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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millionaire

연말연시에는 영화 "전란"을 중심으로 SBS 대하드라마 "녹두꽃"을 다시 볼 예정이고, 26일 넷플릭스에 올라올 "오징어게임2"를 전편과 같이 볼 예정입니다... 정 여립이라..

 

B.S - 앞으로 7일(12.21~12.27)간 수석 재산관리 집사님이 연말연시(현재 12.28~1.5은 GI 인터넷(홍보)팀장인 정 은영씨가 대리) 바쁜 일정들에 부재중인 관계로 대표이사님의 주요 저장된 글은 주요 블로그/SNS 대리 관리인(이 글의 주요 공유기인 대표이사님의 비지니스폰도 보유중...) GI IR실장인 제가 올리겠습니다...

 

대동사상을 개척하고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였던 정 여립, 조선조 당쟁의 역사를 끝내려고 노력했던 무수리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영조대왕과 실학사상을 전파하려했던 영조의 손자 정조(사도세자의 아들), 수많은 조선후기 다산 정 약용을 중심으로한 실학자들, 동학을 창시한 최 제우/최 시형과는 달리 동학을 현실세계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투쟁가 전 봉준... 동학 농민들의 반외세및 항일투쟁을 이어 국권을 침탈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항거한 안 중근, 윤 봉길, 홍 범도, 김 원봉을 중심으로한 수많은 독립투사들과 신 규식선생, 이 동녕선생, 이 시영선생등 주요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 독재자 이 승만에게 살해당한 민족주의자 백범 김 구 선생과, 진정한 진보주의자 죽산 조 봉암 선생... 이들을 계승한 고 김 대중 전대통령과 고 노 무현 전대통령... 진정한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도 없는 한국의 정치 상황... 여전히 국민/서민/민중/민초들을 겁박하고 억압하려는 기운이 느껴지는 2024년 한국의 검찰과 군대,경찰조직내에 "서울의 봄" 잔당의 반민주화 세력들이 또아리를 트고 있다는 생각에 아니 환율이 1500원을 넘어갈수도 있는 금융위기 상황이고만, 정치가 경제를 도와주지 못하고 있는 이 상황... 역시 상모질이 윤씨 대단하네... 대가리가 크다고... 그 +10%의 지지율에서도 말이다... 이 양반을 찍은 2찍들은 거의 다 돌아섰는데도 영남당, "국민의짐"의 극우 꼴통들을 믿고 이제는 헌법재판소도 갖고 놀라고 그러네... 난 이 주말에 이 글로 갈음한다...

 

 

간만에 호외라... 전 어제부터 보고 있는 "고려거란전쟁" 서재에서 계속 보고 있으며, 오늘 외출에서 돌아온 아내는 거실에서 또 다른 5.18관련 영화 "택시운전사" 보데요.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76

 

각자 일들이 있어 전 주요 블로그(Blog) 관리중이고요^^

 

아내는 10시에 애들 재우고 재단관련 일로 노트북으로 작업하고 있는 중^^ 저녁 먹으면서 내일 애들과 "소방관" 보러가자고 합의 봤습니다... 상모질이도 내려왔고, 이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내년 초등학생 되는 큰 놈과 작은 놈도 영화 좋아합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놈은 모르겠습니다... 국민의 뜻을 알테니 이제 헌법재판소에 맡기고 잠니다.

 

이제 '차기 대통령이 누구냐...?'네요...

