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 - 앞으로 5일간 수석 재산관리 집사님이 부재중인 관계로 대표이사님의 주요 저장된 글은 구정연휴에는 주요 블로그/SNS 대리 관리인(이 글의 주요 공유기인 대표이사님의 비지니스폰도 보유중...) GI IR실장인 제가 올리겠습니다...
암튼 현재 전쟁능력도 안되는 북한의 재남침 걱정이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해서든지 북한정권을 강력한 혈맹 미국의 도움(?)아래 붕괴시켜 비자발적으로 통일을 우리 주도로 얼른 실현시켜야 이 저출산/고령화에 의한 내수 경기 침체의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민족적 통일에 의한 대규모 토목/건설공사로 해결해야한다는 것을 구정연휴기간내내 생각중이다... 남한과 북한의 인구를 합치고 재외동포까지 1억원의 육박하는 인구를 만들어내야한다는 절대절명의 대한민국 위기 극복책말이다...
정통 진보주의자로서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만약 한반도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역성혁명인 위화도 회군없이 고려가 800년이상 한반도를 지배했다면 역사는 어떤 모습이였을까??
https://samsongeko1.tistory.com/12933
아따아~~~ 역시 고구려 후예들답군...!!! 내가 볼땐 미국과 우리가 똥줄타게 생겼다...
http://blog.daum.net/samsongeko/7951
잊혀진 해동성국의 나라 발해...
1. 건국
1-1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의 동향
668년 동북아시아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던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 공격으로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들은 당과 신라, 일본, 돌궐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당은 먼저 평양성을 깨뜨리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 보장왕의 항복을 받은 후 고구려 영토에 대한 지배를 위해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전국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하여 중국인 관리를 파견하고, 고구려인 중에서도 당군에 도움을 준 유공자들을 도독, 자사, 현령 등으로 임명해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
하지만 당의 의도와 달리 초창기부터 안동도호부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669년 보장왕의 서자 혹은 외손인 안승(安勝)이 4,000여 호를 이끌며 신라로 넘어가고, 요동(遼東) 지역에 있었던 주요 성들 가운데 신성(新城), 요동성, 안시성(安市城) 등 상당수가 여전히 항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해 668년, 당은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 의지를 꺾고, 부흥 운동을 근본적으로 막기 위해 지배층 및 부유하고 건강한 자들을 중심으로 28,000여 호를 뽑아 중국 내지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강압책은 오히려 반발을 불러왔고, 검모잠(劍牟岑)이 안승을 왕으로 옹립한 뒤 고구려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부흥 운동은 요동으로 번져 안시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강제 사민의 여파로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에 강력하게 저항한 것이다.
하지만 부흥 운동군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인 후 신라로 달아나고,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면서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 무렵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운동은 신라의 대당 투쟁과 결합되었는데 나당전쟁 초반부에 평안도, 황해도 지방에서 여러 차례 당군에 패하며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잦아들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 나당전쟁 후반부에는 전세를 뒤집고 신라 측이 승리해 결국 당이 한반도 침공을 완전히 포기하긴 했지만 그러는 동안 이미 고구려 중심지는 피폐해졌다.
당은 유민들을 안무하기 위해 장안으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에 봉하고 요동으로 돌려보냈다. 당인의 직접 통치 대신 고구려인을 전면에 내세워 고구려 유민을 간접통치하는 방식을 취해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가 겨우 안정되는 듯했지만 연남생이 679년 정월 29일 안동부 관사에서 병사하고, 보장왕이 680년 당의 의도와 달리 말갈족과 공모해 복국(濮國)을 도모하는 등 고구려 유민 통치가 다시 불안정하게 되었다.
한편 안동도호부 지역에 남아 있었던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당의 지배를 거부하고 신라, 돌궐, 일본, 동만주 일대로 이탈해 갔다. 이 때문에 안동도호부 근처에는 가난한 자만이 남고, 고구려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평양과 요동 일대는 허갈한 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677년 요동성에서 신성으로 옮겨진 안동도호부 역시 696년 거란족 수장 이진충의 난을 겪으면서 돌밭(石田)으로 변해 버렸다. 안동도호부는 698년 안동도독부로 격하되었고 704년 다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으나 고구려 옛 땅에 대한 당의 지배는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변화를 거듭했으며 시종 온전하고 확고한 통치를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구려 멸망 후 3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발해가 변방 지역인 동만주 지역에서 비로소 건국되었다. 이를 보면 고구려 핵심 지배 세력과 중심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억압책이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고구려의 부흥을 막기 위해 당이 강제 이주 정책을 실시한 덕분이었다. 28,000여 호가 중국 내지로 강제이주당했을 때 이들은 황무지로 옮겨졌는데 고구려인들 특유의 강인한 생활력을 바탕으로 황무지를 삶의 터전으로 일궈 냈다.
훗날 당 조정에서는 가장 훌륭한 복속민 정책으로 이를 거론하기도 했는데 복국 도모를 불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빈 터를 채우고 지역 개발도 하게 되는 등 당으로서는 이중의 효과를 보았기 때문이다. 고구려 유민의 강인한 정신력과 우수한 체력 등을 바탕으로 이룩된 일이었지만, 결국 유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멀리 떨어진 당나라의 변경 각지로 흩어진 유민들은 고구려 부흥은 꿈도 꾸지 못한채 살아남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었고 이들은 3세대 4세대로 내려가면서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멸망 후 신라로 귀부한 고구려 유민들도 많았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익산)에 안치하고 670년 8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금마저의 고구려국은 671년부터 682년까지 8차례에 거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는 독자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려는 강한 자주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 영토 안에 건국된 고구려이기 때문에 자주권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신라는 고구려국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때 따라가 고구려국의 외교를 감시&감독했다. 이조차 682년 6월을 끝으로 금마저 고구려국의 대일본 외교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674년 9월 신라는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다. 이는 고려국왕이란 칭호 자체를 부정하여 고구려에 대한 계승 의식을 제거하고 신라에 복속된 소국으로 격하시키려는 조치였다. 뿐만아니라 680년 3월 안승과 신라 왕실의 여인을 혼인시켰으며 안승에게 소판이라는 관등과 왕성(王城)인 김씨 성을 하사하고 수도인 경주로 옮겼다. 안승을 독립국의 왕이 아닌 신라 왕의 신하로 만드는 조치들이었다. 684년 대문의 반란을 계기로 보덕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대신 통일신라는 고구려계 병사들을 9서당에 배치해 고구려 유민 통합에 대해 나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발해가 건국된 결정적인 원인은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의지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유민들은 강제로 당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신라로 가기도 했으며 돌궐, 몽골 고원으로 또는 요동으로, 동만주나 일본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 멸망 전 인구를 69만 7천호라고 했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를 69만 7천’”명’”으로 축소하는 동시에 당으로 강제로 옮겨진 고구려 유민의 숫자는 ‘“명’”이 아닌 ‘“호’”로 4~5배를 곱하여 계산하는 이중 잣대로 어떻게든 발해국의 고구려 계승성을 부인, 왜곡하고자 용을 쓰고 있다. 트랜드가 바뀌어서 고구려 인구를 69만7천’”호’”를 인정하되 순수 고구려인은 70만명 가량으로 잡고 이들이 모두 끌려갔다는 식으로 왜곡하기도 한다.[1]
결과적으로 패전국이자 멸망하게 된 고구려의 유민들은 여러 지역으로 뿔뿔히 흩어지긴 했으나 당시 고구려인들은 농경 생활을 위주로 하였기에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기에는 힘들었으며 때문에 그 지역에 남아있는 고구려민들이 많았다. 또한 요동 지역의 유민들 특히 영주 성방 고구려로 기록된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고구려 계승의지는 발해의 건국에 큰 버팀목이 되었다.
