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elf-millionaire

기여코 진한시대를 이야기하게 만드네... 없는 자들인 전국민들에게, 우린 잔혹한 진시황제를 계속 피하면서 이제 한고조,무제,광무제를 다시 찾아야 한다...!!!!!

게코(Gekko)의 인물평을 굳이하자면 그 어설픈 항우들은 신경꺼라^^ 리틀 진시황제 윤 석열이부터 어설픈 유방, 무제, 광무제들인 이 낙연, 정 세균, 이 광재도 그렇고 보수진영의 그 되먹지 않은 모지리 인간들은 언급하기도 싫고~~~^^ 기타 추 미애씨도 안 철수씨는 제발 법무부장관이나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라면 내 찬성한다만 아직 대통령감은 아니다...!!!!!

 

유방 (Liu Pang)

한 무제

광무제

직전 검찰총장에 전 감사원장에 개나 소나 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난리네~~~^^ 2022년 대선전에 춘추전국시대의 군웅들이 할거한다는 기분이 드네요~~~

https://blog.daum.net/samsongeko/11127

 

직전 검찰총장에 전 감사원장에 개나 소나 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난리네~~~^^ 2022년 대선전에 춘

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 중국 고대 역사 시대. BC 770년, 주나라가 호경에서 낙읍으로 옮긴 후부터 진나라가 221년 중국을 통일하기까지를 일컫는다. 춘추시대는 공자가 쓴 역사서 <춘추>의

blog.daum.net

 

여긴 서양이 아니며, 난 대한민국에서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할 선민통치자나 정치인 배출은 불가능하다고 생각.... 그러므로 "최대 다수의 최소 불행"을 강행하라~~

https://blog.daum.net/samsongeko/11115

게코(Gekko)의 논평 - 오늘부로 현정권도 "국정농단세력"이상으로 타도의 대상이며, 본인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다면 진보/보수를 떠나 이 재명 경기도지사를 밀어라~~~

https://blog.daum.net/samsongeko/11108

 

게코(Gekko)의 논평 - 오늘부로 현정권도 "국정농단세력"이상으로 타도의 대상이며, 본인이 없는

그 뉴딜정책을 유도했던 J. M. 케인즈... '장기에는 우리 모두 죽는다.' 제가 주식 투자 실전에서 명구로 삼는 말입니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9639 ​ 그 경제학계에서는 이 상황을 케인즈의

blog.daum.net

 

진·한시대(秦漢時代)

 

 

진·한시대(秦漢時代)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가 성립했던 시대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전국통일(BC 221)부터 후한의 멸망(AD 220)에 이르는 약 440년간을 말하는데, 이 사이에 네 나라가 흥망했다.

산시[陝西] 지역을 발판으로 한 진은 주가 낙읍으로 천도하던 해에 주왕에게 제후로 인정받았다.

춘추시대에는 목공(穆公:BC 659~621 재위) 때 잠시 중국 서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중원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발전했지만 그후로는 위세를 떨치지 못했다.

이민족의 요소를 다분히 지닌 후진국으로 간주되던 진은 전국시대 효공(孝公:BC 361~338 재위) 때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결국에는 BC 256년 주를 멸망시켰다. 진왕 정(政)은 천하를 평정한 후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했다.

그는 천제에 비견하는 절대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존호를 황제라고 하고 시황제임을 선포했다. 그는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도량형·문자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리 막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나아가 정치를 비판하는 유가들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유생 460여 명을 생매장시켰으며(→ 분서갱유) (분서갱유),장대한 능묘와 궁전을 짓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징발했다.

BC 214년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했으며 흉노를 정벌하기도 했다. 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았다. 이처럼 계속되는 대규모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후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 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쇠퇴하다가, BC 206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결국 멸망했다.

그해 항우는 자립하여 서초(西楚)의 패왕임을 선포하고 유방을 비롯한 공적이 있는 장군 18명을 각지에 분봉했다. 그러나 이들은 항우의 조치에 불만을 품어 곧 산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항우가 북상한 사이에 유방은 한중[漢中: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난정 현(南鄭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옛 진의 땅으로 들어가 항우와 대적했다.

4년간의 싸움 끝에 패한 항우는 BC 202년 자살했으며, 유방이 제위에 올라 수도를 장안(長安)에 세우고 한을 창건했다.