 

 

어제 퇴근해 아내가 준 저녁밥상을 먹고 후식 디저트 먹고 있는데, 그러네요.. "여보, '퍼스트레이디' 보여주면 안되요.." 저 왈, "임자, 갈보로 의심되는 여자 보고 싶냐고"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71

 

암튼 전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

주인공들보다는 주요 조연들에 주목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살인마 전 두환이의 그 영부인 이 순자씨도 나옴니다... 영욕의 세월을 사는 이 여자도 아직 살아 있고요... 제 아버지가 38년생으로 향년 73세로 돌아가신게 2010년인데, 만주 출신인 1939년생인 이 순자씨도 살아 있네요... 현재 87세라는 이야기네요... 5공 당시 그 친인척 비리의 대표적 사건이였던 "장영자/이철희 어음사기 사건"도 누가 영화화 좀 해줬으면 좋겠네요... 이 순자씨의 작은 아버지 이 규광(그 당시 광업진흥공사 사장)씨가 역대급 사기꾼 장 영자씨의 형부였고, 수사 과정에서 장 영자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당장 풀어주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라’며 으름장을 놓았고요...

 

전 영화 "살인의 추억"도 아니고 이 뭣같은 되돌이표 대한민국 상황이 너무나 곤혹스럽습니다... 하여튼 상모질이 대통령과 국격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범죄자 퍼스트레이디가 있는 한반도 상황이 말입니다... 두 양반다 징역이 더 어울리는 한쌍이네요...

 

오늘 끝냅시다...

 

"사랑하는 여자때문에" 국민을 볼모로 삼는 상남자(?)를 보호하기 위해 집권여당 주요 모질이들은 비겁하게 투표장에 들어와 반대표를 던지지도 않고 찬성표가 나올까봐 전전긍긍....

https://samsongeko1.tistory.com/13646

 

여기에 내각책임제 망령에 사로잡힌

 

홍 준표 대구시장부터 주요 여권 지자체장들은 탄핵 반대이유가 집권여당 다선 중진의원들 이상으로 참 다양하네... 일단 거대야당 범야권은 국민의 1/3이 선택한 국회의원들을 설득해야 한다... 대화와 설득, 협의/협상으로 말이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번주 사태는 난 장고해야겠다... 범야권조차 결코 이 사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후로는 윤대통령이 이런 극단적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야당의 행태에 대해서 비판할 것이다... 난 당당하게 재판에 임하는 이 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달리 그 수하들이 벌이고 있는 대여투쟁에서 곱지않은 시각을 가지고 있다... 국민을 주권자라고 진정으로 생각하는 거대야당으로서 대화/타협, 협상/협치가 없다면 어떠한 대여투쟁도 명분이 없다는 생각이다... 나라경제가 비상시국이라는 말이다... 반대도 출석하여 하지 않는 역심자 6선의 조 경태 병신과는 달리 김 상욱, 김 예지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은 존경합니다... 찬성이든 반대든 참석에 의미를 두고 싶고요...

 

비겁하지는 않네요...

 

 

붕당정치(朋黨政治) - 조선조 당쟁사를 언급한다...

 

 

의리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붕당을 결성하여 자신들의 당론을 매개로 국정의 주도권을 획득하려 하는 정치 체제. 조선 중기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가 훈구파를 꺾고 중앙 정계에 대거 진출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경우가 대표적인 붕당정치의 사례이다. 이후 사림은 동인·서인·남인·북인, 소론·노론 등으로 파벌이 갈렸으며, 각 붕당 간의 치열한 정권 다툼과 분열이 18세기까지 이어졌다.

 

주자학적인 세계관을 신봉하는 사류(士類)가 이념집단을 형성하고 공도(公道)에 바탕을 둔 공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자신들의 의사를 집약한 당론(黨論)을 매개로 하여 현실정치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정치체제를 말한다.

 

붕당이란 붕(朋)과 당(黨)의 합성어로서, '붕'은 '동사'(同師)·'동도'(同道)의 사류, 즉 같은 스승 밑에서 의리(義理)인 도를 동문수학하던 무리(벗)를 말하며, '당'은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모인 집단을 지칭한다.

 

일제 어용학자들은 '붕당지쟁'(朋黨之爭)의 줄인 말인 당쟁(黨爭)이라는 용어를 강조함으로써, 당파성과 분열성을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병폐라고 지적하고 이를 식민통치에 이용하기도 했다.

