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화예술인들이 초창기 극우 정치 깡패들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이들의 공헌을 고 박 정희 전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기여이상으로 무시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아킬레스건이고요...
특히 임 화수보다는 이 화룡씨는 김 두한씨 이상으로 존경하는 분이고 말입니다... 이 양반의 정치적 중립성 유지, 한국 영화계 초창기 발전에 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하기 힘듬니다...
현재 100편을 넘어가는 거의 다 봤고요^^
삼일절도 있고 일제치하때부터 상모질이 윤씨 탄핵결과도 있고 해방이후 좌우익의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 골육상쟁의 민족의 비극 6.25까지 겪은 한민족...
동란이후 극우 정치 깡패들과 독재자 이 승만/이 기붕 정권이 한국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이야기를 현재 보고 있는 중입니다... 이번달안에 결론나겠죠^^
그럼 드라마 시청도 끝냄니다...
호 고석 제 아버지처럼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고 이 화룡씨
김 한용이 촬영한 고 임 화수의 모습
재판 당시의 임 화수의 모습으로, 사진에서 말을 하고 있는 유 지광의 왼쪽에 있는 인물이다. 사진 가장 오른쪽에 옆모습만 보이는 사람은 이 정재.
하루종일 삼일절에 극우 꼴통들과 토착 왜구들의 탄핵 반대 집회로 시끄러워 난 넷플릭스에서 야인시대나 봤다. 여러 OST가 있지만, 영화 "글루미 선데이(우울한 일요일)"가 좋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917
이 시기를 관통하는 주제곡입니다...
"우울하네요"
여전히 척살되지 않고 있는 을사오적의 그 매국노들과 친일부역자들과 그 후손들이 토착왜구화되어 있는 한반도에서 주요 친일 인사들을 대변하는 있는 최 상목 권한대행의 삼일절 기념사는 듣지도 않았고요...
올해 광복 80주년입니다...
8월에 나올 홍 범도 장군의 다규멘터리 "독립군"이나 기다림니다... 그리고 내년도 더불어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에게서 삼일절 기념사 제대로 들을겁니다...
이 드라마 일제감정기 부분 1부만 볼 예정이고, 2부 광복후 제대로된 반민족행위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진행된 건국이후의 제3공화국 부분은 관심 없습니다...
이때 우린 프랑스의 나치협조자들 단죄처럼 반민족행위자들을 전부 처형했어야 했었습니다... 이 모든 사단의 중심에는 이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봄방학에는 삼일절도 있고 2000년대초반 SBS 대하드라마 "야인시대"를 본다. 김 좌진 장군의 아들 김 두한처럼 국회와 상모질이 행정부에 똥물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다...
https://samsongeko1.tistory.com/13903
상모질이 윤씨, 오늘 시간제한받지 않는 최종 진술...??
12월3일부터 리얼하게 진행과정을 생중계로 본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일고의 들을 가치도 없는 진술일꺼라 듣지는 않고 글이나 올림니다...
뉴스에서 들리면 영조대왕처럼
'귀를 씻어낼 것이고...'
전 "모래시계"의 최 민수씨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초창기 한국 영화배우 허 장강씨의 아들 허 준호씨를 좋아합니다.. 그 영화 "실미도"에서의 인간적인 매력에 푸우욱 빠졌고요^^
https://samsongeko1.tistory.com/13888
저보다 네 살위 형님이고요^^ 한국 영화 초창기때의 대배우들 아들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형님입니다... 저도 원래 보수주의자라고 봐야 합니다...
~~~(중간생략)~~~
네번째로 민족적 자존감을 상실케하는 외국 문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화시키고 그 장점을 받아들여 역으로 한류로 역세계화 통합시키며, 외국 문물의 단점은 철저히 배격한다...
~~~(중간생략)~~~
난 진정한 진보주의자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더불어민주당이 극우를 제끼고 진정한 보수주의자와 보수당이 되면 전라도에서 진정한 진보주의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나저나 조만간 여동생이 사는 안산 대부도에 있는 "동춘서커스" 장 공연이나 애들과 아내데리고 가 구경하고 싶네요... 어렸을때 서커스 공연을 딱 한번 본 적은 있는데,
몇 십년동안 잊고 살았네요... 애들한테 좋은 추억이 될거 같네요^^ 아내도 아예 못봤을거 같은데??^^ 저녁 8시30분에 U-20 아시안컵 8강전 보기전입니다...
전 축구광팬의 전형적인 토종 조선놈이라고요...