1-2 7세기 후반 동북아시아 정세
발해 건국 이전 동북아시아 지역의 불안정한 국제 정세도 발해 건국의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라싸 지역 중심으로 성장한 토번, 즉 티베트는 당군과의 대비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당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국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고, 쿠틀룩과 백초르의 봉기가 성공하여 당으로부터 독립한 돌궐 제2제국도 여러 번 당의 변경을 공격하면서 많은 위협을 가했다. 이러한 요인으로 당은 발해의 건국을 견제하기보다는 토번과 돌궐에 대한 방어에 더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거란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일으킨 반란으로 인해 영주에 붙잡혀 있었던 걸걸중상, 대조영, 걸사비우 등이 탈출할 수 있게 되어 발해 건국의 환경을 긍정적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 당은 측천무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내치에 전념하여 안정을 도모했으나, 외부 팽창이나 이민족 견제에는 소극적이었다. 이러한 여러 국제정세적인 요인들과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 의지가 있었기에 발해 건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1-3 대조영 집단의 영주 탈출
그 후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옛 고구려 남부는 신라에 편입되었고, 평양에 있었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요동 지방의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고,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 28,000여 호를 중원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이때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걸걸중상(대중상) 부자도 고구려 유력층으로 분류되어 영주(榮州)로 끌려가게 되었다. 다만 중원 내지로 끌려간 것이 아닌 요동 인근의 요서로 끌려갔다는 점에서 의외로 초기에는 당에 협조적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
당시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운영한 전략 도시였다. 이곳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말갈인·거란인 등 다수 민족이 집결되어 있었다. 이들은 당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상태였다.
696년 5월 마침내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이진충의 난이라고 한다.
이 틈을 타서 고구려 장군 출신인 걸걸중상(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은 영주에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위해 만든 영주 성방 고구려라는 군사 조직의 지원과 함께 고구려 유민·말갈인과 함께 영주를 빠져나온다. 이 때 요동의 고구려 유민까지 규합해 전쟁의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던 만주 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걸걸중상이 죽으면서 그가 이끌던 무리를 대조영이 인수받았다. 대조영은 추격해 오는 이해고의 당나라군을 천문령 전투에서 크게 무찌른다. 그 뒤에 만주 동부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규합하여, 698년 길림성 돈화현(敦化縣) 부근의 동모산(東牟山) 기슭에 나라를 세웠다.
이진충의 난이 발해의 건국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지만 국제 정세와 역사적인 흐름 그리고 고구려의 부흥 운동을 봤을 때 언제든지 발해 건국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인은 있었다.
이처럼 고구려 유민들의 건국이 기정사실이 되고, 요서 지역에 대한 돌궐(突厥)·거란·해(奚) 등의 압력으로 요하 유역과 만주 일대에 대한 지배가 사실상 어려워지며, 영주의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돌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705년 당나라는 사신을 보내 대조영의 건국을 인정했다. 713년에는 대조영에게 발해군왕(渤海郡王)이라는 형식상 관직을 수여했고, 돌궐과 일본, 신라 등도 이후 발해를 자주국으로 인정하게 된다.
1-4 국호
나라 이름은 처음에는 진(震 또는 振)이었다가 뒤에 대조영이 당나라로부터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받은 것을 계기로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다만 일본과 외교시 고려(高麗)라는 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진이라는 국호는 걸걸중상이 측천무후에게 진국공(震國公)으로 책봉된 것에 근거한 것으로, 《구당서》와 《신당서》에 따르면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우고 진국왕(振國王 또는 震國王)을 자칭했다고 한다. 진단(震旦)으로 기록된 경우도 있는데 진단 자체가 산스크리트어로 동방을 의미하는 단어이며 줄여서 진이라고도 했기 때문에 결국 의미는 같다. 이 국호가 대조영이 단순히 당나라와의 외교에서 사용한 국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사용한 국호인지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으나, 앞서 언급한 진단이란 단어가 이미 있었기 때문에 유민 세력이 먼저 자칭한 후 당이 나중에 공식적으로 이걸 인정한 것으로 추측하는 견해도 있다. 유민세력이 자신들을 진단으로 자칭→당에서 봉국명으로 진국 책봉→고왕이 공식 건국을 선언하며 국호를 진국으로 사용이라고 봐도 전개가 얼추 맞아떨어지기 때문.
한편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스스로 '고려(高麗)'를 칭했던 적이 있었음이 《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 확인되었다.
상주하기를, "고려 국왕 대흠무가 말합니다."
[奏曰: "高麗國王大欽茂言"]
續日本紀 권22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3년 봄 正月(0759년 01월 03일(음))
출처 입력
참고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 무렵부터 공식적으로 국호를 '고려'로 사용했었기에, 이와 같은 행보는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표방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고구려와 고려를 구분하는 것은 후일 왕건이 세운 고려에서 고씨의 고려와 왕씨의 고려를 구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씨의 고려를 그 옛 이름인 고구려로 통칭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궁예의 태봉 또한 초창기에는 '고려'를 공식 국호로 사용했었고, 이를 '후고구려'라고 통칭하기 시작한 것은 왕씨의 고려인들이다.
특히 발해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復高麗之舊居]
출처 입력
라고 하여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했음이 확인되고 있기에, 실제 사용된 국호는 '고려'가 맞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고려를 국호로 사용하는 경우는 기록상 단 한 번뿐이다. 게다가 그 단 한 번의 기록 외에는 일본에게도 항상 '발해'라는 국호를 사용했기에 발해가 고려라는 국호를 계속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 고려 국호 사용은 일본에 한정됐고, 당·신라 등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그것을 뭔가 '돌출적인' 것인 사례로 보는 것이 맞다. 일부에서는 일본측에서 일방적으로 발해를 '고려'라 부른 것이라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나, 앞서 살펴본 기록들은 그 문맥상 명백히 발해측에서 고려를 자칭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기에 그 설득력이 부족하다.
당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한 이래 최소한 당나라와의 외교에서는 발해를 정식 국호로 사용했다. 발해라는 명칭의 유래는 행정구역명인 유주 발해군으로 지금도 발해(渤海)라고 부르는 바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후 당나라와 외교관계가 개선되면서, 문왕 때인 762년부터 당나라는 발해국왕으로 격을 높였다.
