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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millionaire

게코(Gekko)의 논평 - 오늘부로 현정권도 "국정농단세력"이상으로 타도의 대상이며, 본인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진보/보수를 떠나 이 재명 경기도지사를 밀어라~~~

 

 

그 뉴딜정책을 유도했던 J. M. 케인즈...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 제가 주식 투자 실전에서 명구로 삼는 말입니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9639

그 경제학계에서는 이 상황을 케인즈의 '유동성 함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냥 백약이 무효고 코로나19 진정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9403

 

그 경제학계에서는 이 상황을 케인즈의 '유동성 함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냥 백약이 무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주가지수와 원화가치가 10년 전 수준으로 회귀한 가운데 코스피가 큰 폭으로 하락한 23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딜링룸에서 직원

blog.daum.net

 

유동성 함정

(Liquidity trap)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하여 금리정책을 펼쳐도 경기침체에 빠지는 현상이다. 유동성함정에 빠지는 이유는 이는 미래 경제 상황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일본은 경제에서 거품이 빠진 이후인 1991년부터 2002년까지 극심한 장기침체를 겪었는데, 이 시기 일본 정부는 제로금리까지 금리를 내려 총수요를 늘리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유동성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적극적인 재정정책이다. 1933년 미국의 뉴딜정책과 일본이 2005년에 실시한 공공사업지출 확대는 정부지출이 경기 회복을 유도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둘째는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를 통한 통화 공급 확대이다. 미국은 뉴딜정책 기간(1933~1941년)에 통화량 공급을 크게 늘렸으며, 일본 또한 공공사업지출 확대와 동시에 통화량을 늘렸다. 무엇보다도 정부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필요하다.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20세기 미국의 경제학자. 자유방임주의를 옹호하고, 거시경제학을 비롯해 미시경제학, 경제사, 경제통계학을 연구해 경제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시카고대학에서 해럴드 호텔링과 웨슬리 미첼 교수의 계량경제학의 강의에 영향을 받았다. 졸업 후 국가자원위원회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시카고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이후 1977년 시카고대학에서 퇴임했다. <통화 안정의 방안>, <미국의 통화사>, <자본주의와 자유> 등을 발표하여 자유주의 시장 경제를 주장했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공부벌레와 일벌레의 삶...

밀턴 프리드먼은 나치의 박해 이전에 일자리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 온 유대인의 자식이며, 독일계가 아닌 동유럽계 유대인 2세다.

그는 미국 사회의 주변부에서 가난과 차별의 성장기를 겪었지만, 뛰어난 머리와 줄기찬 노력으로 중년에는 사회 엘리트의 반열에 들었다. 이어서 만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어낸 유대인’의 전형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어쩌면 어려웠던 성장기에서 우러난 프리드먼다운 메시지, 즉 ‘공짜 점심은 없다’는 메시지가 세상에 통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먼의 아버지인 예노 프리드먼은 현재 우크라이나 지방인 베레호베라는 곳에서 살다가 1894년에 16세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뉴욕으로 왔다.

브루클린의 유대인 거주지에서 지내다가 같은 처지인 사라 에텔을 만나 결혼해 1남 3녀를 낳았고, 뉴저지로 가서 작은 구멍가게를 열어 먹고살았다. 프리드먼은 그의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먼이 16세가 되던 1928년에 아버지는 50세로 사망한다. 가뜩이나 빠듯한 살림에 가장마저 세상을 등졌으니, 남은 가족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는 뻔하다.

게다가 두 가지 큰 불운이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는 미국과 세계경제를 수렁으로 몰아넣는 1929년의 뉴욕발 대공황이고, 하나는 1920년대와 1930년대가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 차별이 가장 악랄하게 불거져 나온 시절이라는 것이다.

많은 식당에서 ‘유대인과 개 출입 금지’라는 푯말을 내걸었고, 명문 대학과 대기업도 유대인에게 문을 닫았으며, 일부 주에서는 유대인의 공직 임명을 제한하기도 했다.