 

유교정치사상사의 맥락에서 붕당은 당초 부정적인 금기의 대상이었다.

 

중국의 경우 전국시대(戰國時代) 이전까지는 붕당을 막아야 한다고 주창될 정도였으며, 통일 전제국가가 성립된 한(漢)·당(唐) 시대에는 정치는 군왕(君王)의 전관사항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어서 붕당을 죄악시했다.

 

그러나 송대(宋代)에 이르러 구양수(歐陽脩)의 '붕당론'과 주자의 '인군위당설'(引君爲黨說)에 의해서 그러한 붕당관이 바뀌고 그대신에 공도를 추구하는 이념집단으로서 붕당의 존재의의를 인정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초기에 훈구세력이 한·당대의 붕당론을 이용하여 신진사류의 발흥을 막기 위한 사화(士禍)를 일으킨 반면, 신진사류는 훈구세력을 구양수와 주자의 붕당론을 근거로 하여 '소인(小人)의 당'으로 규탄했다.

 

16세기에 행해졌던 척신정치(戚臣政治)는 선조의 즉위로 일단 외형적인 종식이 이루어졌다.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尹元衡)의 세력이 집권함으로써 명종의 외척인 심의겸(沈義謙) 계열은 기대승(奇大升)·윤두수(尹斗壽) 등 신진세력과 결합하고 있었는데,

 

명종이 세자책봉도 없이 갑자기 사망하여 그뒤를 이어 즉위한 선조초에는 강력한 공신집단이나 외척집단이 형성되지 못하고 붕당이라는 형태로 존재했다.

 

사림은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지만, 척신정치 아래에서 성장한 구신료들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다.

 

명종 때에 소윤세력(小尹勢力)이 우세한 상황에서 심의겸의 도움으로 징계에 진출한 사림들인 전배(前輩)들은 심의겸을 사림의 동조자로 받아들이고, 일면 구체제적인 요소를 옹호하고 있었다.

 

반면 선조 때에 진출한 사림인 후배(後輩)들은 구체제를 지양하고자 했으므로 이에 불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후배사류들의 정계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이조전랑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沈忠謙)이 거론되자 대립이 악화되어,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이 이루어졌다.

 

심의겸을 포함한 전배가 대부분 서인(西人)이 되고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후배가 동인(東人)이 되었다.

 

그런데 동인은 주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반면 이이(李珥)가 서인임을 스스로 정하자 이후 동·서인의 대립은 학연을 가장 중요한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는 그와 관련을 맺고 있던 동인세력까지 확대되어 일시적으로 서인들은 독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옥사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서인의 세력강화를 꺼린 선조는 동인인 이산해(李山海)로 하여금 제재를 가하게 하고,

 

최영경(崔永慶)·이발(李潑)·이길(李吉)·정개청(鄭介淸) 등의 죽음이 서인세력에 의한 원사(寃死)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명분상 약점을 가지게 된 서인은 이 일로 정계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동인도 옥사의 수습과정에서 서인세력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편척서인'(便斥西人)을 견지하는 북인(北人)과 '참용피차'(參用彼此)를 내세우는 남인(南人)으로 분기할 조짐이 보이다가,

 

임진왜란 말기 북인세력이 유성룡(柳成龍)을 탄핵하면서 확연해졌다. 이중 이황의 제자들이 남인세력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붕당의 존재에 대해서 긍정적이었고,

 

붕당간의 시비(是非)와 정사(正邪)의 분별을 엄하게 하기보다는 조정의 진정을 위한 '동인협공'(同寅協恭)을 더 중시하여 정국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다.

 

반면 북인들은 주로 조식의 제자들로 형성되었는데, 그들은 정인홍(鄭仁弘)을 제외하고는 재지기반(在地基盤)이 미약했으며, 학문적인 전통도 약했다.

