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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코인터내셔널(GI)

그 봉 준호 감독...?? 어제 10년만에 아버지가 또 돌아가셨다...!!!!!

 


 아래는 어제 장마감후 이 시간까지 주요 6개 SNS에 올린 코멘트입니다...


 "현재 경기도 군포시 직영 지역증권방 네 곳에 오시는 관내 중소 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의 업태는 다양합니다. 아침부터 와 장중 거래/매매하고 오후부터 되지도 않는 노래방을 운영하시는 사모님부터 군포공단내 박스 제조 사장님부터 말입니다. 산본중심상가내 미용실 운영부터 대야미 한 허름한 창고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사모님/사장님등으로 말입니다. 전 아무튼 이들 중장기 부업투자일 수밖에 없는 중하위층/서민들의 재테크 중심 증권투자, 그 주식투자실전을 지역 밀착형 증권방(기존 증권사 지점과는 차별화된 종합자산관리서비스 지향) 사업으로 이들부터 주식부자로 만들고자 합니다... 오늘도 몇 분들과 그 사업 현황/애로사항/재테크부터 지원을 원하는 부분등 실질적인 이야기를 들었고요~~~^^ 한두군데 더 들리고 나흘째 이어지고 있는 순행 마무리하죠~~~ "왜 우리 증권전문가들은 그들을 주식으로 성공시키지 못하는가...??'라는 화두로 시작된 20년전 제 화두는 아직 미완이네요~~~ 게코(Gekko)"


 

 The greed is good...


 "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제 대증권시장 필명의 연원이 있는 영화 "월스트리트"의 주인공 마이클 더글라스의 아버지 커크 더글라스씨께서 향년 103세로 말입니다... 대표작 "스팔타커스", "OK목장의 결투"가 있고요~~~ 제 아버지 돌아가신 2010년이후 정신적 아버지였는데 말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극중 고든 게코(Gekko)역으로 1987년작 "월스트리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뭐진 그 아드님 마이클 더글라스씨에게도 여전히 당신은 제 정신적 지주이며 위로의 말씀을 올림니다. 이 코멘트 꼭 그 분이 봤으면 좋겠군요~~~~~ 게코(Gekko)"


 "어제는 오후에 본사 경영기획실에서 잠시 들려 올라온 계열사별 경자년 사업계획들의 최종분은 결제했고, 각 회사별 실질적 경영 또한 이미 시작됐고요... 여기에 어제는 경자년 두번째 월간 단체회식일이자 돌아온 목요일 정기회식일이였습니다~~^^ GI 총무팀은 하루종일 바빠야했고요~~~^^ 게코인터내셔널(GI) 산하 열계열사 전체 임직원들이 어제는 군포/산본/금정, 여의도, 강남 논현동과 선릉역, 역삼역에서 다들 퇴근후 내려오는 날~~~^^ 근데 연초부터 중동에서는 전쟁날뻔 했고 여기에 중국쪽에서는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회 곳곳이 휴무/휴업 분위기에 재택근무 분위기라 단체회식은 엄두도 못냈고요~~~^^ 저도 이 판국에 기해년 미중 무역전쟁으로 올해도 신년초부터 다시한번 어려워진 관내 중소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 순행돌고 들어와서 제 가족부터 챙겼네요~~~ 늦둥이 아들놈 감기/독감 유무 확인에 둘째 임신한 아내 몸상태부터 말입니다... 한 숨 자고 어제 못친 KOSDAQ 당일마감이나 치러 애엄마 몰래 서재로 기어나왔네요~~~~~ 게코(Gekko)"


 

 할리우드의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지난 1996년 3월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68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 트로피를 받는 모습.


 "영화의 황금기 경험"... 큰 발자취 남긴 커크 더글러스...

 103세로 별세... 'OK 목장의 결투'·'스파르타쿠스' 등 주연...

 

 


 'OK 목장의 결투'(1958) 속 총잡이부터 '스파르타쿠스'(1960)의 로마 검투사까지...

 

 5일(현지시간) 향년 103세로 별세한 미국 배우 커크 더글러스는 70여년 동안 연기 생활을 하며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은 영화들에 출연한 명배우다. 총 90여편 영화에 출연했으며 이 중 30편은 제작에도 직접 참여했다. 직접 연출한 영화도 2편이다.