독재자 이 승만이를 몰아낸 4.19 의거의 발상지... 민족 고려대학교 내 모교에 극우 꼴통들이 꽈리를 틀었다...?? 하여튼 우리 기성세대들이 국가를 잘못 이끈 대가를 치루네요
https://samsongeko1.tistory.com/13887
민족 고대 후배들아...
이 대선배가 미안하다... 상생과 설득과 협치의 정치를 잃어 니들을 국론 분열의 중심에 들어서게해서 말이다... 그렇게 '민주화 운동'을 했는데도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네... 탄핵찬성이든 반대든 니들 의견은 존중한다...
뭐 헌법재판소가 결정하겠지...
우린 '윈스턴 처칠', '마가렛 대처' 같은 보수주의자나 보수당은 없다... 대한민국에는 어용 보수만이 있어 난 진보주의자의 길을 가게된 것일뿐... 더불어민주당의 중도보수..?
https://samsongeko1.tistory.com/13869
나도 원래 보수주의자라고 봐야 한다...
한민족 500년 불구대천의 적 대일(그들의 시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강경 노선, 박 정희 전대통령의 자주,자립.자조 정신에 입각한 국방(외교)/경제관, 강력한 민족주의 추구...
조선말 흥선대원군 같은
내가 기준을 알려준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첫째로 자유 민주주의 기치아래 글로벌 평화에 기여하면서도 어떠한 나라와도 굴종외교는 하지 않는다... 그것이 미국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일본이든 말이다...
둘째로 자주, 자립, 자조의 3대 정신에 근거해 국방(외교), 경제(금융), 사회(문화)에서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입장에서 독자적인 실력을 스스로 만든다...
세번째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반대인 공평한 분배 공산주의에는 반대하나 없는 자들을 아우르는 유럽식 사회주의 주요 복지정책들을 자본주의 중심의 경제성장과 함께 고려한다...
네번째로 민족적 자존감을 상실케하는 외국 문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화시키고 그 장점을 받아들여 역으로 한류로 역세계화 통합시키며, 외국 문물의 단점은 철저히 배격한다...
이게 아니면 '내란수괴' 상모질이 윤씨이하 "국민의짐" 이든
이 재명이하 "더불어민주당"이든 보수를 논하지말라...
윈스턴 처칠이나 마가렛 대처같은 진정한 보수주의자나 보수당이 없어 강력한 민족주의자이자 정통 진보주의를 보수주의로 여기면서 한국땅에서 살고 있는 비운의 민주화 운동 세대
게코(Gekko)가 설파하고 있는 중이다...
난 진정한 진보주의자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극우를 제끼고 진정한 보수주의자와 보수당이 되면 전라도에서 진정한 진보주의자도 나타날 것이다...
한국 영화업계의 대부 이 화룡(李 華龍)...
- 김 두한과 우호적 관계였으며 협객으로서의 불문율을 중시했으며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했던 낭만파 주먹으로 알려짐...
1. 개요
평안남도 평양 출신 조직폭력배.
2. 생애
해방 전 이북에서 평양에는 이화룡이 있다고 할 정도로 이미 유명한 건달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박두성, 아오끼와 함께 북쪽 3대 강자라고 불리고 있을 정도였고, 또는 이북이나 만주 등지에서 싸움과 노름을 하며 세월을 보냈고, 시라소니하고는 오랜 친구였다.
재빠르게 상대방의 무릎을 딛는 동시에 큰 기합을 지르며 위력적인 박치기를 구사했었다고 한다. 서북청년단 대동강동지회의 특공대장으로 좌익계열을 습격하는 등 백색 테러리스트로 활동했으며 제주 4.3 사건(4.3 학살)에도 가담했다고 한다.
6.25 전쟁 이후 이기붕이 자유당 당원 제의를 했지만 이를 거절하였는데 이화룡이 스카웃을 거절하자 이기붕은 이정재를 스카웃했다.
누이 이 성룡이 서울에서 유명한 요정 명월관과 당시 명동에 있던 대규모 고급 중화식당인 청해루를 운영했으며, 요정과 중화식당 운영으로 벌어들이는 돈 중 일부를 이화룡한테 원조해주었기 때문에 타 건달 조직에 비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고 한다.
시라소니가 굶주리고 갈 곳 없는 KLO 대원들을 위해
동대문패에 점포를 양도해 달라면서 몇 차례 돈을 대여했다가 50만환(5억원)을 또다시 빌려달라고 하며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 점포 양도를 요구하자 동대문패가 분노하여 시라소니를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온갖 흉기로 린치를 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이화룡은 복수를 위해 이정재의 동대문파와 대립했으나, 이정재의 사주를 받은 경찰의 협박으로 이를 그만둔다. 그러다가 황금마차 습격사건으로 다시 싸움이 일어났고, 이 때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내부의 배신자들로 인해 명동패 몰락의 위기가 오자 이정재와 최후의 전쟁을 벌이지만, 1958년 충정로 도끼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면서 조직폭력계에서 강제 은퇴를 당하게 되는데, 이후 그의 조직은 신상사가 잇게 된다.
