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점심은 소불고기네요... 중년에 근육량이 줄어드는 당뇨/고혈압 지병에 요즘 어린 아내가 제 근육량에 무척 신경쓰고 있는 중이고요... 전 아침부터 겉절이에 맛들여 이곳을 집중공략...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이후는 "인천상륙작전" 보고 있는 중입니다... 글 올리고 마저 보죠... 그 6.25동란이후 대한민국 민초들이 걲었던 애환을 그린 영화 "국제시장"도 마저 보고 싶고요...
6.25 전쟁 73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23일 금요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의 모습.
탱크를 타고 이동하는 북한군.
엄마 잃은 피란민 어린이들(1950년 10월 21일, 26일 두 차례 AP보도). 한국전쟁의 최악의 비극을 담은 이 사진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에서 배수로를 따라 난 길 위에 언니는 어머니의 몸 옆에 웅크리고 있고, 동생으로 보이는 아이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고 있으나 이미 차가운 시신이 되어 아이를 돌 볼 수가 없다.
물자보급을 위해 인천항에 정박한 연합군 전차상륙함(1950년).
휴전 협정에 서명하는 마크 클라크 전 유엔군 총사령관의 모습.
"오빠는 심술쟁이야아~~~ 오빠는~~~" 역사공부, 6.25 동란은 양키 코쟁이들이 애치슨 라인만 설정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골육상쟁이라는 것이 정통 진보주의자인 내생각
https://samsongeko1.tistory.com/12545
게코(Gekko)의 논평 - 그 맥아더가 만주에 왜 원자폭탄을 투여하자고 했을까..... 해방이후 그가 저지른 모든 친일 행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11164
문대통령을 개똥으로 만들어놓은 양키 코쟁이들아, 그렇게 북한의 인권이 걱정됐으면 6.25 동란때 만주에 원자폭탄 두 개를 떨어뜨려야 했었다...!!!!! 그리고 5.18때는 뭐했냐~~~
그리고 제목에 넣을 수 없어 부언한다...
"요즘 역사 교육이 부실해 말이다... 내 하나 알린다... 미국이 대한민국을 공산화로부터 막았다는 주요 독재자들을 여전히 신봉하는 보수 우익 꼴통의 말 말이다...!!!!! 이거 사실이 아니다... 해방이후 미군정은 친일파와 야합하여 대한민국 정부를 출발부터 삐뜰어지게 한 것도 모자라 1948년이후에는 남한을 그들의 방어라인에서 뺐다... 이 말은 북한이 처들어와도 막지 않겠다고 그 '에치슨 라인'이라는 것을 설정했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민족 상쟁의 비극 6.25 동란이 일어나자 허겁지겁 공산주의자들한테는 지기는 싫었는지 아니 지들이 건국시킨 대한민국 남한이 공산화되는 것을 막을려고 허겁지겁 다시 개입한다... 그리고나서 맥아더 장군부터 아예 중공군의 개입을 막는 만주에 원자폭탄 투여로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냅둔채 거부하는 다시 버벅거리더니 이 승만도 거부한 휴전협정을 강요했다... 그리고 우린 이산가족의 아픔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베트남 파병을 강요한 것도 양키 코쟁이들이요... 국내 내전상황의 요즘 동남아 어떤 나라의 민주화 시위처럼 일어난 5.18때도 그들은 일언반구도 없이 암묵적으로 리틀 독재자 전 두환편을 들었으며 그 이후로는 내내 일본만이 중요했다..."
내 다시한번 이야기한다...
전국민들이여, 요즘 양키 코쟁이들의 행태를 보라.... 전체 수출의 25%가 넘는 중국 경제와의 중요한 접촉을 가진 대한민국의 위치를 망각한채 지들편 안든다고 현재 양키 코쟁이들은 다시한번 주권국가 대한민국을 각종 사안으로 겁박중이다...
