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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millionaire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아니 그 루비콘강을 건너기로한 그 남자...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대한민국은 공인된 진보쪽 독재가 필요...

B.S - 이번주도 수석 재산관리 집사님이 부재중인 관계로 대표이사님의 주요 저장된 글도 주요 블로그/SNS 대리 관리인(이 글의 주요 공유기인 대표이사님의 비지니스폰도 주말동안 보유중...)인 GI IR 실장 윤 숙영인 제가 올리겠습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 BC 58~50년 사이에 갈리아를 정복했고, 그에 대한 보고서인 《갈리아 전쟁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했으나 후에 두 사람을 물리치고 독재관(딕타토르)이 되어 전권을 손에 쥐었다.

 

 

전국민들이여, 아니 정치인들이여~~~ 진짜로 부동산 가격을 떨어뜨리고 싶은가...?? 그럼 영구 독재관을 추진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같은 대통령을 밀고 천도에 찬성한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10700

신축년 연초 동향들...?? 다 시끄럽고 강남 APT 주민들의 택배기사/라이더 갑질에 유명인들의 학폭 갑질등 온갖 있는 것들의 반칙과 특권의식만이 보일 뿐이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10680

그 기본소득이라... 영화 "공조"의 극중대사로 갈음... "사실 대한민국에 좌우는 없죠... 있는 놈와 없는 자라면 모를까~~~"​​​

http://blog.daum.net/samsongeko/9927

"노력보다 많은 富... 그 이상은 덤"

강성 진보주의자이자 강력한 민족주의자인 제가 생각하는 부는 이렇습니다... 누구는 가난한 이의 자식으로 태어나고요... 그 누구는 부자집 자식으로 태어남니다... 그 출발선부터 공정하지 않고요... 또 이 사회는 경쟁에서도 기회의 평등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 제가 이룰 모든 부/재산/돈은 제 능력과 실력이나 그 혁신에 의한 기여는 22.3%이고 나머지 77.7%는 그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 그리고 본의아니게 그들에게 제가 저지를 각종 반칙과 특권의식, 때로는 갑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대부분이 내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할때도 가능하면 더불어사는 세상의 발전에 쓰여야하고요... 그 사망전 부존재가 예상될때에는 남아 있는 재산도 90%이상 사회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부에서 거두들이는 상속세및 증여세를 통하여 말입니다... 전 이것도 다내고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있다면 다시 자식들에게도 10%만 넘겨줍니다... 잔여 90%는 다시 각종 후원과 기부처리합니다... 제 자식들은 그들의 노력으로 다시 시작해야죠... 그 부/재산/돈 물려줘서 그나마 사회적 폐악이나 저질르지 않으면 다행인데, 암튼 잘되는 경우를 별로 못봤고요... 제가 있는 것들과 재벌 대기업에 이빨을 드러내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안하니깐요... 이 말은 전국민들에게 해당합니다... 그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 본인들이 생각하는 성공 대다수가 이루어지거나 특히 사회취약계층들이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하게 당하면서 재산이 형성되거나 이루어지고요... 아니 본인들이 저지른 각종 반칙과 특권의식, 갑질에 의해서 본인들의 그 성공도 부도 이루어진다는 제 말 명심하시고요...

⚛ 오늘의 명언​

 

공정함이란 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지 않는 것이다.

– 톨스토이 –

 

 

동지에게 암살을 당하며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말을 남긴 사람, 루비콘 강을 건너며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고 말하며 돌이킬 수 없는 전진을 했던 사람,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로 정복의 감격을 표현한 사람. 카이사르에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카이사르의 시대는 어떤 시대였으며 그는 과연 어떤 일을 한 사람이었을까? 기원전 100년에 카이사르의 씨족인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카이사르는 공화정인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청년 시절은 순탄하지 못했다.