 

그러므로 기반이 약한 북인들은 권력구조상에서 왕권을 정점으로 하는 획일적인 통치체제의 확립을 지향하고, 다른 붕당의 존재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기축옥사에서 서인세력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정책으로 이산해가 영의정이 되어 정국을 주도했으나, 임진왜란에 따른 피난 도중 이산해와 유성룡이 전란 초래의 책임으로 퇴진하고,

 

유배중이던 정철(鄭澈)과 윤두수 등 서인세력이 다시 진출했다. 그러나 서인이 북상하는 왜군을 저지하지 못한 반면 남인인 유성룡·이덕형(李德馨)·김명원(金命元) 등이 명군(明軍)을 이용하여 전세를 역전시켜,

 

1593년 10월 유성룡이 영의정으로 복귀하고

 

다시 남인정권이 성립되었다. 남인세력은 처음에는 서인세력과 공존체제를 모색했으나, 전란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어 세력관계의 재조정이 필요해지자 정철에게 최영경 옥사의 책임을 추궁하여 서인의 명분을 약화시켰다.

 

그해 정철이 사망하고 윤두수가 외방으로 나감으로써, 서인은 구심점을 잃고 이후의 정국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

 

이와 같이 서인 세력의 핵심을 정계에서 배제한 남인세력은 서인 가운데 비교적 지지기반이 약하고 중도적인 입장에 서 있었던 이항복(李恒福)·심충경 등을 수용하고,

 

북인세력 중에서 이산해·정인홍 등을 배제한 채 기타 신진 연소세력들을 등용하여 외형적으로 서인·북인 세력과의 공존체제를 표방했다.

 

이후 남인세력은 화의(和議)를 통해서라도 전란을 종식시키려고 했으나 오히려 전란의 장기화와 정유재란을 초래하게 되었으며, 남인세력의 재지적 기반인 경상좌도 지역이 심한 피해를 입어 그의 세력기반이 약화되었다.

 

따라서 1598년(선조 31) 11월 왜군을 완전히 몰아낸 후 척화(斥和)를 견지한 북인세력이 정국에 대거 진출했다.

 

그러나 북인세력은 구성원간의 정치적인 지위의 차이, 전란이 끝난 후의 현실정국에 대한 인식의 차이 등으로 인해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다.

 

유성룡을 옹호한 남인 이원익(李元翼)에 대한 처리방안을 놓고 기성세력인 이산해·홍여순(洪汝淳)과 신진 연소세력의 지지를 확보한 김신국(金藎國)·남이공(南以恭)이 대립했는데,

 

전자의 지지세력을 대북, 후자의 지지세력을 소북이라고 했다. 정세는 대북의 우위로 끝났으나, 1600년 5월에 이르러 대북세력이 실세하고 서인들이 정권을 잡았다.

 

서인들은 기축옥사 이후의 명분상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생안정과 국방력강화에 중점을 두어 정국을 운영했으나, 1601년부터 자파세력만의 독점적인 확대를 꾀하다가 선조의 견제를 받고 실세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정인홍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대북정권이 성립되었다.

 

대북정권은 임진왜란에서의 활약과 광해군 즉위 과정에서 자신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자신들만을 군자당(君子黨)이라고 표방했다.

 

한편 남인들의 종사인

 

이언적(李彦迪)과 이황을 문묘(文廟)에 종사시킨 데 대해 불만을 품은 정인홍은, 그에 대한 격하를 시도했으며, 동시에 조식에 대한 존숭을 강조하여 대북세력의 학통성과 도통(道統)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대한 사림들의 격렬한 반발 속에서 대북세력은 '폐모살제'(廢母殺弟)를 시도하여 중앙정계를 확고하게 장악하려고 했으나, 남인과 서인은 '강상윤리'를 내세워 반대했다.

 

대후금출병(對後金出兵) 이후 대북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폐모살제에 대한 처벌과 '존명의리'(尊明義理)를 내세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성공하여,

 

주자학적인 명분론을 내세운 서인과 남인의 연합세력이 분열된 지배세력의 결속을 꾀하며 집권하게 되었다.