유대인은 미국 독립 당시부터 존재했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부쩍 이민자가 늘어 미국의 소수 인종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숫자를 차지했는데, 자연히 ‘이방인이 사회에서 인식되는 제2단계’ 즉 차별과 텃세의 단계를 겪었다.

사회의 극소수일 때는 흥미와 배려의 대상이 되지만, 어느 정도 머릿수가 늘었다 싶으면 경계와 탄압의 대상이 되기 마련인 게 예나 지금이나 집단 내 소수자들의 운명이다.

게다가 마침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혁명이 ‘유대인들의 작품’이라는 인식이 생겼고, ‘유대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문까지 겹치면서 한결 질시가 심해졌다.

물론 그런 차별은 나치가 자행한 박해에 비하면 훨씬 가벼웠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이나 폰 노이만, 폴라니 등은 스스로 유대인임을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차별 없는 유년기를 보냈다.

그들은 사회적 엘리트로 여유롭게 지내다가 성인이 되어서야 나치의 된서리를 맞았지만, 프리드먼 같은 사람은 철이 들 때부터 성장기 내내 ‘가볍지만 늘 계속되는’ 차별을 숙명처럼 겪어야 했다.

개성 강한 젊은이가 이런 삶을 강요당하면, 보통 두 가지 중 한 가지 길을 걷는다. 첫 번째는 자포자기해 덧없는 방탕에 빠지거나 사회 자체를 증오해 반항아나 혁명아의 길을 가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동년배 유대인 중에는 지하 사회주의 운동에 가입하는 사람이 많았다. 두 번째는 고난을 묵묵히 견디며, 더 나은 내일이 오리라 믿고 출세를 위해 한껏 절제하며 공부에 매달리는 것이다.

프리드먼은 후자였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주경야독하며 고등학교를 조기 졸업했고, 하버드나 예일 등의 명문대에서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입학을 꺼리자 더 온건한 러트거스 대학에 장학생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장학금으로는 겨우 학비만 충당했을 뿐, 식비는 일해서 벌어야 했다.

그 후 그는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약 10년을 노상 돈에 쪼들리며 공부벌레와 일벌레의 삶을 병행하며 살았는데, 뭐 하나라도 몸을 놀려 돈을 벌어야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생활에서 얻은 삶의 교훈이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이었다.

세상은 뭐든 기브앤드테이크다. 설령 아무 대가가 없는 듯한 선행조차 도덕적 만족감이나 명예욕이라는 효용을 ‘구매’한 것이며, 따라서 손해 보지 않고 살려면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한다.

사회의 변두리에서 죽어라 일해야 입에 풀칠할 수 있는 상황을 보고 겪으며, 트로츠키나 옘마는 ‘세상은 썩었다! 세상은 불공평하다’라고 깨달았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공짜 점심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공평하다고? 세상은 언제나 그렇지 않았는가? 유대인을 차별한다고? 세상은 언제나 그렇지 않았는가?

시카고 학파의 태동...

1932년에 러트거스 대학을 졸업한 프리드먼은 시카고 대학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했다(이 학교도 인종문제에 관대한 명문대 중 하나였다).

이때부터 그가 불운은 타고났는지 몰라도 적어도 인복은 있었음이 드러나는데, 가장 값진 만남은 대학원 동기였던 로즈 디렉터와의 만남이었다. 그녀 역시 가난을 딛고 일어선 유대인 이민 2세였으며,

두 사람은 곧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4년 뒤에 결혼한다.

그녀는 박사학위는 받지 않았지만 역시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남편의 작업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게다가 그녀의 오빠, 즉 프리드먼의 처남이 될 아론 디렉터는 프리드먼을 하이에크가 주도하고 있던 몽펠르랭협회에 소개해 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사상을 발전시킨다.

세상이 온통 케인스 경제학으로 뒤덮여 있던 당시, 이는 대책 없는 비주류의 길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짜 점심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던 프리드먼은 시장 중심적 사고방식이 편하고 좋았다.