로마 시대 가문의 명예를 높이고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공직에 선출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의 집안은 귀족이기는 했으나 실제로 정치적 이점이 되지는 않았다. 귀족보다 하위 계급이었지만 법적으로 평민이 아니었던 탓에 평민들이 선출되는 호민관에 출마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로마에서 정치 경력을 쌓는 데 필요한 선거 출마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원로원 의석은 대부분 고위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정계 진출은 이래저래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열여섯 살 때 아버지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는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무장한 이베리아 군인

카이사르의 초년 시절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 후 혼란해진 상황에서 내전까지 일어나 나라 전체가 어수선했다. 카이사르가 정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4년에 마리우스 혁명에 참여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결혼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그는 급진파로 여겨지게 되었다.

기원전 83년 카이사르의 숙부인 마리우스와의 대립으로 밀려났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로마로 돌아와 혁명을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술라에게서 도망쳐 군대에 들어가 아시아 속주와 실리시아에서 복무했고, 기원전 78년 술라가 죽고 나서야 로마로 돌아왔다.

기원전 74년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가 로마에 반기를 들었다. 이 전쟁에 참전했다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군사 호민관으로 선출되었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Gnaeus Pompeius Magnus)와 함께 술라의 잔재를 없애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정계의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원전 69년 카이사르는 재무관(콰이스토르, 로마의 정치적 단계를 올라갈 때 맨 처음 밟아야 하는 관직)으로 선출되었고, 기원전 63년 대신관단을 통할하는 대신관(폰티펙스 막시무스)에 선출되었으며, 기원전 62년 집정관 다음의 지위인 법무관(프라이토르)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61년부터 2년간 스페인(히스파니아) 총독으로 복무하고 나서 기원전 63년 집정관(콘술)으로 선출됐다. 원로원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공화정체제는 로마 경계선의 확장과 고인 물이 되어버린 원로원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정치적 거두들과 제휴하면서 서서히 로마 공화정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했다. 기원전 62년 동방 원정을 마치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원로원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고, 제대군인들에게 급료로 지불할 땅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폼페이우스의 상황을 이용하여 카이사르는 당시 로마 시민의 영웅이었던 폼페이우스와 비밀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이에 더해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술라의 부관이었던 거상 크라수스를 설득해 제1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이 동맹은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와 결혼을 하면서 더욱 결속이 강화되었다.

 

폼페이우스

제1차 삼두정치 아래서 카이사르는 먼저 폼페이우스에게 필요한 일을 해주었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로마의 공유지를 분배하여 제대군인들에게 나누어주는 법안을 제안했다. 물론 이 땅은 가장 먼저 폼페이우스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제대군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세 명의 호민관은 이 법안을 거부했고, 카이사르의 동료 집정관 비불루스는 집회가 소집될 때마다 거부권을 행사하며 격렬히 반대했다. 카이사르는 결국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이용해 반대파를 위협하며 자신의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오른팔이던 호민관 푸블리우스 바티니우스의 제안으로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산맥과 아펜니노 산맥, 아드리아 해 사이의 지역)와 일리리쿰을 얻었다.

그는 갈리아 키살피나를 기반으로 자신의 군대를 모집했고, 이 군대로 로마의 북서쪽 국경 너머의 영토 정복전쟁에 착수했다. 그는 기원전 58년부터 약 9년간에 걸쳐 라인 강 좌측의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그곳에 거주하던 이민족을 복속시켰다.

갈리아 지방은 이후 카이사르 지지 세력의 본산이 되어 카이사르와 로마 원로원의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를 배반하지 않았다.

또한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에서 나는 공물로 필요한 정치자금을 충원하고, 병력을 모집했으며, 무엇보다도 갈리아 정복자로서 그는 명성을 로마에 떨치는 수확을 얻었다. 이로써 그는 로마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착실하게 장악해나갔다.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는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9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전쟁을 기록했다.

카이사르는 연설과 저술에도 뛰어났는데, 그 가운데는 9년간에 걸친 갈리아 정복과 이후의 로마 내전에 대한 보고서(이 보고서는 다른 사람들의 손으로 보완되었다)가 전해 내려온다.