난 우리가 진정으로 독립해야할 곳은 경제/산업의 일본 쪽바리 이상으로 정치/외교에서의 미국로부터의 독립임을 강조한다...
[정전70주년①] 북한 야포로 시작된 6.25전쟁 발발부터 정전협정까지... “잊어선 안 될 역사”
낙동강 뺀 전선 北에 점령당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 역전...
전쟁 1년, 이후 2년 휴전협상...
“종전 아닌 정전, 北 경계해야”
전쟁은 분리를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 연인 간, 안식처에서 피난처로, 삶에서 죽음으로 영원한 이별을 맞게 한다. 한국에서도 70여년 전 동족 간에 전쟁이 벌어져 많은 이들이 고통받았다.
3년여에 걸쳐 있어진 비극에는 국군 62만여명과 유엔군 15만여명 등 77만여명이 전사, 부상, 실종됐고 이재민은 1000만여명에 달했다.
가족을 잃거나 헤어진 사람들은 아직도 전쟁의 상흔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종전이 아니라 현재 정전 중이다. 본지는 정전 70주년을 맞아 전쟁의 발발 및 과정과 UN 연합군의 도움,
참전 영웅들이 경험한 전쟁에서 참혹함을 돌아보고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는 기획기사를 송고한다.
“후손들은 호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과 헌신을 기억하고 정말 감사하는 마음 가져야 해요. 6.25 전쟁의 역사를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국사를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절대 그래선 안 됩니다.”
6.25 전쟁 73주년을 이틀 앞둔 지난 23일 금요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은 방문객들로 북적였다. 자신을 월남전 참전용사라고 소개한 양태석(가명, 79)씨는 전쟁의 참혹함을 역설하면서 “힘이 있어야만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전쟁을 직접 경험한 노인들부터 외국인 관광객들,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과 젊은 청년 세대까지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호국영령을 기렸다. 다음달 27일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129일 동안 지속됐었던
6.25 전쟁을 멈추기 위해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 본지는 6.25 발발과 정전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번호에 다루고자 한다.
◆ 북한군 기습 침공 3일 만에 서울 점령...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의 분단에서 비롯됐다. 한국은 1945년 일본의 점령에서 해방됐고, 38선을 경계로 두 개의 독립된 점령 지역으로 나라가 분단됐다.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점령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야포가 남쪽을 향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전쟁은 시작됐다.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은 북한이 남한을 기습 침공한 것이다.
당시 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기 때문에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전원이 외박을 나가 있다가 오후에 복귀한 것으로 전해졌다. 38선으로부터 불과 40㎞ 남쪽에 위치한 서울은 곧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
당시 국군은 열세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웠으나, 의정부를 거쳐 진격한 북한군에 의해 서울은 전쟁이 발발한 지 3일 만에 점령됐다. 전쟁 개시 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하며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대부분을 점령했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T-34전차 242대, 자주포 176문, 공군기 211기 등 많은 공격용 무기를 보유했으나,
국군은 전차는 물론 자주포와 전투기 한 대도 없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27일 새벽 급히 대전으로 정부를 옮기면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한강대교를 폭파했다.
당시 정부는 국군이 인민군을 격퇴하고 서울을 방어하고 있다며 서울시민에게 불안해하지 말고 서울에 남아 있도록 유도했다.
‘서울을 사수한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었던 서울시민들은 강을 건너지 못한 채 무방비 상태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북한군 치하에서 극도의 불안과 공포를 겪어야만 했다.
◆ 전국 약 10만명 전쟁고아로 남아...
서울은 한반도에서 가장 치열한 전장 중 하나였다. 철수와 탈환이 반복되면서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철도시설이 집중된 용산지역은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한 미군의 폭격으로 초토화됐고, 서울의 중심부인 중구와 영등포 일대는 치열한 시가전으로 수많은 공장과 건물이 파괴됐다.
당시 약 170만명에 이르렀던 서울 인구 중 7%에 해당하는 약 13만명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서울시 총 주택 19만 1260호의 29%에 해당하는 5만 5082호가 파손된 것으로 추산됐다.
