧붙였다.
"<한국사>, <한국근대사>, <한국여성사>, <한국음악사>, <한국무용사> 등 '기생 관련 학계'를 비롯해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등 국공립기관의 웹사이트, 언론매체, 사전류, 그리고 각종 포털사이트 등에서 오랫동안 방치·묵인해 온 '재한 일본인들'과 '친일파 이능화'에 의한 '기생에 관한 왜곡된 기술', '기생의 정의 및 분류법' 등을 바로잡고 청산해야 할 시점입니다."
이 정남 소장은 "1868년부터 1901년까지 '일본의 기록 및 사료' 속에서 '일패(一牌)'라는 용어는 단 한건도 확인되지 않았다"며
"후속 연구나 연구자들에 의해 더 이른 시기 '일패(一牌)'라는 용어와 '왜곡된 기생의 정의와 분류법'이 발견된다면 본 논문은 상당 부분 정정돼야 할 것이며 그러한 발견이 이뤄지기를 반가운 마음으로 기대한다"고 부연했다.
7. 기생과 기방에서의 예의
무척 까다로웠다. 이를 지키지 않아 기방에서 몰매를 맞아도 뭐라 못했을 정도. '계압만록'에 따르면 기생들과 어울릴 때 실언을 하면 그 실언한 사람을 멍석말이하여 거꾸로 세우는데, 이러다가 죽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보통 양반들은 기방에 가지 않았으니, 이는 삼패기생들과 한량, 왈자패에게나 해당하는 얘기다.
- 기방 5불
- 월악붕(月岳崩) 맹세 말라. = 기생의 말을 믿지 말라. 여러 사람에게 웃음을 파는 기생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어떤 거짓말도 할 수 있기 때문. 이것이 유래된 이야기가 있다.
- 기생에게 꽃을 가져가지 말라. = 기생의 별칭은 해어화(解語花), 즉, 말하는 꽃이다. 꽃이 만발한 기방에 꽃을 가져가는 것은 기생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 처첩을 자랑 말라. = 기생은 특성상 정상적인 혼인 생활을 할 수 없는 몸이다. 그런 기생에게 자신의 아내를 자랑하는 것은 심각한 모욕일 수 밖에 없다.
처첩 자랑할거면 집에서 잘해줄 것이지 뭐하러 기방에 갈까? - 문자를 쓰지 말라. = 기생들은 예술과 화술 등을 갈고닦은 만큼 공부도 많이 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사대부 못지않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즉, 학식이 정말 뛰어나지 않은 이상 개망신당하기 십상이었다.
- 효자, 효부 났다는 정문(貞門) 얘기를 하지 말라. = 위의 처첩 자랑과 비슷한 이유. 자식을 낳아도 사생아일 확률이 높고, 기생 본인도 그런 식으로 태어난 경우가 적지 않은데다 그렇지 않더라도 기생이란 신분은 부모에게 좋은 자식 취급을 받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기생이랑 놀아나는 부모는 좋은 부모인지는 생각 안 했나보다왜 연예인 팬미팅 좀 간다고 나쁜 부모는 아니잖아
이외에도 일제강점기(1920년대)의 기록에 의하면 기생집 들어가는 격식, 대선 책망하는 격식, 처음 나온 기생 말 묻는 격식, 기생 양주(兩主) 욕보이는 격식 등 다양하고 까다로운 여러 격식이 있었다고 한다.
손님들은 말을 꺼낼 때에도 '좌중에 통할 말이 있소'라고 조심스레 입을 떼어야 했음은 물론이고, 기생의 춤이나 노래 등을 보고 싶을 때에도 다른 손님들과 해당 기생에게 격식을 갖춰야 했다.
해주에서는 서울과 달리 기방 문이 닫혀 있으면 들어갈 수 없었다. 기생청의 주업무는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 시, 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과 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음곡 외에 예의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연예인이자 전통 예술의 전수자였던 이들을 일본의 유녀와 같은 창녀로 취급하면서 정기적으로 치욕스러운 성병검사를 당해야만 했으며, 이 시기에 왜곡된 인식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당시 기생의 신분은 상당히 애매했다. 예술만 하는 그런 기생은 결혼을 하기도 했지만, 매춘을 하는 창기의 경우 천민으로 대우받았다. 하지만 일패기생이나 은근짜는 많은 예능으로 많은 이에게 대우받는 미묘한 위치였다.