카이사르는 유명한 웅변가인 호르텐시우스와 키케로가 활동한 시대에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경쟁할 수 있었던 위대한 연설가로 손꼽혔고, 위기의 순간에 간략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연설로 로마 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연설과 저술은 모두 그의 정치적 선전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정복에 열을 올리는 동안 로마의 정적들, 특히 1인독재를 두려워하는 원로원들의 칼날이 언제 그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문제가 남아 있었다. 거기다 카이사르의 부재 동안 원로원들은 폼페이우스를 구워삶아 카이사르와의 동맹 관계를 끝내고자 했고,

크라수스마저 과거의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와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틀어진 세 사람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자신의 속주인 루카에서 회담을 열고 동맹 관계를 원래 상태로 되돌렸다.

회담의 내용은 기원전 55년의 집정관으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추대하고, 이에 따라 그들이 속주 군대에 대한 카이사르의 지휘권을 5년 연장해줄 것, 그리고 집정관에서 물러난 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각각 시리아와 스페인의 총독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동맹 관계는 기원전 53년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전쟁에서 전사하고, 기원전 54년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죽고 폼페이우스와의 결혼동맹이 깨짐으로써 완전히 끝났다.

수많은 정치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0년, 폼페이우스를 앞세운 원로원과 카이사르의 관계는 악화될 대로 악화되어 있었다.

원로원은 속주에서 근무를 마치고 이탈리아로 귀환하는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무장을 해제하고 입성할 것을 요구했고, 다음 해 집정관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부재자 등록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요구를 수용하고 로마에 입성할 경우, 카이사르가 정계에서 밀려나고 각종 혐의로 기소될 것은 자명했다.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있는 카이사르를 대역죄로 기소했고, 결국 기원전 49년 1월 10일,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 키살피나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 강을 건넜다.

로마 내전의 '주사위는 던져졌고', 카이사르 앞에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만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술라 내전으로 한 차례의 피바람을 맞본 로마 인들에게 내전에 대한 공포는 상당했고, 카이사르에게는 이로써 자신이 국가의 적이 되지 않고 로마 인들의 인심을 잃지 않기 위해 내전을 빨리 마무리할 필요가 있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는 원로원 의원들을 오트란토 해협으로 몰아내고, 스페인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기원전 48년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내란을 종식했다.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의 장교에게 살해당했다. 이집트에서 폼페이우스의 시신을 인도받은 카이사르는 이후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간에 벌어진 내전에 개입해 클레오파트라를 왕위에 올렸다.

 

카이사르의 발 아래 무기를 버리는 베르킨게토릭스

장 레온 제롬의 〈카이사르의 죽음〉

기원전 48년 말 카이사르는 독재관으로 임명되어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에 남아 있는 원로원파 잔당들을 처리하고 나서 그는 기원전 46년, 45년 연이어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포로 로마눔

카이사르가 건설한 것으로 그리스의 아고라 같은 역할을 한 공공집회 장소

집정관 카이사르는 이 시기에 많은 일을 했다.

로마력을 개정하고, 무니키피움(자치시) 구성의 표준 유형을 규정한 법률을 제정했다. 동맹국 주민들에게도 로마 시민권을 부여했고, 원로원의 규모를 늘려 원로원에 대한 유화정책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리고 착실하게 팍스 로마나로 구축된 제정 로마의 기반을 구축해나갔다.

제정으로 향하는 카이사르의 거침없는 행보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브루투스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하면서 끝났다. 그러나 그의 정책과 개혁은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어져 제정 로마를 열게 만들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부분적으로는 그의 관용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민족'에 대해서는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지만, 정치적 숙적, 그토록 싫어했던 원로원 의원들, 내전 당시 그에게 칼을 겨눴던 사람이라도 로마 인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내전이 끝난 후 그는 정적들을 대규모로 사면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직위로 복귀시켜주고, 고급 관료에 임명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를 암살한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역시 한때 그의 정적이었다.

브루투스와 원로원은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고자 발버둥치며 결국 카이사르를 암살했으나 제정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로마 사회의 변화와 시대의 요구를 물리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