 

반정초 이괄(李适)의 난 및 이인거 작변(李仁居作變), 1628년(인조 6)의 유효립(柳孝立) 옥사사건 등을 이용하여 대북파를 완전 숙청한 서인정권은 서인·남인·소북의 3당 연립을 지속했으나,

 

남인·소북에 대한 대처방안을 놓고 이귀(李貴)를 중심으로 하는 공서(功西:강경파·勳西·義西)와 신흠(申欽)을 주축으로 하는 청서(淸西:온건파)로 갈라졌다.

 

공서는 또한 서인·남인과의 연합을 주장하는 김유(金瑬)·신흠 등의 노서(老西)와 이귀·나만갑(羅萬甲) 등 서인의 일당정권 수립을 주장하는 소서(小西)로 갈라졌다.

 

그러나 인조대 집권세력 내부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은

 

사회개혁과 실리적인 외교론을 내걸고 주화론(主和論)의 입장에 선 계열과, 사회개혁에 부정적이면서 명분론적인 외교론을 주장하는 척화론(斥和論)의 입장에 선 계열과의 대립이었다.

 

전자의 대표 인물들은 최명길(崔鳴吉)·이경석(李景奭) 등으로, 이들은 대체로 소서세력과 결합하여 정치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후자를 대표한 인물은 주전파(主戰派)의 영수인 김상헌(金尙憲) 등으로 주로 노서였다.

 

병자호란 이후 국정을 주도하면서 개혁정책을 실시하던 최명길이 1640년(인조 18) 재상직을 물러나면서, 1646년(인조 24) 김자점(金自點)의 권력장악으로 귀결되고 주화론은 권력유지의 한 방편으로 전락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과 효종의 즉위가 이루어졌다. 효종의 즉위는 친청적(親淸的)인 주화파 세력의 몰락과 반청적인 척화파 세력의 득세, 북벌론(北伐論)의 실질적인 성립 등을 가져왔다.

 

효종은 북벌론에 의한 군비의 강화를 시도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대동법을 확대하는 등의 재정확대정책을 시행하며, 왕권강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북벌을 내세운 효종의 정책이 양반지배계급의 이익과 배치되면서 이에 대한 많은 반대가 제기되었다. 결국 효종과 송시열(宋時烈)의 독대가 이루어져,

 

사실상 효종의 부국강병론이 부정되고 군주수신(君主修身)의 선차성이 강조되었다.

 

1659년 5월 효종 승하 후 서인학자들과 남인학자들 간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가 효종에 대한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1차 예송(禮訟:己亥禮訟)논쟁이 발생했다.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의 서인은 효종은 차자(次子)이므로 대비의 복은 기년(朞年:1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군주의 지위와 권능을 신권(臣權)의 그것과 상대화하여 군주권을 일정하게 제한하려고 했다.

 

반면 윤휴(尹鑴)·허목(許穆) 등의 남인은 효종이 왕통을 이었으니 장자(長子)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대비의 복은 참최(斬衰:3년)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순히 복제(服制) 문제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학파간 이념논쟁 및 정치세력간의 갈등문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남인계의 윤선도(尹善道)가 송시열을 '이종비주'(貳宗卑主)로 공격하면서 정쟁으로 비화되었고, 일단 송시열 등의 서인계가 승리했다.

 

그러나 남인계는 오단(吳端)의 사위이자 효종의 아우인 인평대군가(麟平大君家)의 비호 아래 정치세력을 확대해가고 있었으며,

 

반면 서인들은 대동법 실시를 둘러싸고 김육(金堉) 중심의 한당(漢黨)과 김집(金集) 중심의 산당(山黨)이 대립한 이래 현종의 장인 김우명(金佑明)·좌명(佐明) 형제가 허목·허적(許績) 등 남인계와 결탁하여

 

송시열계의 예론(禮論)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張氏)가 죽자, 역시 조대비의 상복기간을 둘러싼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이것이 제2차 예송문제, 즉 갑인예송이다.