그가 보기에 정치는 변덕스럽고 위험하며 ‘미개한’ 것이었다. 그가 뉴저지에서 날품팔이를 할 때 정부가 그에게 무엇을 해주었나? 바다 건너 부모의 고향에서는 정부가 그의 동족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었나?

반면 시장은 언제나 가격에 맞추어 대우해준다. 진정 순수한 시장이라면, 공들여 만든 상품의 가치를 외면하지는 않으리라. 유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1933년에 그는 더 나은 장학금을 제시한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겼다가 이듬해에 다시 시카고 대학으로 돌아왔는데, 그사이에 계량경제학의 대가였던 해럴드 호텔링(Harold Hotelling)과 웨슬리 미첼(Wesley Mitchell)의 강의를 듣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시카고 대학으로 돌아와서는 역시 계량경제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헨리 슐츠(Henry Schultz)의 조교로 근무했으며, 그의 소개로 아내와 함께 국가자원위원회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37년에는 미국경제연구소에서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의 조교로 일했으며, 이때 쿠즈네츠의 지시에 따라 전문직 소득을 연구한 결과 프리드먼 고유의 ‘항상소득가설’의 밑거름을 마련했다.

1940년대에는 대공황이 진정되고, 두 차례 세계대전도 마무리에 들어가면서 바야흐로 미국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신진 계량경제학자로서 프리드먼의 명성도 높아지기 시작해서 위스콘신 대학, 컬럼비아 대학, 미네소타 대학이 아직 박사학위도 받지 않은 그를 비전임 교수나 연구원으로 초빙했다.

1946년, 프리드먼은 서른넷의 나이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시카고 대학의 전임 교수가 되었다. 정부의 주요 싱크탱크인 미국경제연구소에서도 그에게 연구원직을 주었다.

이후 그는 1977년 퇴임할 때까지 계속 시카고 대학과 미국경제연구소에 머물며 ‘시카고 학파’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동시에 미국 정부에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는 브레인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해는 케인스가 세상을 떠난 해이기도 했는데, 프리드먼은 『지붕 혹은 천장(Roof or Ceilings?)』이라는 책에서 케인스식으로 주택 임대료를 정부가 통제했을 때 나타나는 부작용을 제시했다가

“거인을 애도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도 유분수”라며 국내외의 경제학자들에게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아직은 살아 있는 프리드먼이 죽은 케인스를 이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는 생각보다 빨리 오고 있었다.

자유주의가 빛을 발하다...

‘그때’에 이르기 전, 프리드먼은 조상의 땅인 유럽에서 자신의 경제사상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1947년에는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막 태동하고 있던 경제학(구체적으로는 하이에크가 1944년에 펴낸 『노예의 길』)에 관심을 가진

미국의 갑부 윌리엄 볼커(William Volker)의 초청으로 미국과 유럽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스위스의 몽펠르랭에 모여 세미나를 열었다. 프리드먼도 하이에크, 미제스,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 등과 그 자리에 함께했다.

여기서 정부의 정책, 평등과 불평등, 거시경제와 미시경제 등 온갖 정치·사회·경제적 아이디어가 오갔고, 상당수의 신자유주의 교리가 담금질되었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낸 책이 프리드먼의 최대 명저 『자본주의와 자유』였다.

또한 1950년에는 마셜플랜을 집행하는 미국 정부 기관의 자문을 위해 프랑스에 갔는데,

거기서 그는 세계대전 이전의 약탈적 금본위제부터 전후의 브레턴우즈 체제까지 유지되고 있던 고정환율제의 근본적 한계를 포착하고, 변동환율제가 답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 결과 1960년 『통화 안정의 방안(A Program for Monetary Stability)』, 1963년 『미국의 통화사(A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를 내놓으며

프리드먼은 신자유주의자의 대부로 하이에크와 어깨를 나란히하게 되었고, 특히 정치·사회 문제에서는 ‘자유지상주의’의 주창자로 널리 주목받았다.