대조영 당시에는 국토가 서해(발해)와 접하지 않았고 그 위치도 유주 발해군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에서 어째서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것인지는 의문스러운 부분이다. 학계의 통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에 관해서 최진열 교수가 저서 『발해 국호 연구』를 통해 그 해석을 시도했는데, 당나라 때는 특정한 성(姓)마다 가장 유력한 가문의 본관을 사칭하는 경우가 빈번하여 옛 고구려 왕족 출신 유민들 마저 고(高)씨 가운데 가장 유명한 '발해 고씨'를 자칭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당나라 입장에서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표방하는 대조영 세력이 고려(고구려)를 부활시킨 것으로 직접 인정하기는 꺼려졌기에, 대조영에게 옛 고구려 왕족들이 자칭하고 있는 '발해 고씨'의 분가격으로 '발해 대씨'를 사성하여 '발해군왕'으로 책봉한 것으로 추정했다.
최진열 교수의 학설대로라면, '발해'라는 국호는 당나라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세력임을 간접적으로 묵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참고로 당나라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계승 세력으로 간접적으로 묵인한 정황은 이 말고도 더 있는데, 발해의 종족기원이나 대조영을 가리켜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 기록하여 고구려와 연관이 있음을 표현하기도 했고, 옛 고구려의 왕실인 '계루부(桂婁部)'에서 따온 '계루군왕(桂婁郡王)'이라는 작위를 발해의 태자에게 책봉한 사례가 있다.[7]
일단 일부 공개된 순목황후의 묘지명에는 '발해국순목황후'라고 쓰여있어, 최소한 발해가 발해인 스스로 실제로 사용한 국호 중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2. 영토 확장
1대 고왕(대조영)은 최초 근거지의 주변 지역을 장악해 나갔는데,구체적인 세력 범위는 알 수는 없으나 일단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및 북만주에 대한 영토는 확실히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건국 초기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 관등을 수여하며 우호 관계를 다지기도 했다. 이 내용은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만 나오는 말이다. 북국(발해)에게 윗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에 감사하는 표문. 발해와 신라 간 외교 분쟁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발해가 당나라에 자국을 신라보다 외교 의전 상 우위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한 것에 대해 당나라가 거절한 것에 관한 내용이다. 때문에 최치원의 해당 발언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대아찬이라는 직위도 재미있는 것이, 6두품의 승진 상한인 6관등 아찬을 넘어서는 진골의 품계라는 점이다. 고구려 부흥 운동 시의 고구려 왕족에게 진골의 골품을 준 것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하지만 발해가 문왕 때부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대내외에 표방하면서 신라와 관계가 악화된 것으로 파악되며, 특히 721년에 신라가 강릉 방면에 장성을 쌓은 일은 북쪽의 발해를 경계한 행동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2대 무왕(대무예) 때는 흑수말갈의 귀속 문제를 두고 당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발해 국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난다. 그래서 온건론자인 발해왕의 동생 대문예가 당나라로 망명하는 사건이 벌어지는 등 긴장이 고조되다가 결국 당나라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무왕은 산동의 제1 교역항 등주(登州)에 장문휴(張文休) 제독을 보내 선제 공격하여 자사(刺史) 위준(韋俊)을 전사시켰다. 또 무왕은 해(奚)족과 연합해 요서 일대를 공격하여 마도산 전투에서 이겼지만 당군의 방비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회군했다.
이에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발해를 공격했으나 격퇴당했다. 이 때 신라군은 겨울에 북정(北征)을 감행한 탓에 교전은 하지 못하고 퇴각한 것으로 되어 있다. 애초에 발해는 신라 방면으로 본격적인 확장 의지를 보인적이 없기 때문에, 이전까지 당나라와 대립하다 발해의 등장으로 겨우 화해한 신라 입장에서는 공격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발해와 급격히 화해하고 교류하게 된 것이 그 이유다.
발해는 이렇게 당나라와 접전을 벌이는 한편으로 이 시기부터 당나라식 관제(官制) 수입이 본격화되었고, 발해의 지방 통치도 일원적인 주·부·현제로 편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3. 혼란과 극복
3대 문왕(대흠무) 사후 약 30년 동안, 4대 국왕인 폐왕부터 9대 국왕인 간왕까지 왕이 6번 바뀌는 혼란기가 지속되다가 10대 국왕인 선왕(대인수)이 즉위함에 따라 혼란이 진정되었다. 선왕은 고왕 대조영이 아닌 그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이었다.
4. 전성기(해동성국)
선왕은 정복 사업과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며, 특히 당과 화친을 체결해 그의 치세동안 발해는 중원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다. 흑수말갈이 발해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으며, 학자에 따라서는 요동 지방을 실효 지배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 《요사》에 "당 원화(806~820) 중에 발해 왕 대인수가 남쪽으로 신라를 정벌했다(唐元和中, 渤海王大仁秀南定新羅.)"는 기록을 보건대, 발해가 신라의 북쪽 경계 바로 위까지의 영역을 확보하여 대동강을 경계로 양국이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이동휘, 경계로 보는 신라와 발해의 관계, 역사와 경계, 경남사학회, 2003.)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이 시기에 발해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는데다가, 《요사》가 워낙 두찬(杜撰)으로 악명이 높은 사서라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어떤 식으로든 발해의 군사적 행동이 있었고, 그 결과가 발해의 영향력이 신라 북변에까지 미치게 된 것일 가능성은 크다. 정확히 발해 선왕의 시기인 신라 헌덕왕 18년(826)에, 대동강변에 장성을 쌓은 기록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5경 15부 62주의 행정 체제도 선왕 때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 아래에는 현(縣)이 설치되었는데, 일부만 확인되고 있을 뿐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고 있지 않다. 일부 사례로 미루어 보건대 62주 아래에 약 200~250여 현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발해가 '해동성국'으로 불리고 5경 15부 62주의 행정체계가 완성된 것은 선왕 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지만, 앞서 살펴본 《요사》에는 11대 대이진 때에 이르러 15부 62주가 완성되어 '요동성국(遼東盛國)'으로 불렸다고 나와 있으며, 특히 대이진이 '참호개원(僭號改元)'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해는 그 이전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왔으므로 개원은 별 의미가 없는 표현이지만, '참호'란 존호를 참칭했다는 의미이므로 '황제'를 직접 자칭했다는 의미가 된다.
금석문을 통해 살펴보면 발해는 문왕 때 임금을 '황상(皇上)'이라고 존칭한 것과 간왕의 부인을 순목황후라고 표기한 사례가 확인되는데, 이러한 황제격 표현을 사용하는 와중에도 발해의 임금은 동일한 금석문에서 '문왕(文王)'·'간왕(簡王)'으로 명기하고 있기에 공식적으로 황제 칭호를 사용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이진 이후로는 중국측 기록에서 발해왕들의 시호가 전혀 알려지지 않는데, 일반적으로 당나라의 혼란으로 외교가 어려워지면서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 해석하지만, 대이진 이후로 대건황과 대현석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이 왔음을 기록한 것이 버젓이 남아있기에 대이진과 대건황의 시호만 콕집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다. 《요사》의 기록을 신빙할 수 있다면, 이를 대이진 이후로 황제를 직접 칭하면서 이를 부정시한 당나라 사람들이 일부러 기록하지 않은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해지나, 무엇을 근거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긴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한 이를 적극적으로 채택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5. 쇠퇴
870년대부터 국력이 다시금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추측된다. 특히 황소의 난으로 당나라의 통치체계가 붕괴되면서 당나라와의 외교나 그에 관한 기록마저 사실상 단절되었기에, 14대 임금 대위해의 경우 오랜 기간 존재 자체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무려 1000년도 더 지난 1940년에 진위푸(金毓黻)의 발견으로 다시 세상에 알려지게 될 정도가 된다.
