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12.12 사태의 그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 조선조 500년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태조 이 성계의 요동정벌을 하지 않고 되돌아온 위화도 회군도 난 박 정희/전 두환의 5.16/12.12처럼 이제는 역성혁명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하여튼 늘상 외세에 시달리고 굴종과 굴욕의 역사를 겪어야만 했던 지난 천년이상의 한반도 역사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물론 고비때마다 그냥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기상과 이를 계승한 고려의 대외항쟁투쟁의 역사가 비주류로 흐르고 우린 언제부터인가 외세에 비굴하게 굴종하고 굴욕하는 저자세가 주류의 몸에 DNA처럼 베였다... 현정권의 외교처럼 말이다... 누구를 위한 세계화이고 민주주의고 외교인가...?? 난 민족 자존감과 국가의 자존심 없는 외교는 국민과 서민및 민초의 고난한 삶으로 이어져왔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일본대성토 6차보복전 시작]그 게소리 그만하고 대마도는 우리땅이니 내놓고 시작하자~~~ 일본 천황과 총리는 부산포로 건너와서 정신대 피해자들(강제징용자포함)한테 무릎부터 꺽으라고 했다아~~~
https://samsongeko1.tistory.com/10668
그리고 물었다... 우리 현대차를 7대 사는 일제차를 아직도 사고 있는 토착왜구들과 매국노들이 있는지를 말이다...!!!!!
http://blog.daum.net/samsongeko/8907
[대일본성토 4차 포문 시작]지난주 재경팀장에게 지시, 임직원들의 일제차 폐차시 차량 무상교체지원하라고 했습니다...!!!
http://blog.daum.net/samsongeko/8445
게코(Gekko) - 암튼 주변 나라들이 우리를 호구로 아는구나~~~ 일본 게자슥들은 개소리 그만하고 그 역사적으로 우리 땅인 대마도도 내놓으라고오~~~~
http://blog.daum.net/samsongeko/8298
[고석문화재단에서 관련 비영리단체 후원/작업(?)중]게코(Gekko)의 논평 - 일본 쪽바리들 개소리 그만하고 그 대마도(쓰시마섬)나 내놓는다...!!!!!
http://blog.daum.net/samsongeko/8296
(소변보러 일어났다가)고 박 정희 전대통령... 조국 근대화의 공로를...... 와아하~~~ 난 민족 고대다...!!!
http://blog.daum.net/samsongeko/8271
게코(Gekko)의 논평 - 미국, 니들은 참견마라... 해방이후 20년간 일본편 든게 이 근본적 사단의 원인이니깐이~~~
http://blog.daum.net/samsongeko/8249
이런게 핵포기에 대한 진정성...?? 배는 고파 자존심은 버려도 자존감은 살리겠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8037
아따아~~~ 역시 고구려 후예들답군...!!! 내가 볼땐 미국과 우리가 똥줄타게 생겼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951
NICA 공식논평 - 이건 대한민국에 대한 선전포고다...!!! 정부는 일본과 당장 외교단절한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901
NICA 공식논평 - 일본 쪽바리들,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쓰시마섬도 내놔라~~"역사적으로 대마도도 원래 우리 땅이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809
한 놈은 방위비 더 띁어가려하지 한 놈은 우방이라는 놈이 깐죽거리지~~ 난 대한민국이 강력한 이스라엘 외교전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725
고려-거란 전쟁
993년, 1010년, 1018년(또는 1019년)에 고려와 거란의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경제·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교류가 빈번하게 행해졌다.
특히, 거란과 고려의 3차에 걸친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친 사건이다.
993년(성종 12년) 10월 소손녕(蕭遜寧)의 침입, 1010년(현종 1년) 11월 강조(康兆)가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요 성종의 직접 침입, 1018년 12월 소배압(蕭排押)의 침입의 세 번의 큰 전쟁과
1015년 소적렬(蕭敵烈)의 흥화진(興化鎭) 내침까지를 통틀어 말한다.