 

이 과정에서 현종이 죽고 숙종이 즉위하면서 대공(大功:8개월)을 주장한 서인에게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한 남인계가 승리하여 서인정권이 붕괴되고 남인정권이 성립되었다.

 

이후 남인들은 서인이 비판세력으로 공존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은 채 정국을 주도했으나, 병권의 향배와 서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분열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680년(숙종 6) 복선군(福善君)과 허적의 서자인 허견(許堅) 등이 역모를 했다는 고변으로,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계가 재집권하는 경신환국(庚申換局)이 발생했다.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은 군자유(君子儒)에 의한 소인유(小人儒)의 완전한 극복이란 논리하에 청남과 탁남을 불문하고 남인세력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러나 서인계는 송시열 중심의 노론(老論)과,

 

윤증(尹拯)·박세채(朴世采) 중심의 소론(小論)으로 분열되었다.

 

이는 양자간의 학문적·사상적 기반의 차이에서 발생된 것으로, 주자절대론과 주자상대론 간의 차이에서부터 명분론·의리론과 실리론 간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1687년(숙종 13) 희빈 장씨가 왕자를 낳고 1689년(숙종 15) 왕자의 명호를 정하는 문제로 숙종과 신료들 간에 첨예한 대립을 보이다가, 결국 그해 송시열의 원자상소반대를 계기로 서인은 노서를 막론하고 파직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다. 이것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그뒤 남인은 노소론의 숙청에 몰두하여, 잔여 노론을 제거하기 위해 '함이완고변사건'(咸以完告變事件)을 일으켰다.

 

그러나 자연재해 등의 만연으로 농민들이 남인정권으로부터 이반한 상황에서 숙종은 중인층을 끌어들인 소론에게 환국을 종용했고,

 

결국 1694년(숙종 20) 경술환국(庚戌換局)으로 남구만(南九萬)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정권이 성립되었다. 이후 노소론은 장씨의 처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론전제화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송시열계의 정통주자학에 근거한 집단과 척신의 결탁하에 노론벌열(老論閥閱)과 세도(勢道) 정권의 창출기반이 되었다. 이후 정권 담당층의 정치적인 정통성이 상실되어 사대부층의 지지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파행적인 정치운영이 계속되었다.

 

그결과 중세의 전형적인 정치운영형태인 붕당정치도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민중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이루어지면서 새로운 정치 형태가 모색되었다.

 

 

烏人 : 세계 최초의 공화주의자 정 여립...

 

 

鄭汝立(1546년~1589년 10월 17일, 43세)은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이자 한반도 최초의 공화주의 사상가로,

 

동인과 서인의 갈등 속에서 활동하다가 동인 선비 1,000여명이 죽는 큰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 선조 22년, 1589년)의 중심 인물. 그리고 이 사건을 수사하여 큰 공을 세워 출세한 이는 서인 정철.

 

죽도(竹島) 정여립은 ‘천하는 일정한 주인이 따로 없다’는 천하공물설과 ‘누구라도 임금으로 섬길 수 있다’는 하사비군론(下士非君論) 등 왕권 체제하에서 용납될 수 없는 혁신적인 사상을 품은 사상가.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선조대 인물인 정여립이 낙향 후 대동계를 조직, 역모를 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그의 생애는 조선 중기 정치와 사상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이 호국경으로 임명되어 공화정을 강화한 것이 1653이니, 정여립은 크롬웰 보다 최소 70여 년 앞선 공화주의자. (크롬웰의 체제는 결국 1660년 붕괴되고 왕정복고가 일어나지만.)

 

이렇게 보면, 정여립의 공화주의는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호민론(1600년도 초반), 정약용의 탕무혁명론(1790년대), 1894년의 동학 농민혁명까지 그 사상이 이어졌다고도 한다.