《삼국사기》에서는 886년 신라 헌강왕 재위 기간에, 신라 북부 북진(北鎭)에서 보고하기를 “적국 사람이 진에 들어와 나무 조각을 나무에 걸어 놓고 돌아갔다.”고 말하면서 그 나무 조각을 가져다 바쳤다. 거기에는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모두 신라국과 화친하고자 한다.”는 열다섯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이 보로국과 흑수국은 지금의 북한 안변군 지역에 살던 말갈 계통 부락으로 추정된다. 이는 발해가 멸망하기 40여년 전인 9세기 후반에 발해가 신라와 인접한 한반도 북부 지방에 대한 통치력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말갈 세력이 거의 독립국처럼 신라와 외교를 시도하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9세기 말에는 신라와 국격을 둔 논쟁이 벌어졌는데 빈공과 합격자 순위(등제서열 사건), 사신의 대우(쟁장사건)에 있어 발해와 신라간 경쟁이 일어났다. 최치원이 897년에 쓴 《사불허북국거상표》는 이 때 당나라가 신라 사신이 발해 사신보다 상석에 서도록 조치한 것을 신라 측에서 사례하기 위해 보낸 표이다. 한편 선왕 때 발해의 국력이 워낙 융성했기 때문이 상기한 사건이 선왕 때 일어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 사건들은 선왕 재위기보다 훨씬 뒤인 9세기 말엽에 있었던 일인데 공교롭게도 이 시점은 신라에서도 후삼국시대가 개막된 직후였고 당나라 역시 멸망하기 직전인 때였다. 발해는 신라와 당의 혼란스러운 내부 사정을 알고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910년대에는 한때 궁예의 부하였다가 이탈해 동북방 골암성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호족 윤선이 흑수말갈을 휘하로 끌어들여 태봉의 변방을 초략했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경명왕 때인 921년 2월에는 말갈의 일부인 달고의 무리가 신라의 북쪽 변경을 공격했고 이를 왕건 휘하의 장수 견권이 물리쳤다고 적혀있다. 아무래도 이 때쯤이면 발해의 남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거의 무너진 듯 하다. 함경도 지역의 이 말갈족들은 이후 여진족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고려시대에도 고려에 저항하고 살다가 조선시대 세종 치세에 완전히 한반도로 편입된다.
6. 멸망
발해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9세기 들어 당(황소의 난, 874~884년)과 신라(후삼국 분열)와 함께 지방 통제력을 잃어가는 쇠퇴의 징후가 발견되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거란의 중심지 요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발해는 15대 왕(인선)을 끝으로 갑작스럽게 멸망해 버리고 만다. 순식간에 요(遼)나라 태조 야율아보기 및 2번째 황자 야율요골(耶律堯骨) 등이 이끄는 기병대에 상경(上京)이 함락된 것이다.
국가 존속 기간이 228년으로, 한국사의 주요 국가들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존속 기간이 짧은 편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왕조 평균 존속 기간이 대체로 긴 편이었던 한국사의 왕조치고는 짧은 것. 예를 들어 중국사 왕조들과 비교하면(후한 이후) 1위 청나라 296년, 2위 당나라 289년, 3위 명나라 276년 다음으로, 4위 요나라의 218년보다도 긴 최상위권이다. 물론 송나라도 북송+남송 기간 다 합치면 300년을 넘는다.
《발해고》와 《요사》에 따르면, 요태조 야율아보기는 925년 12월 16일에 발해를 공격한다는 조서를 내렸고, 12월과 윤12월 사이에 당시 요나라의 수도인 상경임황부를 떠나 출정했다. 기록을 보면 지나가면서 목엽산, 살갈산 같이 요나라가 성스럽게 여겼던 영산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병력을 이동했다. 이는 당시 거란족의 전통 중 하나였다.
이후 윤12월 29일, 발해와 요나라의 국경지대인 상령(현재 지린성 사평 서쪽의 산맥.)에 도착한 요태조는 부여부를 바로 포위한다. 사실상 이 날부터 요나라의 발해 정복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급습에 별다른 준비가 안되었는지 부여부를 관할하던 부여성은 3일만인 926년 1월 3일(기미일)에 함락된다. 부여부를 점령한 요나라 군대는 1월 9일(병인일) 밤에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의 수도성인 '홀한성'을 포위한다.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1월 12일(기사일)에 항복을 청하는데, 3일만에 항복을 청한 것을 봐서는 부여성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수비 대책이 전혀 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항복한 그날 발해가 역사에 지워진 것은 아니다.
1월 12일에 항복하겠다고 메세지를 띄운 대인선이 진짜 항복하러 나온 것은 1월 14일인데 야율아보기는 이를 우선 돌려보냈으며 1월 19일에 성 안의 무기를 수색하러 병력을 보냈지만 발해 순찰병에게 죄다 살해당한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딱봐도 이건 거짓 항복이다. 대인선은 항복하는 척 하면서 시간을 늦추려한 것이고 야율아보기도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선 돌려보내고 성 안의 무기부터 압수하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발각되자 바로 항복 협상은 결렬되었는데 수비 준비가 정말 안되었는지 하루만인 1월 20일에 홀한성이 함락당한다. 한번 속였기 때문인지 함락당한 뒤에는 예우 같은건 없고 요나라 군대가 왕을 에워싸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까지가 '상경용천부'가 무너진 기록이다. 사실상 수도가 무너지고 왕이 사로잡힌 시점에서 거의 끝난 것이긴 하지만 기록을 보면 적어도 926년 1월에 발해가 갑자기 사라진 정도는 아니고 마지막까지 버틴 장령부는 8월까지 가야 요나라 손에 무너진다. 발해부흥운동과는 별개로 봐야하는 것이 부흥운동은 한번 망한 다음에 벌어진 운동을 말한다. 따라서 요나라의 발해 정복은 8월 즈음에 완료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7. 멸망이후
7-1 고려의 반응
고려는 발해 멸망 이후 자신들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수 많은 발해유민들을 받아들였으며, 이는 고려가 공산 전투에서 입은 엄청난 손해를 충분히 메우고도 남을 정도의 어마무시한 규모였다. 그리고 934년에는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을 비롯한 수 만 호(戶)에 달하는 발해유민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대광현은 왕씨 성을 하사받아 고려 최상위 귀족 계층으로 편입되었으며, 발해 왕가의 후손인 대도수 역시 여요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
《고려사》 세가의 대광현 내투 기사에는 규모가 무리 수 만[衆數萬]이라고만 적혀 있는데, 이때의 단위는 호(戶)다. 최승로 열전에 수록된 이른바 '시무 28조'에 "渤海旣爲丹兵所破, 其世子大光顯等, 以我國家擧義而興, 領其餘衆數萬戶, 日夜倍道來犇."라고 되어 있다. '수 만'을 2~4만 정도로 비교적 낮게 잡아도, 934년 한 해에만 —범위를 넓혀도 발해가 멸망하는 926년부터 왕건이 사망하는 943년까지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대략 적게 수십만에서 많게는 이보다도 더 많은 발해 유민이 고려 내부로 유입된 것이다. 《고려도경》에 기록된 12세기 고려의 인구가 210만에 불과했던 걸 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치다. 물론 《고려도경》의 인구 수는 과소 평가일 가능성이 높지만 이는 발해 유민 투화 기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당연히 유이민에 대한 모든 기록이 남았을 리는 없고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들에 대해서만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10]
한편 고려에서는 스스로를 고구려를 이었다고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를 원수처럼 여겼다. 실제 고려 태조 왕건은 그 나라를 '본래 우리와 친척인 나라[本吾親戚之國]'라고 표현할 정도로 발해를 친근하게 여겼다.