프리드먼의 경제 이론으로 가장 먼저 주목받은 것은 ‘통화주의’였다. 통화량이 거시경제에 중요하다는 입장은 케인스 이래 케케묵은 생각으로 치부되어왔지만, 프리드먼은 대공황의 원인에 대한 분석에서 통화주의를 부활시켰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서 판단을 잘못해 통화량을 늘리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의 주식 급락 수준에서 무마되지 않고 대공황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기업들의 주식 급락이 주식을 보유한 은행의 신용 하락으로 이어지고,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해서 은행이 도산하고, 은행에서 자금을 대출하지 못하게 된 기업이 다시 도산하는 끝 모를 늪에 빠진 것이 대공황이라는 것이다.

예금 대량 인출 시점에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통화량을 늘려 시중에 돈을 풀었다면, 최초의 패닉은 이내 진정되고 경제는 빠르게 회복되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이는 이미 대공황이 진행된 상태에서 기업 대신 정부가 사회간접자본 건설 같은 대량 투자를 해, 얼어붙은 경기를 살리고 고용을 다시 창출해야 한다는 케인지언(keynesian)적인 접근법과는 전혀 다른 시각이었다.

그러나 프리드먼의 접근법은 자료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설득력 있는 대안으로 무장하고 있었기에, ‘정부 재정지출만이 경제의 숨을 틔운다’는 종전의 사고방식에서 큰 전환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계량경제학자만은 아니었다. 그의 ‘항상소득가설’은 거의 최초로 소비에 ‘소비자의 기대 심리’ 요인을 부가해 분석한 것으로, 케인스의 소비 이론을 거꾸로 뒤집으면서 현대 소비심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케인스는 호황기에는 소비가 줄고, 불황기에는 소비가 늘 것으로 보았다. 호황기에 개인의 실소득이 늘어나면 평소의 소비를 유지하면서 남는 소득을 저축한다. 따라서 공급에 비해 수요가 밑돌면서 불황이 찾아온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평소 소비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하게 될 것이므로 수요가 다시 공급을 넘어서 호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정반대로 호황기에 소비가 늘고, 불황기에는 줄 것으로 보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득 수준에 항상적인 기대가 있으며,

이는 1~2년의 단기적 호황이나 불황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호황으로 자신의 기대소득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면 ‘공돈’처럼 생각하게 되고, 여유분을 저축하지 않고 사치품이나 여행 등으로 써버린다는 것이다.

반대로 불황이 와서 기대소득보다 낮은 소득을 올리면, 소득이 회복될 날을 기다리며 평소에 쓰던 돈도 쓰지 않게 된다. 이는 경험적으로 입증되어 케인스 가설을 눌렀다.

또한 프리드먼은 1967년 미국 경제학회장에 취임하며 한 연설에서

‘기대치가 부가된 필립스곡선’을 제시해 고전적인 필립스곡선을 대체해보였다. 필립스곡선은 1958년에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필립스(William Phillips)가 내놓은 것으로 실업률과 인플레이션률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즉 불황이 오면 기업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늘어난 실업자들은 직장을 얻기 위해 낮은 임금을 감수하거나 낮은 임금에 실망해 실업 상태를 유지한다. 그러다가 호황기에 들어서면 기업은 고용을 증대하고, 실업자들은 임금 인상을 희망한다.

기업은 인상된 임금분을 상품 가격에 전가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즉 실업률이 높을 때는 잘 일어나지 않는 인플레이션이 실업률이 낮아지면 빈번해진다.