 

물론 정여립의 공화주의부터 호민론, 탕무혁명론, 동학농민혁명이 논리적이며 사상적으로 지속적 발전을 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 간에 존재하는 공통점이 크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정 여립의 생애사

 

1. 출생과 성장 배경

 

  • 출생: 1546년, 현재 전주시 완주군 상관면에 있는 생가터에서 태어남. 요즘 전주시의 도로명에도 정여립로가 있고, 상관면 월암마을에는 정여립 공원이 있다. 그의 생가터는 생가 집자리를 파서 숯불로 지져 없애고 소를 만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터를 파쏘라고 부르며 뒷산은 파쏘봉, 들판은 파쏘들, 은석동으로 돌아가는 모퉁이는 파쏘 모퉁이라고 한다. [1]
  • 가문: 중인 출신으로 비교적 평범한 가문이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재능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의 길을 걷습니다.

2. 학문과 정치 활동

 

  • 과거 급제: 1573년(선조 6년) 문과에 급제한 후 동인(東人) 계열로 활동하며 중앙 정계에 진출했습니다.
  • 사상적 기반: 당시의 성리학적 질서에 회의를 품고 대동사상(大同思想)을 주창했습니다.
  • 대동사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함께 잘 살아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사상으로, 당시 신분제와 왕권 중심의 사회 체제와는 충돌했습니다.

3. 동인에서의 역할과 갈등

 

  • 정여립은 동인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으나, 점차 서인(西人)과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 그는 서인 중심의 중앙 권력에 반발하면서 지방으로 내려가며 새로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 했습니다.

4. 고향으로 내려간 이후와 모반 혐의

 

  • 전라도 고부로 낙향: 정치적 갈등 속에서 낙향한 그는 이곳에서 학문과 사상을 전파하며 대동계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 대동계: 단순한 학문 모임으로 시작했으나, 서인들은 이를 모반(謀反)을 꾀하는 조직으로 해석했습니다.
  • 모반 혐의: 1589년, 정여립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밀고가 이루어지면서 기축옥사(己丑獄事)가 발생합니다.

5. 기축옥사와 비극적 최후

 

  • 기축옥사: 서인의 핵심 인물인 정철(鄭澈)이 주도하여 대대적인 탄압이 이루어졌습니다.
  •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은 반역 혐의로 몰려 고문과 처형을 당했으며, 그의 가족과 연루된 인물들도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 정여립의 죽음: 정여립은 체포되기 직전 자결하였고, 그의 죽음으로 기축옥사는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 이 사건은 단순한 모반 혐의를 넘어, 동인과 서인 간의 권력 다툼이 격화된 정치적 사건이었습니다.

6. 역사적 평가와 논란

 

  • 정여립의 사상: 정여립이 주창한 대동사상은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와 성리학 중심 사회에서 혁신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 기축옥사의 진실: 정여립의 모반 혐의에 대한 진실 여부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서인의 정치적 음모와 탄압으로 해석하며, 기축옥사는 정치적 숙청의 성격이 강했다고 주장합니다.
  • 비극적 인물: 정여립은 체제에 도전한 혁신적 사상가로서, 동시에 조선 시대의 정치적 희생양으로 평가됩니다.

정여립은 대동사상을 주창하며 신분제 사회에 도전한 급진적 사상가였지만, 당시의 정치적 갈등과 탄압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그의 죽음과 기축옥사는 조선 중기 동인과 서인의 격렬한 당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적 논란과 평가가 끊이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정여립의 하사비군론(下士非君論)

 

하사비군론은 조선 중기 정여립(鄭汝立)이 주장한 급진적 정치사상으로, 당시의 성리학적 신분질서군주 중심의 정치 체제에 도전한 혁신적이고 위험한 논리였습니다.