발해에 대한 동족 관념에서 비롯된 왕건의 반 거란주의는 거란의 사신이 가져온 낙타들을 다리 밑에 묶어 전부 아사시키고, 사신들은 전부 유배보낸 것(만부교 사건)으로 극명히 표출되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중국에서 우호 사절과 함께 한국으로 보낸 판다를 청계천에 묶어 두어 전부 다 굶겨죽이고 사신들은 지방의 교도소에 투옥시키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다.이러한 고려의 대 거란 적대 정책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한 발해에 대한 친근감도 있었겠지만 자국에 투항한 발해유민들을 국가 체제에 통합하기 위한 실리적인 목적도 작용했을 것이다.
왕건은 거란과 같은 북방 민족인 여진족을 인면수심이라며 경멸한 바 있고, 훈요 10조의 거란에 대한 경계를 당부한 부분에도 발해 유민들이 대거 자리잡은 한반도 북부는 국방상 요지이기 때문에 이들을 제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면, 거란의 외침 시에 제대로 항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거나, 최악의 경우 적에게 호응하는 상황까지도 닥칠 수 있었다.
반면 200여 년 간 독립 국가를 영위해 온 이들을 제대로 흡수할 경우 변방 안정은 물론이고 국력 신장에도 도움이 될 만했다. 그런 이유로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발해 유민들에게서 찾는 견해까지 있을 정도다.
발해 멸망 이후, 계속된 발해부흥운동에 대해서도 고려 내부에서는 도와주자는 의견과 무시하자는 의견이 서로 대립하는 등 통일되지 않은 성향을 보였고 결국 서너 차례의 유의미한 발해부흥시도가 있었음에도 고려는 난민을 받는 것 이상의 적극적인 지원을 주저한 바 있다. 오히려 지원이라기 보다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이익을 얻는 계기로 역이용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정통성 승계 문제에 현실적 국제 역학 질서, 막 통일된지 얼마 안되는 고려의 내부 통제 문제 등의 여러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려는 심지어 현종 때 까지도 지방 세력의 힘이 상당했으며 왕실에서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전횡으로 혼란스러운 데다가 거란과의 전쟁이 종료된 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당연히 내부를 통제하는 동시에 행정망을 정비해야 했던 셈. 당시 국왕인 현종 역시 당시 발해 부흥을 자처한 흥료국을 돕는 것을 꺼린 이유가 바로 이 부분 때문이었다.
발해는 북방의 이민족인 거란에게 멸망하였고, 발해 스스로가 편찬한 역사서가 현재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帝王韻記)》 등에 언급된 것을 제하면 한반도 국가의 관찬, 사찬 사서의 서술 범위 밖에 있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실학자 류득공이 《발해고》를 저술 중 고려가 망명해온 발해 유민들의 증언을 통해 발해의 역사를 기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발해의 역사를 남기지 않는 것에 안타까워 했다.
그외에도 후삼국시대에 고려로 귀부하지 않았지만 함경도 일대에 살던 발해, 말갈계 주민들은 고려와 조선의 북진 과정에서 한민족 원류에 가까스로 합류했다.
7-2 요나라와 금나라에 남은 발해유민
고려로 피난하지 않은 발해인들은 대부분 만주 지역에 남았다. 고청명과 같은 발해 유민들은 여요전쟁에서 요나라에 징집되어 발해인 부대를 조직해 고려군과 싸우는 동족상잔을 벌이게 되었다. 고려군 측에서 싸운 발해 유민 출신 장수로는 대도수와 대회덕 등이 있다.
완안아골타가 금나라를 건국하고 요나라를 공격할 때 천조제는 발해인 부대를 보내 아골타를 막으려 했으며 금나라 역시 송나라를 공격할 때 수만명에 달하는 발해인 부대를 운용한 사례가 있다. 또한 여요전쟁 도중에 요나라가 고려를 침공하여 본국으로 끌고 간 발해유민도 있었다.
그러나 금나라 시기 이후 발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끊기면서, 금나라 중후기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고려에 직접 귀순하거나 남경남해부와 같이 역사를 거치며 한민족 국가의 영역에 합류하지 못한 발해인들은 한국인의 원류 집단에서 이탈하는 대신 여진이나 거란에 합류하였다.
7-3 발해부흥운동
발해 멸망 후 발해 부흥 운동을 일으킨 지역이 몇군데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대부분 진압당했다. 한편으로 이 점은 요가 중앙부터 공격해 발해를 무너뜨렸다는 근거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이후 무려 200년간 부흥 운동이 벌어진다는데 의의가 있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
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 소설. 작가는 길승수. 춘천시 출신에 서울대 역사학과를 다녔다가 중퇴하였으며, 역사 전문 소설가로 JTBC 〈평화전쟁 1019〉 제작에 대본 작가 겸 자문으로 참여했었다. 또한 자신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은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에서도 자문으로 참여했다.
2. 줄거리
조선에 이 순신이 있다면 고려에는 양규가 있다!
작가 길승수의 펜 아래 고려의 숨겨진 영웅들이 다시 태어난다!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용맹함과 지략으로 고려를 구한 양규와 그를 따르는 장병들의 가슴 뜨거운 전투를 만난다!!
한때 찬란했던 신라는 그 영광을 잃어가고, 새로운 힘, 왕건에 의해 세워진 고려가 부상한다. 왕건의 꿈, 그리고 그의 북진정책 아래, 고구려의 후예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되찾고자 한다. 그러나 북쪽의 거대한 제국 거란은 계속 세력을 불려 나가면서 만리장성을 넘어 ‘연운 16주’라는 지금의 중국 북경을 포함하는 지역을 차지하고 제국으로 성장한다. 고려와 거란 사이에 팽팽한 전운이 감돌던 중 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고려를 침공하는데 이것이 ‘거란의 1차 침공’이다. 고려는 선봉대가 거란군에 패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지만, 서희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막아내고 협상을 통해 압록강 남쪽의 땅인 ‘강동 6주’를 개척한다. 그로부터 17년 후 벌어지는 ‘거란의 2차 침공(1010)’을 다룬 것이 바로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이다. 당시 고려에서는 강조(康兆)가 고려 왕 목종(穆宗)을 폐위하고 현종(顯宗)을 옹립했는데, 거란 황제 야율융서는 이를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고려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나 고려 현종이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항전을 결심하고, 서북면도순검사 양규, 구주별장 김숙흥, 통군녹사 조원, 애수진장 강민첨 등의 활약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거란의 2차 침공 시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은 누가 뭐라 해도 서북면도순검사 양규다. 그가 없었다면 고려는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양규는 고려시대에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모두에게 기억되었으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잊힌 인물이 된다. 양규와 김숙흥이 고작 2천여 명의 병력으로 40만의 거란군을 상대하는 모습이라든지, 양규가 7백 명의 결사대로 이루어낸 곽주탈환작전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양규를 비롯한 용장들의 분전으로 거란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압록강을 건너 퇴각할 때 말과 낙타, 무기를 모두 잃어버리고 빈 몸으로 돌아간다. 사실상 패전과 다름없었다.
