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이 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근처에 소하, 장량, 한신같은 인물도 없거니와 한신인지 반란을 꾸미는 역적인지 구별도 안되는 본인이 토사구팽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리배들만 득실거리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럴땐 국민을 믿고 당대표가 국민 눈높이에 안맞는 이들은 다 속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재명은 강력하다는 것을 대내외에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대다수 민주당원및 지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부국강병을 이룬 강력한 고려 현종이다... 관용은 처벌후에 전쟁인 총선에서 이긴후에 하는 것이다...
주변에 휘둘리지말고 대대적인 숙청의 혁신공천을 계속하신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들은 제3자 배상이라는 친일 매국노 정권과 내수 경제를 파탄시킨 국민의짐에게 철퇴를 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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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인사차 GI 큰 자본주 사무실을 예방했는데, 전 한과세트가 아니고 책을 구정선물로 주시네요^^ 역사관이 같은 제 블로그를 꾸준히 보고는 계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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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진보주의자로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만약 한반도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역성혁명인 위화도 회군없이 고려가 800년이상 한반도를 지배했다면 역사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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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따아~~~ 역시 고구려 후예들답군...!!! 내가 볼땐 미국과 우리가 똥줄타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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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은 정말로 배반하려고 했는가...?? 고금이나 현대나 그 배반자들이 설 땅은 없으며 그들은 죽음뿐이다... 특히 국민을 배반한 정치인들은 새겨 들어라...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기원전 247년 ~ 기원전 195년)
전한의 초대 황제(재위: 기원전 202년 ~ 기원전 195년)로, 자는 계(季)이다.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다가 진나라에 맞서는 봉기에 가담하고서 진의 수도 함양(咸陽)을 함락시켰고, 한때는 관중(關中) 땅을 지배 아래 두었다.
항우(項羽)에 의해 기원전 206년 서부 한중(漢中)에 좌천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으나, 동진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서 항우를 토벌하고 전한을 세웠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며, 일반으로 고조(高祖)로 불린다.
고조는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군국제를 실시하였다. 무위를 숭상한 유학자 육가의 영향 속에서 무위를 실행하며 한고조 유방은 도교 정신을 매우 중시하였고, 황제와 노자를 지칭하는 황로사상을 이용하여 나라를 다스렸다.
사마천(司馬遷)은 진나라(秦) 말 전쟁이 많아 사회가 혼란하였으나 유방(劉邦)은 전략가 장량(張良)의 여유와 노련한 경영으로 마침내 한나라(漢)를 건국하는데 성공하였다라 평했다.
한신(韓信), 한삼걸(漢三杰)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 소하, 장량과 함께 한초삼걸이라 불린다. 유방의 진영에서 대장군으로 활동했고, 후에 제나라의 가왕(假王)이 되었다. 위, 제, 조, 초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으나, 훗날 ‘토사구팽’의 주인공으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초한쟁패기 시절 한나라의 초대 대장군이다. 당대의 군사적 상식을 파격적으로 뒤집고 연전연승한 중국사 최고의 천재 병법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젊었을 적엔 무능력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반진전쟁기에 항가군에 입대했지만 중용받지 못했다.
그러다 한왕 유방(劉邦)에게 귀부한 뒤 기재를 인정받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무수한 군공을 세워 유방에게 천하를 안겨주고 자신은 제(齊)왕과 초(楚)왕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멸망 이후 항우의 분봉(分封) 당시 파촉에 갇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한군을 한중에서 암도진창(暗度陳倉)으로 몰래 이끌고 나와 장한을 비롯한 삼진(三秦)을 멸하고 관중 땅을 평정하여 한나라의 기반을 마련했다.
팽성대전 이후 한나라가 멸망할 수도 있는 최악의 상황에서 오합지졸로 이루어진 3만의 별동대를 이끌고 위(魏), 대(代), 조(趙), 연(燕), 제(齊), 초(楚) 6국을 멸망시켜 유방이 항우를 꺾고 천하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공으로 전한 건국 이후 최초에 봉해진 7명의 이성왕(異姓王) 중에 한 명이 되었다. 괴철의 의견처럼 한신이 점령한 조나라와 제나라는 유방에게서 독립하여 천하삼분을 노려볼 법한 큰 나라였다.
유방과 여후가 한신을 견제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천하를 삼분하거나 유방에게 절대 충성하거나 둘 중 하나를 정확하게 해야 했는데 애매모호하게 있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현대에는 유방의 손을 들어 한신의 행동을 유방이 어떻게 더 참을 수 있느냐는 의견이 많다. 평가 항목에서 볼 수 있듯 고대와 중세에는 한신이 반역을 저지른 죄와 별개로, 유방이 한신을 토사구팽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가장 큰 죄인 반역죄에 엮여서 죽은 인물치고는 특이한 일인데 그만큼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한신의 활약이 절대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신을 통해서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널리 퍼졌다.
한신이 처음 만든 단어는 아니지만
토사구팽이라는 사자성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영포와 노관이 한신과 팽월이 죽은 것을 보고 자신들도 죽을 거라고 걱정하여 반란을 계획한 것으로 보아 당시에도 한신이 토사구팽당했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한신은 많은 표현을 만들어냈다. 불량배의 가랑이 사이를 지나가는 치욕을 참아 목숨을 부지하고, 초나라 왕이 된 후 그 자를 불러 돈을 내리고 용서하여 과하지욕(胯下之辱)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한신을 불쌍하게 여겨 밥을 주고 "당신에게 돌려받을 것은 기대도 안 한다."라고 말했던 동네 아낙네에게 왕이 된 후 크게 보답하여 일반천금(一飯千金)이란 고사를 만들었다.
소하가 유방에게 한신을 천거할 때에는 국사무쌍(國士無雙)이라는 표현을 받았다. 유방과 대화에서 지금도 자주 쓰이는 고사인 다다익선(多多益善)을 만들었다. 전략으로 적을 속이는 명수잔도 암도진창(明修棧道 暗度陳倉)이란 말을 만들었다.
병법 최악의 수이자 금기인 배수진(背水陣)을 성공시켜 배수진을 전략적 전술 또는 결사적 각오라는 의미로 재탄생시켰다. 항우와 마지막 결전인 해하 전투에서 항우를 사지로 몰아넣어 사면초가(四面楚歌)라는 말이 나오게 하였다.
한신의 생년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남지 않아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B.C. 247년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고제와 그 비슷한 세대인 소하, 장량, 조참 같은 제장 그룹보다는 어린 게 확실해 보인다.
천하통일 이후 시황제 치세 속(B.C. 221~B.C. 210)에서 각종 찌질한 일화를 남긴 회음 시절의 정황을 보면 그 시점 한신의 나이는 대략 20대 무렵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B.C. 209년 발발한 진승·오광의 난에 호응한 항량의 군대에 합류했을 때 나이는 대략 이립(30대)쯤에 접어들었지 않냐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B.C. 232년 출생한 것으로 알려진 항우보다 약간 연상이거나 또래일 가능성이 높다.
한신의 몰년인 B.C. 196년쯤엔 30대 후반~40대 전반 정도로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