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영화 "범죄와의 전쟁"이여??^^ 옆간판에 패한 민주당원에 강성 진보주의자로서 이 시간에 생각나는 영화속 대사는 딱 이겁니다... "자아~~~ 들어가자~~~"
https://blog.daum.net/samsongeko/11748
문정부가 임명한 검찰총장이 이제는 대통령 당선인이 되어 더불어민주당 수장과 독대한다...?? 이 재명 낙선자만 아니지 바뀐게 없는듯하네요... 당신 그러다 노 전대통령꼴 난다..
(2021.7.5)이지사님은 기본소득이 제1공약이 아니라고를 하지 않나~~~ 윤은 이익 카르텔 혁파라고를 하지 않나~~~ 둘다 정당을 맞바꾸는게 나을듯요~~~ 두 양반들 지지층 기만하지 말자~~~
https://blog.daum.net/samsongeko/11162
(2021.5.11)그 MOAI 동향이요...?? 정치 검찰출신으로서 기여코 나올 생각이구만... 요즘 이 양반과 이 재명 경기도지사중 누가 더 있는 것들과 재벌 대기업에 치명적일까 장고중~~~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청와대, 그 영욕의 900년史...
[유 석재의 돌발史전]
대통령 집무실이 용산으로 이전하게 되면, 지금의 청와대 자리는 고려 숙종 9년인 1104년 남경(南京) 궁궐을 그곳에 세운 뒤 918년 만에 ‘최고 권력자’와 무관한 장소로 바뀐다. 청와대는 900년을 넘는 영욕(榮辱)의 세월을 뒤로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셈이다.
◇ 고려 숙종, 청와대 터에 궁궐 지어...
고려가 지금의 서울 강북에 남경을 설치한 것은 1068년(문종 22년)의 일로, ‘고려사’에는 ‘남경에 신궁(新宮)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때의 신궁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36년이 지나 15대 왕 숙종(재위 1095~1105) 때 다시 남경을 설치해 천도 계획을 세우고 1104년 남경 궁궐을 완성했다. ‘고려사’는 숙종이 대신과 내관을 거느리고 이곳을 찾아 10여 일 머물렀다고 기록했다.
이 궁궐이 지어진 장소가 어디였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언급이 나온다. 1394년(태조 3년) 천도를 위해 한양을 답사한 권중화 등이 올린 상소에 “고려 숙종 때 경영했던 궁궐의 옛터가 너무 좁아 그 남쪽에 궁궐(경복궁) 터를 정했다”고 했다.
숙종 때 세운 남경 궁궐은 경복궁 북쪽인 지금의 청와대 자리였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숙종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남경으로 천도하지는 않았다.
당시 도참서인 ‘도선기’에 ‘개경(개성), 서경(평양), 남경(서울)에서 4개월씩 머물러야 나라가 흥한다’고 적힌 것을 근거로 번갈아 거주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남경 천도 계획은 다시 흐지부지됐고, 고려 말인 1382년(우왕 8년)에는 다시 천도가 이뤄져 임금이 남경 궁궐에서 머물렀으나 5개월 만에 개경으로 환궁했다. 어쨌든 고려 말까지는 그곳에 임금이 머무는 궁궐이 있었던 것이다.
◇ 충성 맹세 장소에서 경복궁 후원으로...
조선왕조가 그 남쪽에 법궁인 경복궁을 세운 뒤 후원 격인 청와대 터는 계속 왕실 부지로 남았다. 이곳에는 회맹단(會盟壇)이라는 중요한 국가 시설이 세워졌다. 임금이 신하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받는 곳이었다.
특히 1417년(태종 17년)에는 개국공신과 그 적장자가 모두 모여 대규모 회맹을 했다.
‘숙종실록’에는 “경복궁 북문 밖은 회맹단인데 수석이 아름다운데도 주색과 유람에 빠진 연산군조차도 감히 후원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 나올 만큼 신성스런 곳으로 여겨졌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불탄 뒤로 청와대 터 역시 오랫동안 빈터로 방치돼 있었다. 그러나 1868년(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청와대 터의 성격은 또 한번 바뀌게 된다.
경복궁을 중건한 흥선대원군은 창덕궁의 넓은 후원인 춘당대(春塘臺) 같은 곳을 경복궁에도 만들려 했다. 그래서 이곳에 경무대(景武臺)라는 이름의 후원을 조성했다.