 

이 주장은 그가 주창한 대동사상의 일부로 평가되며, 이후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주요 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사비군론(下士非君論)의 핵심 내용

 

  • 하사비군(下士非君) - "하급 사대부(士大夫)는 임금이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이는 왕권을 비판하며 군주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리입니다.
  • 문제 제기: 기존의 조선 사회는 왕권과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체제였으나, 정여립은 이러한 질서에 반발하며 민본주의와 평등주의를 강조했습니다.
  • 군주의 무능함 비판: 정여립은 당시의 왕권(선조)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하사(下士, 즉 무능한 지배자)는 군주가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 군주제 중심의 통치 질서에서 매우 위험하고 도발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사비군론(下士非君論)의 배경

 

  1. 정여립의 대동사상(大同思想) - 정여립은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평등 사회를 주장하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대동사상을 주창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엄격한 신분제도와는 상충되었으며, 군주의 절대적 권위를 부정하는 논리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2. 동인과 서인의 정치 갈등 - 당시 정치권은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극심한 갈등 속에 있었으며, 정여립은 동인 계열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정여립이 주창한 하사비군론은 서인 세력에 의해 반역적 사상으로 몰려 탄압받는 구실이 되었습니다.
  3. 시대적 혼란 - 선조 시대는 왜란 전의 혼란과 함께 왕권이 약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정여립의 하사비군론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등장한 체제 비판적 사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사비군론(下士非君論)의 정치적 파장

 

  • 기축옥사의 근거 - 서인 세력은 정여립의 하사비군론과 대동계 활동을 반역으로 몰아 기축옥사(1589년)를 일으켰습니다. 이 논리는 왕권을 부정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규정되었으며,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반 혐의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 군주제의 도전과 반발 - 조선 시대에 하사비군론은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으며, 성리학적 질서와 체제를 뒤흔들 수 있는 위험한 사상으로 낙인찍혔습니다.

평가와 의미

 

  • 혁신적 사상 - 하사비군론(下士非君論)은 기존의 왕권 중심 체제와 신분제를 부정한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사상으로 평가됩니다.
  • 체제 비판 - 이는 조선 중기 지배 질서에 대한 비판이자, 평등주의적 사상의 단초를 제공한 중요한 논리입니다.
  • 반역 논리로의 왜곡 - 당시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정여립의 하사비군론은 체제 전복 사상으로 오해되었고, 기축옥사로 이어지며 그의 사상은 철저히 탄압되었습니다.

정여립의 하사비군론은 군주의 정당성과 지배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 혁신적 사상이었으나, 당시 정치 세력에 의해 반역으로 몰리며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한 개인의 반역이 아닌, 체제 비판사상 탄압의 역사적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돌이겨 보면, 1589년의 기축옥사는 조선의 내부적 갈등정치적 분열이 극에 달했던 사건이었으며, 이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단결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천 여명의 학자들을 학살하여 반대급부를 받은 정철과 같은 세력과 그렇지 못한 세력간의 갈등을 남겼다.

 

그리고 바로 3년 후인 1592년 부터 발발한 임진왜란은 이러한 내부적 약점을 외부 세력이 파고들어 발생한 침략 전쟁으로, 조선은 전란 초기에 국방 무력과 행정력의 부재를 드러냈다.

 

기축옥사로 잃은 인재와 체제 그리고 단결력의 손실이 너무 컸던 것. 따라서 기축옥사와 임진왜란내부 정치 혼란이 국가적 위기로 이어진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2024년 말에 발생한 윤석열 내란 사건은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제강점기와 군부독재의 기나긴 역사라는 기차 터널을 지나면서 피어난 여러 곰팡이와 독버섯들이

 

터널은 물론 기차와 승객에까지 퍼진 뿌리깊은 암덩어리들이 터져 나온 것이 12.3 내란. 이들을 잘 치료해야 임진왜란과 같이 우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들의 도전과 위협에서 우리를 지킬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