배경
거란과의 관련은 고구려 때부터이지만 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이 때에는 거란도 부족분열 상태로부터 통일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한 뒤, 916년 요나라(遼)를 건국하였다. 922년(태조 5년) 야율아보기는 고려에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 태조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이는 한편 거란에 대해서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 부르고 적대적 태도를 보이며, 북진 정책을 실행하였다.
942년 요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고려 태조는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를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졌고, 그 뒤에도 계승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광군(光軍) 30만명을 양성하였고,
광종 때에는 서북쪽에 맹산·숙천·박천·문산 등 청천강 유역과, 동북쪽으로는 영흥·고원 등에 성을 쌓거나 군사시설을 갖추고, 또 광군을 광군사(光軍司)로 개편하는 등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고려는 송나라가 건국한 이후, 송과 화친정책을 실시하였다.
한편 979년에 통일을 이룩한 송나라가 985년(성종 4년)에는 고려에 한국화(韓國華)를 보내어 거란 협공을 제의하였다.
또한 송나라는 압록강 중류에 세워진 발해유민의 독립국가 정안국(定安國)과 해상을 통해 내왕하며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고려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요 태종이 오대의 첫 번째인 후량과 후당의 싸움에 끼어들어 연운십육주를 얻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끝내 중국 남침에 실패하고 급사한 뒤, 수구파와 진보파의 대립과 정치싸움으로 고려와 겨룰 여유가 없었으나, 982년 이후 정국이 안정되었다.
요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 진화(振化), 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을 준비하였다.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성종 12년) 10월 요나라의 동경유수 소손녕(蕭遜寧)이 약 8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 전쟁이다. 993년 5월과 8월의 두 차례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으로부터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통고가 있더니,
10월에 소손녕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朴良柔)와 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成宗)이 친히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다.
하지만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으며, 조정에서는 이몽전(李蒙戩)을 청화사(請和使)로 하여 내침의 진의를 타진케 했으나, 소손녕은 항복만 요구할 뿐 명분없는 침입이었다.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임금께서 서울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항복론)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할지론) 등의 의견이
나왔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서희와 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침략하여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바다를 건너 송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을 잘 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그러자 서희는 이에 대해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이다.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 안팎은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약하고 교활하게 거짓말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구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
1010년(현종 1년) 11월 요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고려를 침략했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관계를 맺고, 목종을 대신해 그 사이에 나온 아들을 왕으로 잇게 하려하자 서북면도순검사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세력을 숙청한 뒤에 확김에 목종까지 폐위해버리고 대량원군 왕순을 옹립한 뒤에 조정을 장악하게 된다. 이를 강조의 정변이라고 하는데 요나라는 이 정변을 구실로 삼아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이유로
40만 대군을 일으켜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거란이 침략한 진짜 의도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막아 고려와 거란간의 관계를 다시 확인시키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거란군은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성주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했다.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로 삼아 30만 군을 거느리고 통주(通州)에 나가 막게 했으나 크게 패배했고 요 성종은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거란은 이어 곽주, 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시켰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다시 항복론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거세졌으나 강감찬(姜邯贊)의 반대로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신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 구주, 통주, 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는 도중 구주 등에서 양규와 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제3차 고려-거란 전쟁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거란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찔렀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후퇴하지 않고, 고려군의 이어진 공격을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1](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 전술로 인해 식량 공급에도 큰 차질을 빚었다.
소배압은 다음 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2](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인해 패퇴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3](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거란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2천여 명에 불과하였다.
전쟁결과
1019년 전쟁은 끝이 났으며, 이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대신, 요나라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게 되었다.
요나라는 고려 침략에 실패하여 요동에서의 지배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고려가 있는 한 송나라를 쳐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송나라-요나라 3국의 대등한 세력 균형이 형성되었다.