수준이 높은 은근짜는 설령 은근짜라 하더라도 두고두고 명기(名妓)라 칭송받는다. 이패기생(은근짜)인 황진이의 행보를 보면 살림을 차리는 것도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삼패기생, 즉, 창기는 빼도박도 못하는 천민인지라 양반가와 정분이 나 자식이 낳는다면 그 자식은 '서얼'이 되며, 창기의 경우 아비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사실상 '천민'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
8. 구한말 및 근대시대의 변화
일제강점기인 1916년 3월, 데라우치 총독이 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식 유곽(공창)제도를 공포하면서 이전에는 없던 일본식 공창제가 도입되었다. 조선은 관기 이외에 공창이라 할법한 것이 없었다.
애초에 성리학 이념이 워낙 강해서 관리를 수청드는 관기조차 수청은 되지만 강간은 안된다거나, 그것도 너무 과하면 안된다는 식의 규율이 적용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공창제가 공포됨에 따라 기생들은 '권번'에 기적을 두고 세금을 내며 활동하는 허가제로 운영되었는데, 권번은 동기에게 기예를 가르치며 기생의 요정 출입을 지휘하고 화대를 받는 중간 역할을 했다.
마이코나 게이샤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제가 일본식 제도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사실상 일본의 오키야(置屋/おきや)와 이름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소위 남녀칠세부동석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사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국내에서는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았다.
일제강점기에는
권번에 기적을 두고 3년 동안 기예를 배운 뒤 배반에 합격해야만 기예증(技藝證)을 받아 소위 말하는 일패기생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기생청은 총독부의 일본 유녀 권번 벤치마킹에 의해 권번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
이 권번은 기생들을 양성하는 학교 역할도 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공식 교육기관 중에선 전통 예술을 계승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이었어서 의의가 꽤 크다.
한 예로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국악인들 중 상당수가 권번 출신 기생이었거나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던 교사 출신이다.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평양 기생 학교의 경우 강점기 초엔 400명의 학생들이 있었다고 한다. 평양 기생들과 진주 기생들은 아예 기생들의 만세시위를 주창하며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평양 기생들은 "우리는 일본의 창녀가 아니다! 조선 기생들은 나라를 사랑한다!"며 가두시위에 참여했고, 진주 기생들은 "임진왜란을 기억하라! 왜병들에게 돌을 던져라!"라며 매우 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한편 1935년에는 평양 기생 차릉파가 서봉총 금관을 쓰고 금제유물들을 두루고 찍은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어 큰 비판과 논란이 된적이 있다.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녀를 데려와 경성의 신마치(현재의 서울 중구 쌍림동), 혼마치(현재의 서울 명동)에
공창 지역을 설치하여 기생 제도는 점점 그 규모가 작아진다.
부산의 경우 미도리마치(완월동)에 일본에서 건너온 유녀들이 유곽을 형성해 현재까지 이어지는 유흥가의 첫 시작이 된다.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해방 후 그때까지 존재했던 기생들은 예능인으로 전환하거나 대도시의 요정으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물론 기생 일을 그만두고 평범한 생업을 찾아간 여성들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기생 이난향의 경우는 조선 상위 기생들이 불렀던 정가와 초기엔 기생 사이에서 금기시되었고, 후기엔 하급 기생들이나 불렀던 잡가를 모두 불렀다.
춤도 전통춤 뿐만 아니라 서양춤도 배웠고, 악기는 국악기인 양금과 일본 악기인 샤미센을 연주했다. 기생이 정가와 잡가를 모두 입에 올린 것에서 이전 시대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창기 한국의 연예계는 기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기생들이 연예인이 되거나, 연예인이 기생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많은 인기를 끌었던 가수 왕수복, 이화자, 선우일선 등의 여가수가 기생 출신이었고, 석금성, 유신방, 김난주, 김난옥 등의 여배우들이 기생 출신이었으며, 이월화와 복혜숙은 여배우에서 기생이 되기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197-8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연예계를 화류계로 취급하며 깔보는 시각이 많았지만, 그러한 시각은 1990년대 이후 연예인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개선 되면서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나이가 제법 든 노인들 사이에서는 그러한 시각이 남아 있는 편이다.