이후에는 1960년부터 1967년까지 화성영화사를 운영했었다.
이화룡이 제작한 거물급 작품으로는 소위 1대 장희빈으로 불리는 김 진규, 김 지미 주연에 정 창화 감독의 1961년작 '장희빈', 한국 고전영화의 걸작을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강대진 감독, 김 승호 주연의 '마부', '박서방', '노다지'.
이 만희 감독의 데뷔작인 '주마등' 등이 있다. 5.16 군사정변 직후 사회정화 구실로 잡혀가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는데, 다행히 당시 라이벌과 같은 비참한 말로는 맞이하지는 않았다.
영화 사업에서도 은퇴한 후 이화룡은 신앙 생활을 하며 후에 목사로 지내 살아오다가 1984년 2월 24일, 고혈압으로 숨졌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옛날에 주먹세계에 몸담은 것을 굉장히 후회했다고 한다.[6]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다.
3. 대중매체에서
대부분의 작품에서 김두한과 우호적 관계이며 불문율과 정치적 중립을 지키려 노력하는 낭만파 주먹으로 설정됐다.
어떻게 보면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박 지성씨와 닮은 정치 깡패 임 화수
林和秀 | Lim Hwa-su
1. 개요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를 자처한 대한민국의 정치깡패 겸 영화 제작자.
연예계의 황제 내지는 연예계 밤의 대통령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유 지광, 이 석재 등과 함께 이 정재의 대표적인 부하로도 알려진 인물이며 또한 1959년 배우 김희갑을 폭행했던, 이른바 김희갑 구타 사건의 가해자이기도 하다.
정 주영과 함께 소학교가 최종 학력이다. 다만 정주영은 초등학교를 다니며 정규 교육은 받고 졸업하였지만,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내지 못해서 중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고 농사를 짓게 되면서 그리 된 것이지만,
임화수는 본인이 학교 의무 교육 받기를 싫어하고 소홀하였던 것으로 알려져서 소학교를 중퇴했다는 차이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초졸도 아닌 초등학교 중퇴자.
2. 생애
1921년 1월 10일 경기도 여주군(현 여주시) 강천면 가야리에서 아버지 권병규(權丙逵)와 어머니 충주 석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권중각(權重珏)이었지만 태어난지 얼마 안돼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아버지의 성인 임씨를 따라 '임화수(林和秀)'로 개명했다. 1941년 절도죄로 개성 소년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했고,
1944년 장물수수죄로 다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8.15 광복으로 출옥했다.
학식은 거의 없었지만 영화를 좋아해서 극장 직원으로 일하다가 광복 이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평화극장[6]이 적산 자본으로 풀리자 임화수가 거의 헐값으로 인수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영화사를 창업해 영화계와 연예계의 대부로 떠오르게 된다.
여주 옆 동네인 이천 출신인 이정재와의 인연으로 임화수는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에서 2인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경호 책임자이자 권력 실세인 곽영주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권력의 비호를 받아 영화계와 연예계를 장악하게 되었다.
1955년 한국연예(주)를 세우고 유명 배우들을 전속으로 묶은 뒤 홍콩과 합작으로 1957년 "천지유정"이라는 영화를 제작했고 그 외에도 15편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1959년 3월에 반공예술인단을 결성했다.
그런데 임화수가 제작한 영화는 대부분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을 찬양하는 관제영화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1959년에 제작한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이 영화를 제작할 당시 자유당으로부터 무려 4,000만환이라는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거액을 지원받았고 감독도 영화계의 거물 신상옥이었으며 당대의 미남 배우이던 김진규가 연기한 이승만의 이미지는 결점이라곤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늠름한 우국 청년의 모습이었다.
1958년에는 홍콩의 쇼브라더스와 합작하여 <이국정원>이라는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이 영화는 1949년에 홍성기 감독이 자신의 데뷔작 <여성일기>를 컬러 영화로 제작한 이후 굉장히 오랜만에 제작된 컬러 영화였고
이후 1960년에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 동시에 컬러로 제작되며 맞붙으면서 한국 영화는 본격적인 컬러 영화의 시대를 열게 된다.