‘경무’란 무슨 뜻일까. ‘경복궁(景福宮)’의 ‘경(景)’과 경복궁 북문 ‘신무문(神武門)’의 ‘무(武)’에서 한 글자씩 딴 것이란 설이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명예교수는 “경무라는 말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시호로 쓰이던 이름으로, ‘큰 계책으로 나라의 난리를 진압한다’는 뜻이 있다”고 설명했다. 경무대에는 경복궁의 부속 전각들이 들어섰다. 총 32동의 건물이었다고 한다.
오운각(五雲閣)은 임금의 휴식 공간이었고, 융문당(隆文堂)과 융무당(隆武堂)은 과거 시험과 군사 훈련을 치르는 곳이었다.
풍년을 기원하는 뜻으로 지은 경농재(耕農齋) 주변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밭이 있었다. 창덕궁 후원처럼 경치가 수려한 정원과 계곡도 있었다고 한다. 적어도 1910년 이전까지는 말이다.
◇ 1939년 일제 총독 관저가 들어서...
일제가 1910년 강제합병 이후 숱한 경복궁 전각을 훼손할 때 신무문 북쪽의 전각들도 철거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런데 융문당과 융무당의 이야기는 좀 기이한데, 그건 그 두 건물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융문당·융무당은 1928년 건물이 해체된 뒤 용산으로 옮겨 세워져 일본 사찰인 용광사 건물로 사용됐다. 1942년에는 중일전쟁에서 전사한 일본군의 유골을 이곳에 보관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원불교에서 두 건물을 인수한 뒤 2006년 용산 재개발사업으로 또 다시 해체돼 전남 영광의 원불교 시설로 옮겨졌다.
청와대 자리에 있던 경복궁 건물을 철거한 뒤 일제가 세운 것은 조선총독 관저였다. 증산교 계통 종교인 보천교 본당의 화려한 청기와를 가져와 지붕을 만들었다고 한다.
총독 관저는 왜성대(중구 예장동)에 있었는데 1926년 경복궁 안으로 옮겼고, 다시 1939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신축했다. 그러니까 청와대 자리에 있던 관저에 모든 총독이 다 들어왔던 것은 아니고,
7대 미나미 지로(南次郞·재임 1936~1942), 8대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재임 1942~1944), 9대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재임 1944~1945)까지 세 명이 6년 동안 이곳을 사용했다.
광복 이후엔 미 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Hodge) 중장의 관저로 쓰였다. 일본인 조선 총독의 집을 미 군정 사령관이 그대로 썼던 것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결코 현명한 처사라고 볼 수 없다.
◇ 황와대가 될 뻔했던 청와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관저를 이화장에서 구 총독 관저로 옮겼다. 그러면서 이 일대의 옛 이름 ‘경무대’를 건물 이름으로 되살렸다.
낡은 건물을 보수하자는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1층을 집무실, 2층을 생활 공간으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독재가 심해지면서 ‘경무대’는 권력의 상징과도 같은 용어가 됐다.
1958년 김성환의 신문 만화 ‘고바우영감’은 ‘경무대서 똥을 치우는 사람’이 목에 힘을 주고 돌아다니는 장면으로 권력을 풍자해 필화를 겪었다. 1960년 4·19로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부정적인 이름이었던 경무대를 바꾸자는 여론이 생겼다.
새 건물 이름의 후보로 청기왓집이라는 의미의 ‘청와대(靑瓦臺)’와 조선왕조 건국 당시 국명 후보였던 화령(함남 영흥의 옛 이름)에서 딴 ‘화령대(和寧臺)’가 후보로 올랐다. 윤보선 대통령은 ‘청와대’란 이름을 택했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 직후 청와대를 ‘황와대(黃瓦臺)’로 바꾸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청’보다는 ‘황’이 존귀한 색이고 옛날 황제의 색상이 아니냐는 의미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집 이름을 바꿔서야 되겠는가”라며 이를 일축해 ‘청와대’란 이름은 이후에도 지속됐다.
청와대의 영문 명칭은 화이트 하우스(White House·백악관)와 대조되는 ‘블루 하우스(blue House·BH)’인데 영부인 육영수 여사는 “우리 고유명사까지 영어화해서야 되겠느냐”며 그렇게 쓰는 비서관들을 자주 꾸짖었다고 한다.
◇ 이승만부터 문재인까지 12명이 거주·집무...