높은 실업률과 대규모의 인플레이션 모두 국가경제에 부정적이므로, 한쪽이 과도할 때는 정부가 나서서 다른쪽을 끌어올려야 한다. 실업률이 지나치게 높으면 정부가 돈을 풀어서 고용을 늘리거나, 기업 감세를 통해 고용 확대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먼은 여기에 ‘노동자의 기대 심리’를 덧붙임으로써 필립스곡선이 단기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호황기에 기업이 임금을 올리면 실업자는 적극적으로 취업한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인플레이션이 오는데, 여기까지는 필립스곡선대로 전개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때문에 자신의 실질임금이 줄었음을 깨달은 노동자는 더 많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기업이 이를 감당하지 못하면 실업률은 다시 증가한다. 즉 높은 실업률을 우려한 정부가 경기부양책을 써서 고용을 늘리려 해도, 장기적으로 실업률은 실업률대로 높으면서 인플레이션만 부가된 꼴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섣불리 필립스 곡선에 이끌려 경제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평등은 효율적일 때 의미가 있다

이런 프리드먼의 경제 이론은 거시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을 깎아내리고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그의 이론은 새로운 자유방임주의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는 기존 자유방임주의 시절처럼 경제 규모가 작고 사회가 단순하지 않다. 결국 프리드먼도 정부 정책이 경제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고, 때로는 경제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도 있다고(가령 디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통화량 증대) 본다.

그는 그런 점에서 자생적 질서와 기업의 리더십을 강조한 하이에크와는 다소 입장이 다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원래의 ‘야경국가(夜警國家)’ 역할을 군사 안보나 치안뿐 아니라 경제 안보까지 확장했을 따름이며, 케인스 경제학이나 사회주의 경제학처럼 정부가 경제의 시작과 끝을 책임져야 한다고 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국가는 야경국가가 되는 일 말고는 할 일이 없는가? 균등한 기회 보장이나 소득재분배를 통한 사회 평등의 강화는 어떨까? 프리드먼은 그런 일에도 대부분 ‘노’라고 한다.

대부분의 사회문제는 정부가 개입하면 할수록 이상해질 따름이고, 개인들의 자유로운 판단의 집합에, 즉 시장에 맡기는 게 제일 낫다는 것이다.

그의 고향 선배라고도 볼 수 있는 폴라니가 시장의 속성을 혐오하고 “시장이란 사회 안에 내재되어 그 규범을 따르는 사회의 아주 일부”라고 주장한 반면, 프리드먼은 시장을 사회 전반에 확대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이상적이라고 보았다.

왜 그런가?

가령, 지긋지긋하게 겪은 차별 문제를 두고 프리드먼은 시장이야말로 차별을 가장 효과적으로 없애준다고 한다. 선의에서가 아니라 “그 상품이 유대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도” 상품 가치를 외면하지 않는 시장의 속성 때문이다.

폴라니가 애착을 갖는 전통 사회의 규범은 인간을 자유롭고 평등하게 해주었는가? 귀족이 노예를 착취하고, 남성이 여성을 비하하지 않았던가?

프리드먼은 관습이나 종교가 아니라 상품 가치가 군림하는 자본주의가 발전한 것과, 구체제가 붕괴하고 시민사회가 수립된 것 사이에는 결정적인 상관관계가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정당·언론·집회 활동 등이 필요한데 자본주의 없이는 그런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 사회에 충분히 유통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같은 맥락으로, 프리드먼은 퇴직연금제도를 비롯한 복지 제도, 누진세, 농업 보조금, 주택 보조금, 최저임금제, 최고가격제, 징병제 등 사회를 유지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현대 국가가 당연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는 많은 제도를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자가 생각하는 자유와 평등의 의미에는 사회주의자가 생각하는 의미와는 사뭇 다른 색깔이 입혀져 있다. 가령 시장 시스템에 따른 평등이 가난한 유대인이 명문 대학교수가 될 기회를 부여한다고 하자.

그런데 필연적으로 그 과정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교수가 되고 싶었지만 옘마처럼 부모가 가난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해서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면 어떤가?

아니, 애초에 시장 원리에 따른 경쟁 체제에서는 누구나 치열한 경쟁에 허덕일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다수가 목표 달성에 실패하게 되는데, 그런 자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그들에게도 무언가 베풀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프리드먼은 ‘노’라고 대답한다.