양규 외에 김숙흥, 현종, 강감찬, 조원, 강민첨 등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심인물이다. 특히, 조원과 강민첨 같은 중하급 관료가 특별한 역할을 한다. 서경(평양) 지휘부가 붕괴될 위기에 놓였을 때 그들은 용감하게 앞장서 전략을 세우고 도시를 방어하는데, 만약 그들이 서경을 방어하지 못했다면 고려는 이후 10년간의 전쟁에서 더 큰 피해를 봤을 것이다. 그들은 이후 계속되는 거란의 침공에서도 빛나는 공로를 세운다. 고려는 천천히 국력을 기르면서 강감찬의 조언대로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게 되고, 이렇게 모인 힘은 9년 후 구주대첩의 승리로 열매를 맺는다.
소설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은 작가가 《고려사》, 《요사》, 《송사》 등의 역사서를 깊이 파고들며 연구하여 정확하게 재구성한 것으로 오랜 세월 잊혔던 가슴 아픈 전란의 장면을, 그리고 눈시울 붉어지는 역사의 명장면을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냈다. 항전과 국력의 회복,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수많은 영웅의 희생과 노력을 바탕으로 소설은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엄하게 마감하며, 이 시대의 위대한 영웅을 기리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작가는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사실과 픽션을 절묘하게 엮어냄으로써 독자들에게 그 시대의 생생한 현장을 전했는데, 이 점에서 작가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살아있는 역사 속으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고려의 영웅들과 그들의 눈물겨운 승리를 직접 경험해보자. 이 소설은 단순한 역사 이야기를 넘어 인간의 용기, 희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대 서사시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발매 현황
거란의 고려 침공을 배경으로 하며 1부부터 3부까지 있지만, 출간 순서는 2부가 먼저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3부가 출간되고, 1부도 출간 예정이다. 3부는 집필 중이다.
- 제1부 부제는 미정이고 거란의 1차 침공을 다룬다.
- 제2부 고려의 영웅들
- 제3부 귀주대첩
작가 길승수는 2018년에 거란의 2차 침공을 다룬 소설 《고려거란전기: 겨울에 내리는 단비》를 출간했다가 2023년 11월 2일에 재출간해 제목이 《고려거란전쟁: 고려의 영웅들》로 바뀌었다. 上편, 下편으로 구분되어 있다. 2023년 11월 11일부터 방영을 시작한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원작이다.
또한 본작을 원작으로 삼은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방영되기 전에 동명의 역사책 《고려거란전쟁》을 출판했다. 기존 소설은 2차를 중점적으로 다루었고, 해당 역사책은 고려 거란 전쟁에 대한 내용을 모두 다루고 있으며 높은 이해도와 섬세한 묘사로 호평받는다.
4. 등장인물
- 양규: 서북면도순검사, 형부낭중. 중화 사람으로 전임 중서사인 양연(楊演)의 아들이며, 양연은 제1차 여요전쟁 때 봉산에서 전사했고 아버지가 전사하자 오로지 무예와 병법을 익혔으며, 양연이 목숨을 다한 공으로 994년에 태상부 녹사에 임명되었고 군사통으로 명성을 얻었다.
- 김숙흥: 구주군 본부낭대 별장. 경순왕의 손자. 아버지 김선(金鐥)이 제1차 여요전쟁이 화의로 끝나고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연안까지 확보하기 위한 원정군에 지원해 구주로 이주해 5년간 구주방어사를 지내고 통주방어사를 역임하다가 1005년에 사망했으며, 음서를 통해 구주교위가 되었다. 고려군이 무로대 공격을 했다가 실패하면서 거란에게 포위된 구주군을 구원하기 위해 거란군을 기습해 고려군을 구하는 활약을 하자 구주부방어사에 임명되었다.
- 조원: 통군녹사.
- 강민첨
- 현종
- 강감찬
- 강조: 행영도통. 고려의 총사령관으로 삼수채에서 고려군을 이끌었지만 거란군에게 패하면서 붙잡히며, 성종의 항복 권유를 받자 항복을 거부하고 거란군에게 죽는다.
- 이수화: 흥화진부사, 장작주부. 제1차 여요전쟁 후 요나라와의 국교를 위한 통역을 익히도록 요나라에 파견되어 진소곤의 집에 머물러 5년간 지내다가 귀국해 비서성 교감에 임명되었고, 요나라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했고, 요나라에 사신단으로 자주 가서 요의 관리들을 잘 알았다.성종이 강조를 보내면 회군하겠다는 글을 보내자 회군해달라고 요청하는 표문을 썼다.
- 정성: 흥화진사, 호부낭중. 경주 사람으로 양규보다 다섯 살 많았고 양규와는 비슷한 시기에 관직 생활을 시작해 위위시에 같이 근무했으며, 양규의 추천으로 흥화진사가 되었다.
- 보량[2]: 도령중랑장. 덕수현 사람으로 조부 도현은 태조의 군대에서 공을 세워 이씨 성을 하사받았고, 제1차 여요전쟁 때 29살로 감문위의 교위로 지냈다. 화친을 맺으면서 여진을 몰아내고 압록강 연안까지 확보하기 위한 원정군에 지원해 구주로 이주해 김선 휘하에서 오랫동안 일했고, 8월까지 곽주에서 근무하다가 거란의 침입이 확실해지자 구주에 부임했고, 거란이 침입하자 구주의 군사 전체를 통솔했다.
- 장호: 판관.
- 최사위: 통군사. 장수들을 거느리고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무로대를 공격하는 거란군을 기습하려 했지만, 남쪽에서 거란의 기병이 나타나는 바람에 공격에 실패했다.
- 이현운: 행영도통부사. 삼수채에서 거란군에게 패해 사로잡히자 살아남아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거란군에 항복하고 이에 분노한 강조에게 걷어차인다. 거란에 전향한 후 양규가 있는 흥화진에 사신으로 가서 통주성이 함락되고 고려군이 궤멸했다고 거짓말을 하나 양규에게 간파당하고 그대로 붙잡혀 참수당한다.
- 장연우: 행영도통부사, 병부시랑.
- 노전: 판관. 강조 휘하의 참모 역할을 하면서 강조에게 여러 계책을 제시했고, 거란군이 삼수채의 본진을 기습하면서 붙잡혔다.
- 승이인: 수제관.
- 최충: 수제관. 삼수채에서 패하자 달아났다.
- 안소광: 행영도병마사.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크게 패하자 신영한에게 곽주로 갈 것을 명령한다.
- 이방: 우군병마사. 군사들을 이끌고 무로대에 있는 거란의 군사를 공격하려 했지만, 도중에 거란군과 조우하자 기습이 실패해 물러났다.
- 송린: 통군부사, 호부시랑.
