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차려준 일요일 특식 볶음밥과 미역국, 겉절이에 잘 먹고 세 아들놈들과 "태극기 휘날리며" 보고 있네요...
올해 태어난 늦둥이는 안았고요^^ 아내는 뒷정리중입니다... 자주 국방, 자립 경제, 자주 외교라는 말중에 경제는 그런대로 올라셨는데 국방/외교는 여전히 종속국 신세라는 생각에 이 글 올리고 다시 [특집영화]나 보죠...
영화속 그 대사도 생각나네요... "난 사상이 뭔지는 몰라도~~~(중략)~~~ 일제때는 나라라도 구할려고 싸웠지 이게 모야........"
1954년 7월28일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미의회 양원합동회의에 초대되어 연설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의 의회연설이었다. 미국에 의해 휴전을 당하고 그 반대급부로 한미동맹 결성을 얻어냈다. 대한민국 대통령 최초의 미국 국빈방문은 대한민국이 세계로 나간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점점 우리도 그렇지만 양키 코쟁이들도 강력한 거대 중산층 내수 소비자들을 가지고 있는 왕서방들에게 산업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안팔린다면 말 다한 것이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2541
1등도 아니고 2등도 아닌 주제에 대만문제에 내정간섭적 어쩌구저쩌구하고 중국의 앞마당에 사드를 설치해놓고... 지난 10년간 우린 수백조원의 중국시장을 놓치고 있고, 이제 본격화
https://samsongeko1.tistory.com/12508
중국에서 현재 한국산 불매운동이 점점 드세어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는가..!!!!! 삼성폰이 대소비시장에서 1%도 안되는 이유를 윤모지리와 국민의짐은 설명부터해라...
https://samsongeko1.tistory.com/12507
양키 게자슥들이 중국의 한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이유를 10년이상 앞당겨 놓았다...!!!!! 중국을 죽이는 것은 직접적이고 한국은 간접적으로 죽고 있는 중...!!!!!
[류 근일 칼럼 : 6.25 73주년 특집 ①]6.25 계기로, 한국은 반만년만에 세계로 나왔다...
6.25 통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됨] 만들어졌다6.25는 재앙이자 시험... 오늘의 대한민국 만든 원동력침략자가 일으킨 전쟁이 유발한 의외의 결과... 헤겔이 말한 '이성의 간계'가 구현됐다...
[편집자 주]
올해는,
△ 건국 75주년
△ 6.25 발발 73주년
△ 한미동맹 결성(강제 휴전 당함) 70주년.
전쟁은 국민을 [각성] 시킨다.
전쟁은 [나라와 국민의 정체성(Identification)]을 확립 시킨다.
침략·피침략, 적군·아군, 적·동지가 명확하게 구분되기 때문이다.
1948년 8월15일.
한반도 최초의 [자유민주공화국]이 탄생했다.
무려 반만년만.
[대한민국이란 나라]와 [대한민국 국민이란 의식]이 탄생했다.
하지만,
이를 제대로 깨우쳐
[근대국가 국민의식]으로 성숙하기엔
더 많은 시간·교육·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인구의 80% 이상이 문맹인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건국 2년도 안돼, 6.25가 터졌다.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됨]이란 의식은,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남침을 막아내는 전쟁을 통해,
압축적으로 그리고 혹독하게 단련되어,
단단하게 익어 갔다.
서구 근대국가들이 수백년 걸려 이룬,
[자유민주주의 공화국 수립 + 산업화 + 세계 시장경제 체제 + 정보화 = 현대 문명국가]를 우리는 압축적으로 해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뤄낸 이런 문명사적 성취를 자극한 게 [전쟁 6.25].
이런 차원에서,
[전쟁 6.25]의 의미를
3회에 걸쳐 집중해부·분석한다.
···································································
■ 6.25의 양면성
6.25 남침은 신생 대한민국엔 재앙이었다.
그러나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남침]은,
이를 계기로
[한·미 동맹+유엔지지 확보]에 성공한 한국인을 한반도란 조그만 동굴 속에서 뛰쳐나와
광활하고 선진적인 근대 자유민주주의 해양문명권으로 차원 상승하게 만든 의외의 효과를 냈다.
특히 [전쟁 6.25 ]가,
전통사회 한국에 가한 [네 가지 충격]은
[봉건 왕조+일제 잔재]를 더욱 역동적으로 해체하고,
대한민국의 [근대 국민국가다움]을 한층 더 촉진했다.