유명한 평양 기생은 6.25 전쟁 때까지도 남아있었다.
당시 백선엽이 평양을 탈환한 후 평양 기생들이 아직 잘 있는가 궁금하여 찾아가 봤는데, 그때까지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술을 시켰는데, 흥분한 기생들이 자기들이 술을 다 마시고 공산당 욕을 막 하더란다.
자기들이 즐기고 싶어서 기생집 운영을 강제로 시키고는, 인민들의 눈이 두려워 검은 옷만 입게 하질 않나, 음식이고 술이고 비싼 거 잔뜩 먹고는 돈은 한푼도 안 내질 않나, 하고 기생들이 공산당 욕을 쏟아내었다.
그래서 평양 탈환 기념으로 회포를 풀려던 술자리는 기생들의 하소연 자리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9. 기타
기생의 출석부를 ‘기생안’이라 한다. 부를 땐 이름을 풀거나 수식 혹은 이름을 수식하는 말을 붙여 시처럼 호명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추 칠월 십오야에 광명 좋다, 추월이 나오. 분벽사창 요적한데 한가하다, 향심이 나오.' 식으로 한다.
그러나 공문서라 하기에는 영 아니었다. 그래서 기생안과 별도로 ‘기생 점고 호명기’가 있었다. 기생안은 말 그대로 기생 이름만 적어놓은 출석부이고, 호명기가 이름 부르는 방법을 적어놓은 것이다.
보통 기생의 머리라 하면 얹은머리만을 떠올리지만, 모든 기생이 그런 크고 화려한 머리를 하지는 못했다. 가채는 기와집 1채와 맞먹을 정도로 고가의 사치품이었기에 돈이 없거나 하급인 기생은 서민들과 같은 머리를 했다.
기생이 윤락녀로 전락한 건 일제 탓이라며
조선에는 성매매가 없었고 창녀였던 게이샤와는 달리 기생은 단지 예술인이라고 주장하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는 조선시대 북방에 배속된 군관이 자신의 성관계를 기록한 부북일기에 기생들을 상대로한 문란한 성생활이 잘 기록되어있다.
"함경도 국경 수비부대의 현실보다는 주인공들의 성생활이 더 눈길을 끈다. 심할 경우 거의 3일에 한번씩 여자와 동침을 한다. 주인공이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들은 여행중 임시로 잠을 자게 된 집의 여자 노비들, 술집 여자(주탕), 기생 3자 중에 하나다. 여기에 추가해 근무지 도착 이후에는 개인별로 방지기가 할당됐다. 기생의 경우 관계를 가지기 전에 유혹하기 위해 건넸던 대화의 내용까지 충실하게 기록을 남기고 있어 조선시대 기록문학 중에선 극히 이례적인 성격의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아들 박취문의 경우 1644년 12월10일 울산에서 출발하는데 출발 다음날부터 좌수댁 노비와 동침을 한다. 이어 12월15일 노비 분이와 동침하고 12월16일에는 술집 여인 춘일이와 동침한다. 17일에도 술집 여자 옥춘이와 자고 12월19일에도 여자 노비와 잔 것 같고, 22일 술집 여인 향환과 자고, 26일 삼척 동문밖 술집 여인 예현과 동침하고 12월 30일에는 강릉 기생 연향과 동침하며, 다음해 1월2일에는 강릉 명기 건리개와 동침한다."
내용을 보면 남의 집 여자 노비나 술집 여자나 유명한 기생이나 다 쉽게 성관계를 상대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기생간에 매독을 옮긴 내용까지 자세하게 적혀있다.