- 황보신: 통군판관, 좌사원외랑.
- 채온겸: 흥위위 대장군. 최사위의 무로대 공격군에 종군했지만 무로대 공격에는 실패해 통주성에 주둔했다가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고 성으로 오자 서쪽 성벽의 골짜기로 가게 했다.
- 원영: 통군판관, 시병부원외랑.
- 김정몽: 우군병마부사, 형부낭중. 이방 휘하에서 참전해 무로대에 있는 거란의 군사를 기습하기 전에 거란군과 조우하자 후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유장: 병마판관, 내알자. 이방 휘하에서 참전해 무로대에 있는 거란의 군사를 기습하기 전에 거란군과 조우하면서 김정몽이 후퇴해야 한다고 하자 명령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고, 통주성에 주둔했다가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크게 패하면서 고려군이 통주성으로 들어오려고 하자 거란군이 성을 들어올 수 있다고 해서 성문을 여는 것을 반대했다.
- 원우: 천우위 대장군. 이방 휘하에서 참전해 무로대에 있는 거란의 군사를 기습하기 전에 거란군과 조우하면서 이방이 의견을 묻자 군사들을 믿어보자며 싸워야 한다는 뜻을 드러낸다. 삼수채에서 거란군의 공격을 받고 강조가 붙잡히자 안소광에게 알린다.
- 이섬: 구주중랑장. 제2차 여요전쟁 당시 44살이다. 흥화진과 용만 사이의 길을 막아 거란군과 맞서다가 포위되었다가 김숙흥의 구원으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최원신: 구주방어사
- 장극맹: 구주방어부사.
- 곽원 : 판관, 기거사인.
- 윤징고 : 판관, 시어사.
- 서긍: 별장.
- 박수암: 교위.
- 박충숙: 중군병마사.
- 노의: 감찰어사.
- 양경: 감찰어사.
- 이성좌: 감찰어사.
- 서숭: 수사재승.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대치하는 도중에 후방을 순시하다가 거란군의 공격으로 삼수채의 고려군이 무너지자 후퇴했고, 노제와 합류했다가 군사들을 지휘해 추격하는 거란군에 맞섰지만 전사했다.
- 노제: 주부.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무너져 후퇴하다가 부상을 입은 혁연을 보호했고, 서숭과 함께 추격하는 거란군에 맞섰지만 전사했다.
- 신영한: 좌우위 대장군.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고 강조가 사로잡히자 안소광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곽주로 퇴각했는데, 완항령에서 야율포고가 이끄는 거란군을 기습해 물리쳤다. 부상을 입자 김훈에 대해 용맹하지만 지휘를 하는 장수라고 여겨 이원에게 지휘권을 건네줬다.
- 이원: 장군. 좌우위맹군을 이끌고 신영한의 명에 따라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자 곽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는 거란군과 싸웠으며, 완항령 전투 후에는 부상을 입은 신영한에게서 지휘권을 받았고, 본래 안주성으로 가려고 했지만 청천강이 얼어서 거란군이 쉽게 진입할 수 있는데다가 평지였기에 군사들을 이끌고 서경으로 후퇴했다.
- 김계부: 좌우위 초군 장군.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자 신영한 휘하에서 후퇴하는데, 신영한이 이원에게 지휘권을 넘겨주고 이원이 안주 대신 서경으로 가겠다고 하자 이원에게 찬동하며, 김훈이 반발해 부대를 이끌고 떠나자 이원을 위로했다.
- 김훈: 기군 장군.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무너지자 곽주로 퇴각했는데, 완항령에서 야율포고가 이끄는 거란군을 기습해 물리친 후에 신영한이 부상을 입고 직급상 받아야 할 자신이 아니라 이원에게 지휘권을 건네자 불만을 품었으며, 본래 가려고 한 안주 대신 서경으로 가려고 하자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안주로 후퇴했다.
- 정신용: 금오위 오령 중랑장. 제2차 여요전쟁 때 44살로 제1차 여요전쟁 때 종군했지만 거란과 전투하지는 않았고, 강동 6주 개척 때 여진족과 여러 차례 전투를 했다.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웠으며, 강조가 붙잡히고 고려군이 무너지자 철수했다.
- 고적여: 황낭대 낭장.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웠으나, 강조가 붙잡히고 고려군이 무너지자 철수했다.
- 고열: 천우위 교위. 흑수 출신. 뛰어난 활 솜씨로 약관에 중금에 뽑히고 7년을 복무했다가 진명도부서 교위가 되었다가 전쟁에 대비해 통군부에 소속되었다. 무로대의 거란군을 기습하는 것에 실패하자 보승군의 철수 시간을 벌기 위해 채온겸과 함께 거란의 기병에 한 차례 돌격했다.
- 노정: 행영도병마부사, 어사중승.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고 강조가 사로잡히자 강조를 구하기 위해 거란군을 공격했지만 전사한다.
- 최질: 통주 도령중랑장. 통주성에 주둔했다가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크게 패하면서 고려군이 통주성으로 들어오려고 했고, 거란군 때문에 아군을 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려고 하자 반발하지만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
- 이원구: 통주방어사.
- 양백: 백갑대 낭장.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고 강조가 사로잡히자 강조를 구하기 위해 거란군을 공격했으며, 포로로 잡힌 강조가 물러나라고 했지만 강조를 구하겠다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다.
- 박성: 항마군의 금오위 낭장.
- 광숙: 항마군의 보제사 대사.
- 최원: 김숙흥 휘하의 교위. 거란에게 포위된 구주군을 구원하기 위해 기습을 하는 김숙흥을 말렸지만, 몰래 욕을 하면서 그를 따라 돌격해 이섬의 구주군을 구원해 위기에 벗어나도록 했다.
- 박명금: 용천교위.
- 황호맹: 구주군 낭장.
- 소충현: 중랑장.
- 진명: 구주낭장. 무로대를 공격하는 것에 참가헀다가 실패했다가 김숙흥이 거란군을 기습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 원태: 흥위위 초군 흑낭대의 낭장. 거란과의 싸움에서 흑낭대를 지휘한다. 흥화진을 지키다가 거란이 지친 것을 파악하고 기습을 제안해 거란군을 공격해서 한 차례 승리한다.
- 견일: 흥화진 도령중랑장.
- 임맹: 좌우위 보승군 별장. 무로대의 거란군 공격에 참가했지만 실패했고 구주군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나자 보량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 이강: 낭장.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패하자 곽주로 후퇴하면서 추격하는 거란군과 싸우다가 아군이 온 것을 이원에게 알린다.
- 혁연: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무너져 후퇴하다가 부상을 입고 노제의 보호를 받다가 거란군의 추격을 받았으며, 거란군의 공격으로 모두 살해당하는 와중에 숲속에 숨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선명(鮮明): 가상인물. 흥위위 소속의 정용. 곡주 사람으로 988년생. 조상은 증조부는 유금필 휘하의 마군항정, 조부는 마군을 지내다가 정종 시기에 광군이 조직되자 정용이 되었으며, 아버지 흥선(興善)은 993년에 윤서안 휘하에 소속되어 봉산군에서 전사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흥위위로 들어가 망군정인이 되었다가 3년 후에는 흥위위 초군령의 정용이 되었는데, 전사자의 후손을 예우하는 차원이면서도 선명의 무예가 출중했기 때문에 임명된 것이다. 원태 휘하에서 거란과의 싸움에 참전했다.