그가 애초에 생각하는 평등은 효율이라는 면에서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유대인이나 여성을 사회 관습이나 편견에 따라 배제한다면, 그만큼 인적 자원의 풀(pool)이 좁아지며 최적의 인재를 선발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따라서 평등은 필요하다. 그러나 평등을 통해 되도록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을 줄여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의미의 고려는 별개인 것이다. 복지 제도도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노동력을 공급한다는 효과 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기업의 투자나 기부를 통하지 않고

정부를 거치는 과정에서 비효율이 발생하기 때문에 쓸모없는 것이다. 기업 투자가 냉혹한 계산을, 기부가 개인의 취향과 편견을 반영함으로써 공명정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도덕적 문제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자는 소외가 늘, 어디서나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들의 과제는 국가권력을 앞세워서 소외를 없애려는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최대한 효율적인 소외가 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자신의 임금마저 자신보다 소외된 사람에게 쓰고 싶었던 폴라니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는 『성경』 말씀을 믿었다.

그러나 프리드먼이 신봉한 말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였다. 이를 현대적으로 바꾸면 ‘공짜 점심은 없다’ 아닌가.

 

 

신화가 된 자유인...

1970년대는 유대인 경제학자들에게 최고의 시대였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단 3년을 빼놓고 유대인이 줄줄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테이프는 케인지언인 새뮤얼슨이 끊었지만 가장 주목받은 사람은 1976년에 “소비 분석, 통화사와 통화이론, 경기안정 정책의 복잡성 제시 등에서 위업을 이룬" 프리드먼이었다.

그는 국가정책 자문에서도 또렷한 두각을 나타냈다. 1964년에 골수 공화당 우파인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의 경제 자문이 된 후 공화당 대선후보들에게만 경제 자문을 해주었다.

닉슨은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1971년에 변동환율제로 갈아타며 ‘닉슨 쇼크’를 세상에 일으켰고, 1973년에는 징병제를 폐지했다.

또한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감세와 재정지출 억제를 비롯한 프리드먼의 조언을 금과옥조처럼 따랐다(비록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오히려 정부 부채를 대폭 늘렸지만).

프리드먼은 1980년부터 <선택의 자유>라는 텔레비전 시리즈를 통해 대중과 접하기도 했는데, 이는 큰 인기를 끌어서 『선택의 자유(Free to Choose)』가 출간되었을 때 『자본주의와 자유』와 함께 그의 양대 저작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미국 정부가 ‘좌파 빨갱이’들에게 점령당했다며 우파 총궐기를 주장하는 보수 시민단체 ‘티파티’ 등은 『선택의 자유』에 나오는 구절을 『성경』 구절처럼 암송한다.

한낱 보잘것없고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이었던 프리드먼. 그는 삶의 후반부 30여 년을 지극한 영광과 광휘에 싸여 보내고 2006년에 타계했다. 프리드먼(Friedman)은 스스로 해방된 인간(Freed Man)이 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말년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어떤 경제학자가 그를 점심에 초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돈을 내고는 “어떻습니까? 드디어 선생님도 ‘공짜 점심’을 드셨군요!”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러자 프리드먼은 태연히 대답했다.

“아니지! 그 대가로 자네의 형편없는 이야기를 2시간이나 참고 들어주지 않았나.” 이 오만불손한 에피소드가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 프리드먼과의 점심은 결코 공짜가 아니며, 엄청난 부가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가 그토록 신화적 존재가 되었기에, 밥 사주고 비아냥만 들은 셈인 그 경제학자는 오히려 이를 자랑삼아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오늘날 워런 버핏(Warren Buffett)과 점심을 같이하려면 실제로 엄청난 거액을 지불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가 없다면, 그가 신화적 존재가 되는 데도 그만 한 값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과연 젊은 시절의 차별과 고생뿐일까?

자유로워진 인간은 동시에 많은 정겨운 것에게서 소외된 인간일지도 모른다. 뭐든지 황금으로 만드는 미다스의 손의 대가로, 사람이 먹는 양식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다산 칼럼] 주류경제학에서 보는 기본소득...