청와대에는 1·2·3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4대 윤보선, 5~9대 박정희, 10대 최규하, 11·12대 전두환, 13대 노태우, 14대 김영삼, 15대 김대중, 16대 노무현, 17대 이명박, 18대 박근혜, 19대 문재인까지 모두 12명의 대통령이 거주하며 집무했다.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룬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숱하게 이곳에서 이뤄졌다.
1960년 4·19 때 경찰이 경무대 앞에서 시위대에게 발포한 사건, 1968년 북한 게릴라가 청와대를 공격 목표로 삼아 500m까지 접근한 1·21 사태, 1979년 청와대 부지 안 궁정동 안가(현 무궁화동산)에서 일어난 10·26 사태 등
숱한 현대사의 사건·사고가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1991년 노태우 정부 때 대대적인 신축과 리모델링을 거치면서 비로소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이 분리됐는데, 이때 조선시대에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 새긴 바위가 발견되기도 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구 본관을 철거하고 청와대 앞길을 시민에게 개방했다.
(종합)"산불피해 쓸 예비비 靑 이전에 쓰겠다니"... 與 "불통정권" 반발...
윤 호중 "부대 하나 옮기는데도 수년, 국방 심장 두 달만에 옮기나?"
조 응천 "인수위 열흘간 집무실 이전 화두만... 먹고사는 문제 해결해야"
더불어민주당은 21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 발표와 관련해 "불통정권이자, 인수위원회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 "당선 열흘 만에 불통 정권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낸 셈이다. 국민은 하루하루가 불안하고 고통스러운데 대통령 당선인이라는 분이 새집 꾸밀 궁리만 하고 있으니 정말 참담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러니까 미국에선 한국의 케이(K) 트럼프가 나섰다는 말이 떠돌고 항간에 레임덕이 아니라 취임덕에 빠질 것이란 얘기까지 나오는 것 아니냐"고 질타했다. 특히 윤 위원장은 "동해·울진 산불피해 등에 쓰여야 할 예비비를
청와대 이전비용에 쓰겠다는 발상 자체가 반 민생적이다"며 "예비비 집행을 위해서는 국무회의에서 의결해야하는데 인수위는 국무회의 의결을 정부에 강제할 아무런 법적권한이 없다"고 경고했다.
윤 위원장은 "청와대의 용산 이전은 민생에 백해무익하고 국가안보엔 재앙과도 같다"면서
"용산 이전 과정에서 막대한 안보 공백 가능성이 크고, 일선 부대 하나 옮기는데도 수년 가까운 시간 걸리는데 국방의 심장을 두 달 만에 옮기는 것이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어 "서울시와 용산 구민 재산 피해도 쉽게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크다"라면서 "용산 청와대 이전은 인근 재건축 재개발 올스톱을 의미하고 강남 일부 지역 아파트 옥상에는 방공포대 설치도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조 응천 비대위원도 같은 자리에서 "윤 당선인 인수위가 열흘간 몰두한 유일한 것은 집무실 이전, 인테리어 이사 비용이고 관계자들이 던졌던 화두는 이명박 전 대통령 사면, 민정수석실 폐지, 검찰총장 사퇴뿐이었다"며
"과연 이런 것들이 국민들이 먹고사는 데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것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임기 첫날부터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할 것은 용산 집무실이 아니라 국민에게 약속한 2차 추경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동을 서둘러야 하며, 국민의힘은 민주당과 현안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 이배 비대위원도 같은 자리에서 "매일 대통령이 한남동 공관에서 용산 집무실까지 3~5분 이동하려면 아침 출근시간마다 10분 이상 교통통제가 불가피하고 시민들의 불편은 상상 이상"이라며
"주택공급 확대를 위해 (현재도) 서울시 안에 있는 공공부지를 마른수건 짜내듯 하는 상황인데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면 용산 주변 넓은 부지는 손도 못 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국민소통을 위한 집무실 이전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와 소통하려는 것인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집무실 이전을 꼭 하고 싶다면 차기 정부가 할 숙제를 현 정부에 넘기지 말고 50일 후 차기 정부에서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성환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이날 라디오에서 "(용산 집무실 이전은) 인수위의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라며
"각종 군 보안장비 이전이나 청와대 장비 이전 등 경호시스템도 다 바뀌게 된다. (윤 당선인이 말한) 496억원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액수를 떠나 졸속으로 해야되는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