"유명한 기생 건리개가 이 집 가까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해가 질녁에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녀와도 가까이하고는 밤늦게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했다. 그녀가 묻기를 "기생 연향과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해서 "가까이 했다"고 답했더니 "잡담할 때가 아니다"고 말하며 옷을 입고 앉아 소리내어 크게 울었다. 기생 건리개의 어미와 동생, 조카 등이 크게 놀래서 나와 "왜 우느냐"고 물으니 건리개가 "선달님이 어제 밤에 연향과 가까이 했다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대답을 듣더니 건리개의 어미 또한 울었다. 괴이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연향은 당창(매독)에 걸렸습니다"라고 답했다. 건리개와 내가 모두 낙심하고 밤을 꼬박 새웠다."
매독 걸린 기생과 성관계한 다음날 다른 기생을 처음 찾아가서 당일 또 성관계한 것이 나온다. 춘향전만 봐도 관기의 딸이라고 기생은 세습이니 수청을 들라는 내용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게이샤와 많이 비교되는데, 애초에 게이샤는 가무만 하고 그래서 특정 예술 하나만을 죽도록 파기 때문에, 기생처럼 만능은 아니었다. 현재도 게이샤가 되려면 고등학교 교육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니,
더 어릴 때부터 게이샤 준비를 했던 옛날의 경우, 학식은 더 기대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아이러니하게 기생에 대한 지식 부족과 일본에서의 미화로 인해 기생과 게이샤 이 둘의 수준에 대한 이미지는 뒤집혀도 너무 뒤집혀버렸다.
물론 게이샤도 위의 각주에서 보듯이 마냥 좋은 이미지는 아니다.
애당초 게이샤들도 유녀에서 갈라져나왔고, 에도 막부 시대에는 외모 문제로 유녀가 될 수 없거나 퇴물이 된 유녀가 전직하는 직종에, 오이란을 띄워주기 위한 연주자로 현대식으로 비유하면 세션과 백댄서 취급이였다.
전통이나 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유녀처럼 가족들의 빚을 대신 갚는다는 목적(도제)으로 인신매매로 들어온 자들이 상당수였으며, 게이샤가 메이지 덴노의 치세부터 인기를 끌자 매춘 금지 문제를 어기고 음지에서 게이샤의 후원자들이
성접대를 강요하는 경우가 늘어나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실은 일본에서도 정부에서나 게이샤를 전통 문화라며 띄워줄 뿐이고, 통상적인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그냥 접대부 취급이다.
기생과 게이샤만 아니라 전 세계의 여성 예능인들은 좋게 포장해도 결국 접대와 유흥이 주 목적이었고, 신분조차 천민이였기에 매춘 문제와 성접대 문제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고,
직접적 매춘이 안된다면
후원 개념이랍시라고 정부나 애첩으로 삼아 빼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공식 혹은 실제로 몸을 팔지 않았다 해도 그래봤자 창녀나 다를 게 없다며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기는 하고, 기생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이런 인식이 있었다.
공식적으로 성매매는 하지 않았을지라도 성적으로 착취당한 것은 마찬가지가 아니냐는 논리에서인데,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그 시절을 비판하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넷 우익 같은 부류들이 거꾸로 악용할 위험이 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성매매의 개념을 넓게 잡아 버리면 섹시한 이미지로 활동하는 연예인도 졸지에 성매매 종사자가 된다. 성적인 이미지를 파는 것을 비판하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성희롱 악성 댓글을 정당화할 빌미를 제공한다.
또한 일반적인 서비스직 여성들도 넓은 의미에선 성매매를 한다는 억지 주장도 나올 수 있다. 과거에는 기생을 일컬어 웃음을 파는 이라고 했는데, 이게 서비스용 미소를 말하는 것이므로 오늘날의 내레이터 모델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
지금도 시골 어르신들은 잔칫집에서 축가 알바를 하는 사람들을 기생이라고 하시는데, 멸칭이 아니라 과거에 잔칫집에서 노래 부르는 일을 기생이 담당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일본의 유녀 문화와 유녀의 상위 계급인 오이란은 조선의 기생 문화와 동일시 되기 힘든데, 기생은 본문에 서술된 것처럼 매춘금지의 영향으로 단순 공인 매춘부는 아니었기 때문.