■ 근대화 군부(modernizing soldiers)의 충격
[전쟁 6.25]는,
전쟁 수행 군대의 비중을 대폭 증대시켰다.
전통사회 한국 안의 가장 근대화한 조직이 된 군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전근대적 유산을 급속히 청산했다.
군·경찰·행정공무원 등 전문가(expertise)와 사업가의 경영 효율성을 중시했다.
군은,
[근대적 나라 만들기(modern nation building)]의 기수로 떠올랐다.
■ 서양 문물제도(文物制度)의 충격
주한미군 등 유엔군 주둔으로,
서구 문명과 근대적 사고방식·제도·교육·대중문화가 물밀 듯 들어왔다.
주자 성리학과 토착 민간신앙들이
양이(洋夷)·남만(南蠻)이라 배척하던
‘서양 오랑캐’의 선진 문물이,
전통사회 한국인들의 일상에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빅 뱅(Big bang)이었다.
△ 한·미 동맹 △ 서구적 세계관·가치관·문화
△ 미제(美製) 상품 △ 원조물자
△ 동·서 인적 만남·접촉·교류가
전통사회 한국인들의 의식을 흔들어 놓았다.
■ 개인·개인주의의 충격
[전쟁 6.25]는,
가부장적 대가족을 해체하고,
△ 개인주의 △ 보편주의 △ 메리트 주의를 불러왔다.
<필자 註>
개인·개인주의 : 근대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인 개인 ‘나’의 탄생.
보편주의 : 글로벌 기준에 맞추려는 것.
메리트주의 : 개인의 경쟁력을 중시하는 것.
이 모두는 근대 문명의 필수적 요건.
■ 프로테스탄티즘의 충격
[전쟁 6.25] 기간중
북한에서 온 개신교 신자들·주한 미군·선교사들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엔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 신앙이 확산했다.
청교도 정신은,
자본주의적 이윤추구를 ‘좋은 것’으로 규정하고,
천직(天職)을 중시한다.
이 에토스(기풍)는,
한국 사회 전반에 근대의 DNA를 파종했다.
■ 이승만·박정희, 6.25 4대 충격 극복에 성공하다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은,
[전쟁 6.25]가 불러온 위와 같은 군사·정치·경제·사회·문화 충격들을 수용해,
한국을 오늘의 자유민주주의 글로벌 중추 국가로 만든 초석을 놓았고 기둥을 올렸다.
그들의 [대한민국 만들기]는,
△ 성리학적 봉건 잔재·쇄국주의를 타파하고
△ [조선+일제] 유산을 도태시키고
△ 북·중·러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의 ‘적실성 없음’을 반증(反證)한,
‘한강의 기적’이었다.
이것이,
6.25 남침 당사자들(스탈린 + 모택동 + 김일성)이 휴전선 이남에 ‘바라지 않았던’,
전화위복의 역설적 효과(헤겔이 말한 이른바 '이성의 간계')였다.
<필자 註>
참고 문헌 :
Eui Hang Shin, Professor of Sociology,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Choong Nam Kim, POSCO Fellowship Coordinator, East-West Center (Hawaii)
<한국전쟁과 기독교> 윤정란, 숭실대 교수, 한울 출판사 2015
[류 근일 칼럼 : 6.25 73주년 특집 ②]6.25 계기로, 북한은 동굴로 들어갔다...
전쟁 6.25, 반만년만에 한반도에 문명사적 변화 불러왔다이승만, 한반도 남부를 세계로 나가게 했다김일성, 한반도 북부를 동굴 속에 계속 가뒀다...
■ <김씨조선> 왕국, <이씨조선> 왕국 나쁜 유전자만 계승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6.25 남침을 자행했다.
그러나 그의 계산은 빗나갔다.
그의 왕국은 그가 죽을 무렵 흉가처럼 망가졌다.
인민 200~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6.25 남침을 포함한 그의 한반도 공산화 기도는 실패했다.
‘이밥에 고깃국’ 장담도 헛것이었다.
한국은,
1953년의 휴전 직전에 맺은 한·미 동맹 등
성공적인 글로벌 외교와 대외개방으로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김일성은 이와 정반대의 길로 갔다.
그는 동맹외교에서도 실패했다.
6.25 당시 그는 이미 소련·중국에 실망했다.
결과,
그는 국제연대 아닌 ‘주체 조선’으로 역주행했다.
그의 ‘주체’는,
내부적으로는 [조선 시대 + 천황제 + 군국주의],
대외적으로는 자폐적 고립주의를 말했다.