서울시민은 3년여 전쟁 기간 피난과 귀향을 반복하며 고된 삶을 이어나갔다. 특히 1951년 1월 4일 북한군과 중공군이 재차 서울을 점령하기 직전에는 매서운 겨울 추위 속에서 80만명 이상의 서울시민들이 한강을 건너 남하했다.
피난길 와중에 폭격과 강추위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목숨을 빼앗겼으며, 전국적으로 약 10만명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전쟁고아가 됐다. 피난지에 도착한 이후의 삶 역시 비참했다.
한꺼번에 피난민들이 몰려든 상황에서 제대로 된 피난민 대책은 강구되지 못했고, 수용시설과 구호양곡 등은 턱없이 부족했다.
◆ 유엔군 참전과 중공군의 인해전술...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바로 다음날인 6월 26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해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안보리는 6월 28일 북한의 무력공격을 물리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문을 채택했다.
7월 7일 열린 안보리에서는 한반도에서 유엔이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미국에 최고 지휘권을 줬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됐고, 유엔군 파견이 결정됐다.
이후 미국의 참전이 결정되자 유엔 회원국의 지원이 잇달아 16개국의 전투 부대와 6개국의 의료 지원 부대가 참전했다. 북한의 남침에 국제사회가 함께 대응하며 연합방위 체제를 구축하게 된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있던 전세는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역전됐다.
국군과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서울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고 9월 28일 북한군에 피탈당한 지 3개월 만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후 맥아더 장군의 지휘 하에 유엔군은 반격에 나서 평양을 넘어 북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하지만 10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일진일퇴의 공방이 이어지며 전쟁은 다시 혼란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피난을 가지 못한 군인 10만명과 민간인 10만명이 흥남지역에 고립이 됐는데
이들을 부산으로 무사히 옮긴 작전이 그 유명한 흥남철수대작전이다.
30만명의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1.4 후퇴를 당했다.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중국군, 북한군과의 전면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유엔군은 1951년 3월 15일 다시 서울을 되찾았고 이때부터 소련의 개입으로 38선 부근에서 서로 치고받으며 전쟁이 이어졌다.
◆ 전쟁 1년 후 교착... 정전협정 체결...
전쟁 초기 1년간 전선을 크게 이동하면서 전투를 벌였지만, 나머지 2년은 교착 상태에서 휴전 협상의 기간이었다. 1951년 5월 말부터 미국과 소련은 막후 접촉을 통해 휴전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협상하던 와중에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해 피 말리는 전투가 계속됐고, 수많은 생명이 희생됐다. 협정의 체결 시점에 각각의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는 점령지가 휴전선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해 7월 초 제1차 본회담이 시작돼 난항 끝에 양 진영 간 현 접촉성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하기로 합의했다.
그 후 협상은 진척을 보이지 못했으나, 1952년 말 이 전쟁을 일찍 끝내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1953년 3월 초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자 휴전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전쟁의 조기 종결을 원했던 말렌코프가 스탈린을 이어 집권한 것이다.
이 승만 대통령은 북한과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는 맥아더의 주장에 적극 동조하면서 미국과 소련이 정전협정을 추진하는 것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미국과 소련 간 휴전 협상이 타결될 가능성이 커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기존 입장을 바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정전협정 체결에 동의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체결로 3년 1개월간의 잔혹한 6.25 전쟁은 끝이 났고, 남북한 모두 폐허가 됐다. 그 뒤로 70년이 흘러 2023년 정전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았다.