한의 성립

유방은 진의 제도를 많이 답습했지만 지방행정에서는 군현제를 변형시킨 군국제(郡國制)를 채용했다. 당시 한의 직할군은 황허 강 중류지역 서쪽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한신(韓信) 등 7명의 장수를 봉한 제후국이 전체의 60% 정도를 차지했다.

한의 황제는 사실은 이름뿐인 패왕에 불과했다. 유방은 재위중 창사 왕[長沙王] 이외의 이성(異姓) 왕들을 차례로 정복하고 유씨 일족을 봉했으며, 왕국의 법제와 관제를 한과 같게 했다.

그러나 한의 황제는 절대적인 황제권을 확립하기 위해 왕국을 억압하고 그들의 권한을 박탈할 필요가 있었다. 경제(景帝) 때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을 계기로 제후왕의 영지와 권한을 줄이는 정책이 강화되었다.

무제(武帝) 때에는 왕의 영지를 자식들에게 분할·상속시키게 했다.

종묘제사 때 제후가 헌상하는 황금의 규정을 엄격히 하여 BC 112년 이 규정을 어긴 죄로 106명의 제후를 처벌했다. 제후왕에 대한 각종 규제를 강화하고 왕은 단지 조세를 받아 살아가는 존재로 만들었다.

또 주자사(州刺史)를 설치하여 지방행정에 대한 감찰체제를 확립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무제 때에는 군현제도에 의한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었다.

무제는 오랫동안 한을 괴롭혀왔던 북방의 흉노족을 정벌하고, 이곳에 하서4군(河西四郡)을 설치했다. 이밖에도 남월국(南越國)·동월국(東越國)·서남이(西南夷) 등을 정벌하고 각 정벌지에 군을 설치했다.

대규모의 대외원정이 해마다 계속되어 한편으로는 재정난이 심각해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제 지배체제가 강화되었다. 그는 향리(鄕里)에서 현량(賢良)·방정(方正)·효렴(孝廉)의 사(士) 등을 추천하게 하여 신진관료로 등용했다.

또한 동중서(董仲舒)의 헌책(獻策)에 따라 춘추 공양학파(公羊學派)의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아 이것을 문교·사상 정책의 기본으로 정했다. 그결과 유교가 황제 지배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혁명사상을 끌어들여

후에 왕망(王莽)의 제위찬탈을 긍정하게 되었다. 무제는 경제발전에도 적극적이었다. 농업개발을 장려했으며, 관중[關中:웨이수이 강 일대]에서는 대규모 관개공사를 시행하고 황허 강의 치수공사도 벌였다.

재정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민간의 화폐 주조를 금지하고 통화를 오수전(五銖錢)으로 통일했다. 또 각종 조세를 늘리고 상인에 대한 자산세를 설치했으며 밀고제에 의해 징세를 철저히 했다.

나아가 염철전매·균수평준법(均輸平準法)·각고를 통해 국가의 재정을 충실히 하고 민간경제의 안정을 꾀했다. 이와 같이 융성했던 한 제국도 무제가 죽은 다음부터는 점차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제가 치세중에 승상과 어사대부 등 외조(外朝) 관료의 권한을 억눌렀던 것이 측근인 내조(內朝)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나아가 외척과 환관의 전횡을 야기한 화근이 되었다.

한편 향리에서는 호족들에 의한 토지겸병이 증대되고 일반 농민들이 몰락하여 호족에 의탁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때문에 향촌사회의 공동체적 질서가 무너지고 계급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왕망의 정치...

이같이 사회적·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한은 왕망에 의해 잠시 단절되었다. 그는 원제(元帝) 왕황후(王皇后)의 일족이었는데 주위의 두터운 신망을 얻어 대사마에까지 올랐다.

애제(哀帝)가 죽은 후에는 9세인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 정치의 실권을 잡았다. 그는 어린 황제를 보필한 공로를 인정받아 안한공(安漢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AD 5년에 반란을 일으켜 평제를 살해했다.

8년 자신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당시 유행하던 참위설(讖緯說)로 제위찬탈을 정당화했다. 유교를 열렬히 신봉했던 왕망은 제위에 오르자 주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유교주의적인 이상국가를 건설하고자 각종 개혁에 착수했다.

토지문제에서는 왕토사상(王土思想)에 기초하여 토지소유를 제한하고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했다.