개인의 소득 몰라서가 아니라

복잡한 복지제도를 단순화해...

행정비용을 줄이자는 것...

경기부양 아닌 개인 선택을 보장...

유인의 왜곡을 피한다는 생각도...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내년에 있을 대선과 맞물려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효과 등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경제 이론이 인용되기도 한다. 주류경제학에서 일찍이 기본소득을 주장한 사람은 시장경제주의 주창자인 밀턴 프리드먼 교수다.

프리드먼은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라는 책에서 음(-)의 소득세를 제시했는데, 이는 사실상 기본소득제도다. 프리드먼이 이 제도를 제안한 이유는 사람들이 선택의 자유를 가지도록 보장하고 정부가 비효율적으로 개인의 경제활동에 간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126가지의 정부 복지제도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개인에게 현찰로 기본소득을 줘 이 모든 것을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먼의 음의 소득세제 구조는 다음과 같다. 소득 6000만원을 기준점으로 그 이상에는 20%의 소득세를 징수하고, 그 이하에는 모자라는 액수에 대해 20% 음의 소득세, 즉 보조금을 주는 조세제도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소득이 0인 사람은 1200만원을 받고 소득이 2000만원인 사람은 6000만원에 모자라는 4000만원에 대해 20% 음의 소득세, 즉 800만원을 받아 2800만원의 최종 소득을 벌게 된다.

이에 비해 소득 6000만원 혹은 그 이상을 버는 사람은 6000만원까지는 소득세 감면을 받게 되므로 소득이 0인 사람이 기본소득으로 받는 것과 같은 1200만원을 감면받는다.

프리드먼이 이런 제도를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복잡한 복지제도를 시행하는 데 들어가는 행정비용을 없애는 것,

둘째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제고시키는 것,

셋째 복지제도의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

넷째 사람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허용하는 것,

그리고 다섯째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이유를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복지제도를 단순화해 행정비용을 절감하자는 것이다. 이는 작년에 모든 사람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한 것과 비슷한 이유 같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미국을 비롯한 모든 현대국가는 매우 복잡한 복지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이를 단순화해 비효율을 없애자는 것이지 사람들의 소득액을 모르기 때문에 모두에게 같은 돈을 줘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위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음의 소득세를 도입하기 위해 개인 소득수준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현행의 복지제도를 모두 정리해야지 그를 유지하면서 기본소득을 주는 것은 비효율을 그대로 둔 채 추가 복지지출만 늘리는 것으로, 이는 프리드먼의 생각이 아니다.

일반 복지제도가 하듯이 사용처를 정한 지원 대신 현찰을 직접 지급하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데 사용할 테니 선택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 이는 프리드먼이 가장 중요시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고 경기 부양과는 무관하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하고 싶지만, 생계가 막연해 하지 못한다면 기본소득은 그런 선택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한편, 조건 없이 같은 액수의 돈을 나눠 줄 때 경제학이 목적하는 바는 유인의 왜곡을 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근로소득세를 걷으면 일할 때마다 버는 돈 중에 세금만큼 자기 것이 안 되니 열심히 일할 유인이 줄어든다. 프리드먼은 이를 피하기 위해 일정 액수까지는 세금을 걷지 않아 유인의 왜곡을 없애자는 것이다.

물론 동등한 보조금 지급을 통해 평등이라는 목적도 달성하지만 이는 부차적 문제다. 위에 설명한 음의 소득세는 모든 사람에게서 일정 액수의 기본소득을 나눠 주면서 일정한 세율로 소득세를 걷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쉽게 증명할 수 있다.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는 이 점을 설명하면서 굳이 복잡하게 음의 소득세를 계산할 필요 없이 일정 액수를 기본소득으로 나눠 주고 모든 사람에게서 소득세를 걷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 역시 행정비용 절약을 위한 것이지 개인의 소득액을 모르니 모두에게 같은 액수의 돈을 나눠 주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류경제학이 생각하는 기본소득제도만이 올바른 정책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주류경제학도 기본소득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면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인호 <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