■ 세계로 나간 이승만 vs. 동굴로 숨은 김일성
김일성이 6.25 전후에
어떻게 소련·중국 두 공산 종주국 외교에 임했는지에 대해,
스탠포드 대학 스콧 스나이더·조이스 리 두 교수는,
논문 <북한 정치·경제에 미친 한국전쟁의 영향>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쟁 전에 김일성은
소련·중국에 대한 충성은 공산주의자로서 합당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몇 가지 사유로 소련·중국을 믿을 수 없다고 느꼈다.”
“소련은 처음에
‘북한을 미국에 빼앗기는 한이 있더라도(at the cost of North Korea)’
전쟁에 개입하길 주저했다.
김일성은 소련이 유엔 안보리 파병 결의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에도
크게 실망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휴전을 밀어붙이려 했을 때 분노했다.
그러나 그는 실속 있는 반항에 성공했다.
그는 휴전에 동의하는 대가로,
한·미 동맹을 얻어냈다.
반면에 김일성은,
중·소 분쟁으로부터 발을 빼려 했다.
소련·중국과 멀어지면,
국내에서도 친소파·친중파를 숙청할 수밖에 없다.
이 피비린내 나는 상황에서,
일선 실무자들이 경제 합리성 같은 것을 챙길 여유란 없었다.
북한 관리체계가 녹 쓸기 시작했다.
일본 고베 대학 기무라 마쓰히코 교수는
그의 논문 <북한 경제위기의 근원>에서
‘주체’ 정치는 당연히 △ 비효율 △ 경직성 △ 노동 인센티브 상실을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그가 인용한 김일성 연설은 말한다.
“공장·기업소 석탄이 창고에 있지 않고 밖에 쌓여 비를 맞고 있다”
“근래 알곡 생산이 줄어들었다.
농장 관리자들이 나태해서다.
앉아서 지시나 내리고 있다”
“우리에겐 물적 기반과 노동력은 충분하다.
관료적이고 보수적인 자들이 권한을 쥐고 있는 게 문제다”
■ 한반도 북부는 반만년 지나도 동굴 생활
이건 뭘 말하는가?
(1)
관리가 없었다는 뜻이다.
중앙통제 계획경제라지만,
실제론 지방·기업소·공장마다 제 자리에서 자급자족하다시피 했다.
지리멸렬이었다는 뜻이다.
(2)
생산과 소비 사이에서 생산품이 유실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생선을 잡아서 보관했다가 먹기 전에 다 썩어버렸다는 것이다.
관리의 개념조차 없었다는 말이다.
■ 네안데르탈인으로 퇴화한 김일성 일가
이 모든 실패는 그러나,
김일성 그의 책임이다.
그가,
△ ‘자주’란 허울의 외교적 고립
△ 순혈주의 △ 자립 경제 아닌 자해(自害) 경제
△ 피의 숙청과 공포정치를 했기에,
복지부동 관료주의가 생겼다.
관료주의·보수주의의 원인은 그 자신이다.
김일성이 이런 퇴화(退化)의 길로
북한의 정치·경제·문화를 끌고 간 것은 결국,
6.25 남침 기간의 소련·중국에 대한 실망을,
세련된 국제정치적 기량으로 극복하지 못한 채,
폐쇄적인 동굴속에 파묻혀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어라” 한 탓이었다.
그는 그걸 자주·자위·자립이라 포장했지만,
실은 그것은 호모 사피엔스에서 네안데르탈로 역주행한 식이었다.
■ 한반도 남부를 세계·현대문명으로 이끈 이승만
북한 내부에는 다소 유연한 경제적 대안을 주장한 계열(연안파)도 있었다.
이때마다 김일성은 이견(異見)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다른 대안이 나오려야 나올 수 없는 북한의 정치 상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 미국과 의견이 다를 때는 화도 내고
△ 도발(반공포로 석방)도 하고
△ 흥정(give and take)도 하며,
자기 뜻을 관철해나갔다.
이게 외교다.
한반도는 고립적으로 나가면 살 수 없다.
진영 선택과 편짜기를 잘해야만 살 수 있다.
<필자 註>
참고 문헌 :
, Scott Snyder & Joyce Lee, Stanford University
, Matsuhiko Kimura, Kobe University
뉴스데일리 류 근일 논설고문 전 조선일보 주필(3회 특집에 한 편이 더 올려질거 같은데 이 보수 우익 꼴통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듣죠... 들을만하면 이곳에 마저 붙혀 올려놓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