화폐는 기존에 통용되던 오수전을 폐지하고 새로 대전(大錢)을 주조했으며, 도화(刀貨)·포화(布貨)·화천(貨泉) 등의 수십 가지 화폐를 발행했다. 이상의 여러 개혁들로 인해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 곳곳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18년 산둥 성 낭야(琅邪)에서 일어난 '적미(赤眉)의 난'은 번숭(樊崇)의 지휘 아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장안까지 침입했다. 호족들은 스스로의 보호를 위해 무장했는데 그 가운데에는 농민군과 협력하여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들도 있었다.

난양[南陽]의 유씨 집단은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워 왕망에 대항했다. 24년 유수(劉秀:光武帝)가 유현에 이어 황제가 된 후 적미군을 평정하고 호족군들도 항복시켜 한을 다시 일으켰다.

후한의 흥망...

광무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그가 한의 재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여러 지방호족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족 지주정권의 성격을 지닌 후한은 왕망의 토지소유 제한정책을 완화하고 노비매매의 금지령을 폐지했다.

그밖에 왕망이 만든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행정의 규모나 군비를 가능한 한 축소하여 불필요한 것을 없앴으며, 민생의 안정과 생산의 회복에 힘썼다. 다만 왕망이 중시했던 유교만은 더욱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태학과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했다.

광무제부터 명제(明帝)·장제(章帝)에 이르는 약 60년간은 국내 제도가 정비되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후한의 최대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4대 황제인 화제(和帝) 이후로는

어린 황제가 잇따라 제위에 오르고 황실의 혈통이 끊기는 일도 있어서 외척과 환관 등이 다시 실권을 장악했다. 화제 때의 두씨(竇氏), 안제(安帝) 때의 등씨(鄧氏), 순제(順帝) 때의 양씨(梁氏) 등이 대표적 외척이다.

반면에 전한(前漢) 선제(宣帝) 무렵부터 지방호족 출신이 군·현의 관리나 중앙관료가 되는 경우가 잦아졌는데, 광무제가 호족의 도움을 받아 후한을 세운 뒤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광무제는 예교(禮敎)를 중시했으며 태학을 세워 사인(士人)을 양성했는데, 이들은 관리로 진출하는 일 외에 향리에서 정치를 비평하며 '청의'(淸議)를 조성했다. 청의의 공격목표는 주로 외척과 환관들이었고,

이때문에 화제 이후 환관과 조정 내 사인들의 충돌이 잦아졌다.

환관들은 황제의 힘을 배경으로 사인들을 탄압했으며, 166, 169년 2차례에 걸쳐 사인들을 체포·투옥·사형하는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켰다. 2번째 당고에서 100여 명이 사형당하고 600~700명이 금고(禁錮)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청류파 관료는 정계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향리의 청의운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이후 위진남북조시대 귀족정치의 저류를 형성했다.

중앙의 정치가 쇠퇴해지자 흉노족을 대신하여 오환족(烏桓族)과 선비족(鮮卑族)이 북방을 침입하기 시작했다.

서역 여러 나라들도 한을 배반했으며 산시[陝西] 지방의 강족이 반란을 일으켰다. 국내에서는 기근과 반란이 이어져 빈곤한 농민들 사이에 미신과 민간종교가 확산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촉(蜀:쓰촨 성[四川省] 서부)의 장릉(張陵)은 주술과 부적으로 병을 고치고 평안을 준다는 오두미도(五斗米道)를 퍼뜨렸다.

거록(鉅鹿:지금의 허베이 성[河北省] 쥐루 현[巨鹿縣])의 장각(張角)도 이것과 유사한 태평도(太平道)를 허베이·허난·산둥 일대에 퍼뜨려 잠깐 사이에 많은 신자를 확보했다.

이들은 종교왕국의 건설과 한의 타도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때문에 한의 탄압을 받게 되자 184년 황색 머리띠를 두르고 일제히 봉기했다. 이것을 '황건(黃巾)의 난'이라고 하는데, 얼마 후 장각이 죽자 황건의 세력도 약화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크고 작은 농민반란이 일어나 각 지역이 황폐해졌고, 반란 진압을 기회로 곳곳에서 할거세력이 출현했다. '황건의 난'을 기화로 환관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허베이의 호족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였던 원소(袁紹)는 동탁(董卓)에게 지원군을 요청하고 궁중에 들어가 189년 8월 2,000여 명의 환관을 죽였다. 뒤늦게 달려온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192년 동탁은 부하에게 살해되었고, 원소는 허난에서 일어난 조조(曹操)에게 격파당했다. 조조는 동북지방의 오환을 정복하여 북부지방을 평정하고 오의 손권(孫權), 촉의 유비(劉備)와 대립했다.