다만 <이국정원>의 컬러 촬영과 현상은 홍콩과 일본의 기술이었으며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과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도 현상을 일본에서 했으므로, 이 영화들이 순수 국산 기술로 제작된 컬러 영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에서도 1956년 최승희의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를 영화화할 때 컬러로 제작했지만 북한 자체 기술이 아닌 소련의 기술이었다.
아무튼 <이국정원>은 오랫동안 필름이 소실되었다가 2014년 5월 한국영상자료원이 홍콩영상자료원의 창고에서 영화의 필름을 뒤늦게 발굴하여 상영하였으나 영화의 사운드 필름이 소실되어 본의 아니게 무성 영화로 상영이 되고 말았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후, 박구 감독이 연출한 <물망초>를 끝으로 제작 커리어는 멈췄다. 명색이 영화인이라고는 하나 출신이 깡패였던 만큼 본색은 어쩔 수 없었고 걸핏하면 남자 연예인들을 구타했다.
대표적 사건이 임화수 자신이 주최한 반공 예술인단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당대 최고의 희극배우인 김희갑을 구타하여 늑골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힌 소위 합죽이 구타사건이 있다.
사실 임화수라는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바로 '김희갑 구타 사건' 때문이였다. 이환경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임화수가 최무룡을 구타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걸 본 아들 최민수가 아버지를 모욕했다며 소송을 제기 하기도 했다.
거기다 임화수는 권력과 더욱 밀착하기 위해 미모의 여배우나 가수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하는 안 좋은 관행을 만들었다. 곽영주의 주선으로 경무대에서 대통령 이승만을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큰절을 올리면서
"마치 돌아가신 아버님을 뵙는 것 같습니다. 각하, 아버님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라고 눈물을 펑펑 쏟자 이것에 껌뻑 죽은 이승만이 임화수를 아들이라면서 총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래도 꼴에 여자는 때리지 않는다며 자부했다고 한다. 영화배우 김지미의 회고에 따르면 1950년대 후반쯤 여배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임화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김지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머머머? 그 미친 개 같은 사람 말야?"이라며
뒷담화를 하던 중 공교롭게도 임화수가 근처에서 그녀를 도끼눈으로 째려보며 지나갔고, 김지미는 퍼렇게 질려서 "아이고 맙소사, 나는 이제 죽었어!" 벌벌 떨다가 며칠 후 임화수의 편지를 받았다.
내용인 즉슨 "당신 말대로 나는 미친 개같은 깡패는 맞소. 그러나 난 적어도 여자를 패거나 괴롭히진 않소. 행여 여배우들을 무섭게 주눅들게 했다면 내가 사과하겠소⋯"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그 후 김지미는 임화수가 처형되기 몇달 전 형무소로 찾아가 임화수를 면회했다고 한다. 다만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소속 여배우의 엉덩이를 주물럭대듯 찰싹찰싹 치는 씬이 나오는데 주먹만 휘두르지 않았을 뿐, 성폭력에선 당연히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당 정권 말기에는 이승만의 대통령 4선과 이기붕의 대한민국 부통령 당선을 위해 소위 반공예술인단을 조직하여 연예인들을 자유당 선거 운동으로 내몰았다.
김희갑 구타 사건도 당시 김희갑이 다른 스케줄을 핑계로 선거 운동용 행사에 불참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던 덕분에 고작 30,000환 벌금으로 약식기소되는 것에 그쳤다.
이 사건은 단지 김희갑이 '합죽이'라는 예명으로 불린다고 불만을 터뜨린 것에 대해 김희갑을 구타했다는 이야기로 알려진 경우도 있다.
1958년 자유당 감찰부장 등 당직을 맡고 있던 이정재가 이기붕과의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 문제로 갈등을 빚은 끝에 당직을 내려놓고 직함만 유지한 채 자택에 칩거하게 되자, 임화수가 화랑동지회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었다.
자유당이 조직한 소위 반공청년단에 참여해 스스로 종로구 단장을 맡았고
유지광 등에게 지시하여 조병옥 등 야당의 거물 정치인들에게 테러를 자행했다. 임화수가 저지른 결정적인 정치 테러는 1960년 4월 18일에 일어난 고대생 습격 사건으로 이 사건은 임화수의 명줄 단축에 대한 결정적 단초가 되었다.
4.19 혁명 이후 정치 테러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6개월만 받고 얼마 안 가 풀려났지만 5.16 군사정변 이후에 군대에 체포돼 다시 재판에 회부되었다.
혁명재판에서 임화수는 뻔뻔스럽게도 자신만 살아남으려 3.15 부정선거에 개입한 것과 각종 정치 테러 및 고대생 습격 사건이 이정재의 지시로 일어난 것이라고 우기면서 어떻게든 발을 빼려고 했다.