그러나 일단 예능과 가무를 하고 접객을 한다는 공통점이 많아 일본 사극을 한국식으로 리메이크를 하면 오이란 및 게이샤(유녀)는 거의 기생으로 바뀌는데, 굳이 오이란을 현지화 내지는 그나마 대응되는 기생의 계급은 이패기생이 적당하다.
이패기생은 음지에서 매춘을 한데다가, 이패기생부터 상류층을 손님으로 상대했기 때문이다. 구운몽의 등장인물인 계섬월과 적경홍은 작중 중국 출신이지만 창기로 묘사된 것을 보아 조선의 기생도 인식이 박했음을 알 수 있다.
19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있는 집안의 아들이 기생 출신인 여성과 결혼한 사례들이 적잖게 있었다.
심지어 기생 출신임을 모르고 결혼한 게 아닌, 잘 알면서도 결혼을 했는데, 이렇게 기생 출신인 여성과 결혼한 이들중 아직 살아있는 경우도 많다 보니 자기 친척들 중에 기생 출신이 있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기생나비의 '기생'은 이 문서에서 설명하는 기생에서 따온 것이지만 하필 생물 이름에 들어가는 바람에 다른 생물에 기생하는 습성이 있다는 뜻으로 착각하기 딱 좋다.
10. 창작물에서
한국의 사극이나 시대극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는 여성으로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신분이고, 다양한 인물과 관계를 설정할 수 있는 배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황진이 등 유명 기생들은 사극의 단골 소재이자 주요 배역이다.
여성용 전통모자인 전모가 현대에는 기생용 삿갓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중들에게 매력 포인트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전모를 쓴 모습이 기생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매김했다.
- 가담항설 - 백매
- 간신(영화) - 설중매
- 경성스캔들 - 차송주(한고은)
- 관상 - 연홍(김혜수)
- 기생충 - 충[58]
- 나와 호랑이님 - 가희(나와 호랑이님)[59]
- 녹두전 - 동동주,매화수,임오이,박열무
- 닥터 진 - 춘홍(이소연)
- 대왕 세종 - 초궁장(강경헌)
- 마피아42 - 기생 마담[60]
- 명당 - 초선(문채원)
- 바람의 화원 - 정향(문채원)
- 불멸의 이순신 - 청향(전익령)
- 블레이드 앤 소울 - 유란
- 성균관 스캔들 - 초선(김민서)
- 신기생뎐[61] - 단사란(임수향)
- 십이야(웹툰) - 나비, 월영화
- 야뇌 백동수 - 운심
- 야인시대 - 설향(허영란),애란(조여정)
- 오포졸 - 명월(조은숙), 초선(박진아), 황진희(강유미)
- 용의 눈물 - 봉지련(나경미), 보앵(이은주), 어리(유니)
- 장녹수(1995년) - 장녹수(박지영)
- 찔레꽃 그늘 아래 - 이선[62]
- 제5공화국 - 육군본부 및 수경사 인원들이 12.12 사건 직전 때 전두환이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하는 과정에서 기생을 불러 가무를 즐겼는데, 도중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 황급히 원대 복귀했다고. 물론 이 때 등장한 기생은 조선시대와는 달리 엄연히 일반인이며, 식당에서 고용한 인원일 가능성이 크며, 이들의 역할은 접근 권한은 이패에 가깝지만 이들이 했던 역할 및 기능은 일패에 가까웠다. 과거의 기생집이라기 보다는 요정의 형태였던 것. 당시 해당 요정을 경영하던 사람은 민 마담이라는 인물인데, 정재계의 접대를 도맡을 정도로 유명했다. 물론 민 마담이라는 것도 가명이었으며, 실제 성은 김씨였다고.
- 한중록(1988년) - 장미(최진실)
- 해어화(영화) - 소율(한효주), 연희(천우희)
- 황진이(드라마) - 황진이(하지원), 임백무(김영애), 기타 여러 기생들[63]
- 황진이(영화) - 황진이(송혜교)
- SNL 게임즈 - GTA 조선/GTA 경성/카스 2 임진왜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