한편 고려도 서북지역에 커다란 피해를 입었으며, 북진정책을 계속 추진하기도 힘들어졌다. 아울러 고려에서는 요나라와 여진족을 막기 위해 흥화진 북쪽의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과 개경 수비를 위해 나성을 쌓았다.
한편, 민간에서는 요나라가 멸망한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종합)'고려 거란 전쟁' 본격적 전쟁… 김 동준, 이 원종에 "꼭 승리하시오"
'고려 거란 전쟁' 25일 방송...
'고려 거란 전쟁'에서 이원종이 본격적으로 거란과의 전쟁을 준비했다.
25일 오후 9시25분 방송된 KBS 2TV 토일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극본 이정우/연출 전우성, 김한솔) 5회에서는 황제 현종(김동준 분)이 거란과의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이날 현종은 "역신 강조를 처단하기 위해 황제 폐화께서 몸소 40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 고려를 정벌할 것"이라는 거란의 사신의 말을 듣고 강조(이원종 분)를 처단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를 들은 강감찬(최수종 분)은 무릎까지 꿇으며 "일이 잘못되면 폐하의 목숨까지 위태로워 질 것"이라며 현종을 설득했다. 그럼에도 현종은 단호히 그의 뜻을 굳혔다.
이후 현종은 강조를 불러 "오로지 고려를 위해 벌인 일이라면 이 고려를 위해 경의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명했다. 현종의 한마디에 무장한 내관들이 들어와 강조의 목을 향해 칼을 뽑았다.
이어 현종은 "경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경이 책임지고 이 난국을 타개하라"며 계속하여 강조의 목숨을 요구했고 이를 들은 강조는 "폐하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는 "이 자리에서 죽진 않겠다"고 대답하며 "소신이 죽어야한다면 고려를 위해 싸우다 죽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음날 어김없이 거란의 사신이 찾아왔다. 현종은 사신에게 "고려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고 전해달라 했지만 사신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신은 또 다시 "역신 강조를 처단해 황제의 대의를 널리 펼쳐보일 것"이라고 전했고 이에 강조는 왜신을 불러세웠다. 강조는 "그럼 지금 내 목을 가져가라"며 사신에 칼을 건넸다.
칼을 받아들지 않는 사신에 강조는 "날 베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는게 거란의 황제가 아니냐"며 사신을 다그쳤다.
이에 왜신은 "나는 그저 폐하의 말을 전하는 사신이다", "대의는 황제 폐하가 실현할 것"이라고 했다. 강조는 사신에 "거란이 진정 원하는 것이 내 목이냐, 전쟁이냐"고 물었다.
이에 사신은 대답을 하지 않고 강조를 만류해달라고 현종에게 부탁하지만
현종 역시 사신에게 "질문에 답하라"고 명했다. 사신은 "답하지 않겠다"며 "고려의 궁과 신하들이 황제 폐하를 모욕하였음을 낱낱히 고할 것"이라며 물러났다.
강조는 전쟁을 준비하겠다며 현종에게 동원령을 내려달라고 부탁했고 이후 현종에게 출정 소식을 알렸다.
현종은 강조에게 부월을 하사하며 "꼭 승리하시오", "온 고려의 백성들을 구한다면 한 명의 황제를 시해한 사실은 모두 사라질 것이오"라며 강조에게 잘 싸워달라고 부탁했고 이에 강조는 눈물을 흘렸다.
한편 압록강을 건너온 거란의 사신은 "순순히 성문을 열고 황제 폐하를 맞이하면 폐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그대들의 목숨을 모두 보전해줄 것이오"라며 고려에 항복을 권했지만 양규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사신은 "흥화진에 있는 자는 아무도 살아남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양규는 "그럼 거란군 역시 전멸할 것이오"라고 받아쳤다. 이 소식을 접한 거란은 "한 놈도 살려두지 말라"며 고려를 향했고
본격적인 고려 거란 전쟁이 시작되었다.
뉴스1 강 현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