이정재가 사형당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소위 화랑동지회 사건도 임화수의 폭로로 알려지게 된 것. 이처럼 임화수는 모든 잘못을 죄다 이정재에게 덮으면서도 자기는 잘못이 없다고 우겨댔는데
이로 인해 재판 당시 옆에 있던 유지광이 이성을 잃고 포승에 묶인 몸으로 임화수에게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가 같이 있던 최인규 전 내무장관의 만류로 겨우 진정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교수형 집행 직전의 임화수의 모습이다. 곽영주, 이정재 등과 함께 월간조선 1995년 10월호를 통하여 공개되었다.
사형 집행 당일 사형장에 끌려오면서도 살고 싶다며 몸부림을 치다가 사형장에 들어와서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금강경 몇 줄을 읊은 후 1961년 12월 21일 곽영주(전 경무대경찰서장),
최인규(전 내무부 장관), 간첩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조용수(민족일보 사장), 최백근(사회당 간부) 등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임화수의 시신은 일명 눈물의 곡절이라 불렸던 그의 수행비서 차민섭이 수습했다고 한다.
임화수의 영화사에서 경리 일을 했던 문금순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임화수의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임화수의 사형을 면하게 하기 위해 뇌물을 써야 한다는 명목으로 임화수의 가족들에게 수 차례에 걸쳐 금품을 갈취했고
심지어는 사형 집행 전날에도 돈을 뜯어갔다고 하는데, 임화수의 사형이 집행되자 이후 그는 말 그대로 잠수를 타버렸다고 한다.
3. 평가
무식한데다 주먹을 휘두르며 저지른 악행이 많다 보니 당연히 비판받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를 결정적으로 발전시킨 큰손에 효자였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실제로 임화수는 굉장히 열악한 당시 상황에서도 20여 편이 넘는 영화를 손수 제작했으며, 영화 제작에 불리한 관련 법규들도 대한민국 정부를 움직여서 모두 개정을 하게끔 했다. 이는 대한민국 영화계 관련 법률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악하기 그지없는 성격과는 대조적으로 노모에게만큼은 지극정성이었던 효자였다고 한다. 그의 악행을 신랄하게 표현한 <야인시대>나 <무풍지대>에서도 사형 집행 직전 가족 면회 장면에서 나레이션을 통하여 이 내용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애초에 본인이 주장한 영화 산업 자체가 관제영화였고, 배우 구타 및 정치적으로 연예인 악용이라든지 잘못한 게 워낙 많기에 한국 영화 발전 기여보다 나쁜 짓이 더 많다는 게 일반적인 한국 영화계의 대세이다.
안에서는 효자에 자상한 가장이지만, 밖에서는 수시로 망나니 짓을 하고 다니는 일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니며, 앞의 사실이 망나니짓들에 대한 용서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비슷한 예로 차지철이 있다.
김학래가 재수없게 재현한 제작자를 보고 당시 취재에서도 "재수없는 임화수 생각난다"라면서 치를 떨던 걸 봐도 한국 영화계에서는 거론조차 하기 싫어하는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영화를 발전시킨 조폭이라는 평가는 차라리 명동의 황제라고 불리던 이화룡에게 붙이는 게 더 낫다. 실제로 이화룡은 주먹계에서 완전히 손을 씻었고, 이만희의 데뷔작도 제작했으며, 한국 영화 사상 최초의 장희빈 영화도 제작한 몸이다.
강대진 감독도 이화룡 휘하에서 <박서방>, <마부>를 감독하면서 리즈 시절을 누렸다. 이정재를 두둔하는 이들에게는 두고두고 씹히며, 반대로 임화수를 두둔하는 쪽도 이정재에게 모든 잘못이 있다고 하기 때문에 양쪽은 서로 엄청 원수 지간이다.
4. 대중매체에서
연기한 배우들로는 오지명(제1공화국), 연규진(무풍지대), 김학철(대명), 조형기(충무로 돈키호테), 최준용(야인시대) 등이 있다. 야인시대에 나온 최준용의 연기가 유명한데 찌질, 포악, 소인배, 개그캐릭터에 걸맞은 연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악인 이미지는 연규진이 최고지만 무풍지대 자체가 야인시대보다도 10년 전의 드라마인 만큼 연출력은 평범한 수준. 실제 혁명재판 당시 공판 기록을 보면 대부분 가명으로 고발했는데 실명으로 폭행 사실을 고발한 사람들이 3명 있었다.
김 희갑과 박 암, 최 무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