그러나 적벽(赤壁:지금의 후베이 성 자위 현[嘉魚縣] 동북쪽) 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했고, 그뒤로는 세력이 강남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 헌제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하여 전후 400년에 걸친 한조도 멸망했다.

사상과 문학

전한 초기에는 황로사상(黃老思想)이 유행하다가 무제 때 동중서의 헌책(獻策)으로 유학이 국교가 되었다.

당시 유학은 진의 분서(焚書)에 의해 경전을 모두 잃어버린 후, 학자들이 암송하여 전해온 내용을 당시의 문자인 예서(隸書)로 기록한 경전에 의거했다. 이를 금문학파(今文學派)라고 한다.

이에 반해 고문학파(古文學派)는 진대(秦代) 이전에 사용되던 과두문자로 씌어진 경전에 의거했는데, 고문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 새로운 경학을 필요로 하던 왕망에 의해 잠시 발전했다.

후한초 광무제는 학자들을 모아 금문학과 고문학을 절충하고 5경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논한 〈백호통의 白虎通義〉를 편찬하게 했다.

그후 종래 어느 한쪽만을 진경(眞經)으로 인정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2가지 경전을 함께 연구하는 학풍이 일어났고, 정현(鄭玄)·허신(許愼) 등에 의해 훈고학·문자학이 발전했다.

한대에는 산문으로 가의(賈誼)의 〈신서 新書〉,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반고(班固)의 〈한서 漢書〉, 왕충(王充)의 〈논형 論衡〉 등의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나왔다. 특히 〈사기〉는 한대의 기념비적인 역사책으로 기전체(紀傳體)라는 새로운 체제를 창조하여 이후 2,000년간 중국 정사(正史)의 모범이 되었다.

 

 

강성 진보주의자인 내가 기본소득을 설명한다... 1인당 GDP 3만불 시대라고 했나...?? 그 밑에 있는 하위 40%에게 경제 대개혁을 통해 차액을 전부 보전해 주는 것이다...

https://blog.daum.net/samsongeko/10651

그 기본소득이라... 영화 "공조"의 극중대사로 갈음... "사실 대한민국에 좌우는 없죠... 있는 놈와 없는 자라면 모를까~~~"​​​

http://blog.daum.net/samsongeko/9927

"노력보다 많은 富... 그 이상은 덤"

강성 진보주의자이자 강력한 민족주의자인 제가 생각하는 부는 이렇습니다... 누구는 가난한 이의 자식으로 태어나고요... 그 누구는 부자집 자식으로 태어남니다... 그 출발선부터 공정하지 않고요... 또 이 사회는 경쟁에서도 기회의 평등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 제가 이룰 모든 부/재산/돈은 제 능력과 실력이나 그 혁신에 의한 기여는 22.3%이고 나머지 77.7%는 그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 그리고 본의아니게 그들에게 제가 저지를 각종 반칙과 특권의식, 때로는 갑질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대부분이 내것이 아니며 사회 구성원으로서 존재할때도 가능하면 더불어사는 세상의 발전에 쓰여야하고요... 그 사망전 부존재가 예상될때에는 남아 있는 재산도 90%이상 사회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정부에서 거두들이는 상속세및 증여세를 통하여 말입니다... 전 이것도 다내고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있다면 다시 자식들에게도 10%만 넘겨줍니다... 잔여 90%는 다시 각종 후원과 기부처리합니다... 제 자식들은 그들의 노력으로 다시 시작해야죠... 그 부/재산/돈 물려줘서 그나마 사회적 폐악이나 저질르지 않으면 다행인데, 암튼 잘되는 경우를 별로 못봤고요... 제가 있는 것들과 재벌 대기업에 이빨을 드러내는 이유입니다... 이것을 안하니깐요... 이 말은 전국민들에게 해당합니다... 그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에 의해 본인들이 생각하는 성공 대다수가 이루어지거나 특히 사회취약계층들이 부당하고 공정하지 못하게 당하면서 재산이 형성되거나 이루어지고요... 아니 본인들이 저지른 각종 반칙과 특권의식, 갑질에 의해서 본인들의 그 성공도 부도 이루어진다는 제 말 명심하시고요...

⚛ 오늘의 명언

공정함이란 남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받지 않는 것이다.

– 톨스토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