- 성종
- 소배압: 행군도통. 총지휘관을 맡아 거란의 군사들을 통솔한다.
- 한덕양
- 야율분노
- 야율적로: 우피실군 부상온. 삼수채에서 강조가 이끄는 고려군과 싸우는 중에 고려군이 지친 것을 깨닫고 고려군을 기습해 우익의 검차진을 장악한 후에 곧바로 본진을 공격해 강조를 비롯한 고려군 수뇌부들을 붙잡았다.
- 야율세량
- 진소곤: 혜예랄군상온. 제1차 여요전쟁 후 이수화가 국교를 위해 요나라로 파견되어 자신의 집에 묵으면서 그의 재능에 감탄해 의기투합했다. 제2차 여요전쟁 당시 35살이고 해예랄군을 이끌고 행군도통소를 경호했으며, 흥화진의 고려군 진영에 성종의 표문을 전달했다.
- 한기: 합문인진사. 황제가 강조의 죄를 묻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왔다면서 강조에게만 죄를 물을 것이니 성을 열고 항복하라고 전했다.
- 유신행: 행군좌부도통.
- 승노: 행군도감. 여기서는 야율승노로 나온다.
- 야율화가: 행군우부도통. 흥화진 성을 공격하면서 다른 장수들과 함께 성이 튼튼한 것에 감탄하면서 외로운 성이라며 무너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
- 소류: 소배압의 조카. 동로통군사. 소진운의 아들. 제2차 여요전쟁 당시 36살이고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 야율팔가: 상경유수. 제2차 여요전쟁 당시 47살이고 책을 한 번 보면 바로 외울 정도의 천재였다.
- 야율탁진: 동북상온. 제2차 여요전쟁 당시 29살이고 붉은 전포를 입고 송나라의 군사를 죽여 붉은 귀신이라 불렸다. 소혜와 함께 무로대를 공격하려고 시도한 고려군을 격파했다.
- 야율알납: 동경유수. 제2차 여요전쟁 당시 56살이고 제1차 여요전쟁에 참여했다.
- 야율세리: 맹예랄군상온. 제2차 여요전쟁 당시 47살이고 정찰과 추격에 뛰어나 그 업무를 맡는 맹예랄군을 이끌었다.
- 장검: 한족 출신으로 운주의 막관이었다가 운주절도사가 그 재주를 알아보고 황제에게 선물로 바친 인재로 청렴하고 황제에게 잘못을 지적할 정도로 강직하다.
- 해오야: 낭군군 상온. 해왕 해화삭노의 아들로 해 왕족의 적자. 제2차 여요전쟁 당시 30살이다. 낭군군을 이끌고 흥화진성을 공격한다.
- 야율호덕: 부상온. 해오야 휘하에서 흥화진성을 공격할 때 군사를 지휘한다.
- 소박: 패안낭군, 대수. 해오야 휘하에서 군사를 지휘해 흥화진을 공격했다가 고려군의 저항에 고전한다.
- 유작: 한인향병의 지휘관. 흥화진에서 고려군의 저항이 거세자 해오야의 명으로 장작과 흙포대를 쌓아 고려군이 파놓은 갱을 메웠다.
- 소혜: 북피실군 상온. 소진운의 아들. 제2차 여요전쟁 당시 28살이다. 흥화진의 저항이 거세자 소배압의 지시에 따라 북과 징을 치면서 공격하는 척 해서 고려군이 잠들지 못하도록 지치게끔 하려고 시도했으나, 고려군에서 이를 간파했다. 야율탁진과 함께 무로대를 공격하려고 시도한 고려군을 격파했다.
- 소허열: 임해군 절도사. 소진운의 아들.
- 야율현가: 귀성군좌상병마도지휘사. 이섬이 이끄는 구주군을 포위했지만 김숙흥의 기습을 받고 잠시 혼란에 빠졌다가 수습하다.
- 소합탁: 북원추밀부사. 제2차 여요전쟁 당시 50살을 넘었고 글을 잘 짓고 재주가 뛰어났지만 도량이 좁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대신들도 있었지만 사람의 비위를 잘 맞춰 중용되었고 사람들은 그를 아부의 신이라 했다.
- 고청명 : 내원성에서 거란군을 지휘하고 있다가 무로대의 기습을 실패한 고려군이 철수하는 것을 깨닫고 부하를 보내 막으려 했다.
- 하행미 : 고청명 휘하의 기병 장교. 고청명의 지시로 철수하는 고려군을 막았다.
- 한제심:
- 야율척렬:
- 야율해리: 숭덕궁의 궁사.
- 소허열: 임해군절도사. 고려를 공격하는 선봉군에 참모로 종군했다.
- 야율구리사: 우피실군 부상온. 야율적로와 함께 삼수채의 고려군을 공격해 무너뜨렸으며, 노정이 강조를 구하기 위해 공격하자 노정의 뒤에서 창을 던져 넘어뜨렸다.
- 소포노: 해왕 초불녕의 후손. 양친을 세 살 때 잃어 일곱 살에 부유한 의사의 집에 소를 길렀으며, 몇 년 지나지 않아 경전과 역사책을 섭렵하고 기사에 능숙하게 되었다. 18세에 맹예랄군의 예랄을 지내다가 야율융서가 호위로 발탁했고, 고려를 공격하면서 선봉군의 정찰 부대인 원탐난자군의 소교를 맡았다.
- 야율포고: 좌피실군을 이끌고 삼수채에서 고려군이 무너지면서 곽주로 후퇴하는 고려군을 추격했다가 완항령에서 기습을 당하자 물러났다.
- 야율오불려
- 아과달 : 천운군 상온. 요련아과달로 나오며, 제2차 여요전쟁 당시 51세이다.
- 야율왕노: 우익군도통.
- 야율효리 : 남피실군 상온.
- 야율실로 : 추밀사.
- 야율연수: 남피실군 부상온.
- 소효선: 날가해군상온. 날가해군을 이끌고 삼수채에서 고려군을 공격했으나, 고려군이 일부러 검차진으로 끌어들여 가두면서 많은 군사를 잃었다.
5. 평가
대다수의 한국 드라마들이 원작과 많이 다르듯이 해당 소설을 바탕으로 2023년에 제작 및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과는 차이가 있다. 원작 소설에서는 배경 설명이나 등장인물의 회상 등을 제외하면 제2차 거란 침공 시기인 1010~1011년을 다루지만, 드라마는 목종 말년이자 강조의 정변이 벌어진 1009년부터 시작한다. 또한 원작에 설명되어 있는 인물들의 묘사에 그렇게 충실하지는 않으며, 단순히 외형적인 특징만 다른 것이 아니다. 그 외에 원작에서 생략되어 나오지 못한 스토리나 드라마에 출연하지 못한 실존인물들도 많다. 전체적으로 기록의 재현도나 강감찬처럼 기록이 부실한 인물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드라마보다 해당 소설이 훨씬 더 좋은 편이며, 실제 제2차 여요전쟁에 관한 역사상의 흐름을 알기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