조 윤희 대한민국의 올바른 교육을 수호하는 방패 상임위원장은
“종전이 아닌 정전이기에 아직도 우리한테 완벽한 평화 국면이 자리 잡은 게 아니다. 통일을 이뤄야 한다는 큰 그림에는 공감대를 갖고 있다”면서도 “적에 대한 경각심과 평화만을 최우선 하는 것에는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 위원장은 이어 “6.25 전쟁만 해도 정말 많은 분이 목숨을 잃고 공산주의로부터 자유를 지키기 위한 희생을 감수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6.25 전쟁이 우리에게 안겼던 상처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 그는 학생들의 교육과정에서 6.25 전쟁에 대한 교육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조 위원장은 “교육과정에서 6.25 전쟁에 대해 별로 강조하고 있지 않다. 그러다 보니 6.25가 오늘날의 현재 자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얼마나 중요한 고비였는지에 대해 잘 모른다”며
“계기교육을 통해 아이들에게 6.25 전쟁을 새롭게 인식시킬 수 있도록, 그 중요성을 알리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지일보 유 영선 기자
뭔 씨알도 안먹히는 이야기를 하는가...!!!!! 대한민국 정부는 1919년 우리가 직접 세운 임시정부가 정통이다... 1948년은 친일파와 미군정이 야합한 어용정권이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11163
그 민족 정통성과 자주성..?? 토착왜구 2대 원조 박 정희는 한일협정을..... 1대 원조인 이 승만은 정전협정을..... 난 밤새 잠을 못잤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9009
(소변보러 일어났다가)고 박 정희 전대통령... 조국 근대화의 공로를...... 와아하~~~ 난 민족 고대다...!!!
http://blog.daum.net/samsongeko/8271
게코(Gekko)의 논평 - 미국, 니들은 참견마라... 해방이후 20년간 일본편 든게 이 근본적 사단의 원인이니깐이~~~
최근 사태를 보면서 근본적인 수정이 필요하다는 생각뿐...
자주 국방, 자주 외교를 지향하면서 무시할 수 없는 중국경제와 이제는 동맹보다는 우방이라는 관점에서 대한민국은 등거리 외교를 시작해야 한다... 일본과 달리 언제까지 이런 미국의 홀대와 무시를 참아야 하는가 말이다... 전작권 전부 찾아오고 우방의 기여에 대한 확실한 반대급부가 없는한 이제 미국을 달리봐야 한다. ‘이건 쓸모 없으면 이제 버리고 가겠다.‘는 심산인가...!!! 난 요즘 미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리 외교는 진정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한일 수교이상으로 북한과의 정전협상조차도 우리없이 진행한 것으로 이 권리부터 찾아야 우리가 원하는 한반도 통일협상 주도권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문 대통령의 임정이 정통이라는 발언을 진보주의자이자 가까운 미래 전국투자클럽연합회(NICA) 회장 내정자로서 120% 지지한다... 더이상 미국과의 트러블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우린 미국에게 할만큼 했다... 게코(Gekko)"
등거리외교[等距離外交]
어떠한 나라에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각 나라마다 동등한 비중을 두면서 중립을 지향하는 외교 정책
文 전 대통령, “이 땅에 다시는 전쟁 없어야”
문재인 전 대통령이 6·25전쟁 제73주년을 맞아 “참혹했던 동족상잔의 전쟁을 기념하는 이유는 비극의 역사를 뼈저리게 교훈 삼기 위한 것”이라면서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한다는 결의”라고 밝혔다.
문 전 대통령은 이날 SNS 공식계정에서 책 ‘1950 미중전쟁’을 추천하며 이같이 적었다. 이 책은 한국전쟁 70주년을 기념해 한국방송공사(KBS)가 방영한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엮어낸 것이다.
한국 전쟁을 미중전쟁의 관점에서 분석한 것이 특징이다.
문 전 대통령은 “‘1950 미중전쟁’은 한국 전쟁이 국제전이었음을 보여준다”며 “전쟁의 시원부터 정전협정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적인 힘이 우리의 운명을 어떻게 뒤흔들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라고 소개했다.
문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에 작용한 국제적인 힘이 바로 대한민국의 숙명 같은 지정학적 조건”이라면서 “이 지정학적 조건을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국가 안보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국민일보 이 병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