 1916년 미국 뉴욕에서 러시아 출신 유대인 이민자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이름은 이수르 다니엘로비치 뎀스키였지만, 이후 해군에 입대하면서 커크 더글러스로 개명했다. 1946년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으로 스크린에 데뷔했으며 이후 '챔피언'(1949)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후 '율리시스'(1954)와 '열정의 랩소디'(1956), 'OK 목장의 결투', 그리고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광의 길'(1957)과 '스파르타쿠스'와 같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들을 통해 1950년대 미국 영화계 대표 스타가 됐다. 오랜 기간 연기 활동을 했지만 아카데미상과는 큰 인연이 없었다. 그는 총 세 번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지만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러다 마침내 1996년 공로상을 받았다. 그렇게 응어리처럼 남은 아카데미 주연상 꿈은 1988년 그의 아들 마이클 더글서스가 '월스트리트'로 대신 풀어준다. 이 밖에도 1991년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1999년 미국영화배우조합(SAG)에서 각각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1950년대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불 때 공산주의와 연루된 의혹으로 할리우드에서 배척된 영화인들이 일터로 복귀하는 데에도 역할을 했다. 자신이 1952년 설립한 영화 제작사를 통해 당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작가 돌턴 트럼보를 고용했는데, 이는 다른 영화인들도 업계에 복귀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비평가들이 나를 배우로 인정해 줄 필요는 없다"며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그 누구도 나의 상관(boss)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 찬일 영화 평론가는 "커크 더글러스는 캐릭터나 연기로 기억되는 진중한 배우였으며 주류였지만 비주류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며 "고전 영화에서 현대 영화로 넘어오는 시기에 활발히 활동했던 배우"라고 평가했다.

 

 

 타계한 할리우드의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의 생전 모습을 담은 1962년 8월 9일자 사진.


 1943년 다이애나 딜과 결혼해 두 아들을 뒀으며 이후 1951년 이혼했다. 프로듀서였던 앤 바이든스와의 두 번째 결혼에서도 두 명의 아들을 뒀다.


 앤 바이든스와는 60년 넘게 해로했다. 첫째 아들인 마이클 더글러스는 어쩌면 아버지를 뛰어넘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다. 따라서 젊은 세대에게 커크 더글러스는 할리우드 명배우보다는 마이클 더글러스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졌다. 고인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움푹 들어간 턱을 아들들이 모두 물려받았다.


 세계 분쟁 지역에 학교와 공원을 세우는 등 자선활동도 활발히 했다. 1991년에는 헬리콥터 사고를 당했지만 살아남았고 1996년에는 뇌졸중을 앓았다. 이 영향으로 언어 장애를 겪었지만 같은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 수상 소감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됐다. 이때의 경험을 담은 책 '시련은 곧 희망입니다'(My Stroke of Luck)를 펴내기도 했다.


 사고와 병에도 고인은 기록적으로 장수했다. 2016년 100세 생일을 맞아 "운 좋게도 63년 전에 내 영혼의 단짝을 찾았다. 우리의 멋진 결혼생활과 밤마다 나누는 '황금시간' 대화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고 표현하며 해로가 장수의 비결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들 마이클 더글러스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아버지에 대해 "영화의 황금기를 경험하고 인생의 황금기까지 보낸 배우이자 정의와 자신이 믿었던 대의에 헌신해 모두가 우러러볼 기준을 세운 박애주의자"라며 애도를 표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의 커크 더글러스 명패에 꽃이 놓여 있다. 향년 103세로 이날 별세한 그는 '스파르타쿠스', '열정의 랩소디'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대항하기도 했다.


 할리우드 황금기 큰별 '커크 더글러스' 지다...

 유대계 '넝마주의 아들' 출신... 향년 103...
 1946년대 데뷔한 뒤 70년간 90여편 출연...
 헬기 사고·언어장애도 극복 '자서전' 남겨...


 

지난 5일(현지시각) 별세한 커크 더글러스는 20세기 할리우드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명배우였다.


 할리우드 황금기를 이끌고 백수를 누린 명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미국 로스엔젤레스 비버리힐즈의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로이터> 등 외신이 5일(현지시각) 보도했다. 향년 103. 고인의 맏아들로 캐서린 제타 존스와 함께 할리우드 스타 부부인 마이클 더글러스(76)는 이날 페이스북 성명을 통해 부친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구체적 사인은 공개되지 않았다.

 

 더글러스는 1916년 미국 뉴욕에서 가난한 유대계 러시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88년 자서전의 제목처럼 <넝마주의의 아들>에서 세계적인 스타로 자수성가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다. 드라마 예술아카데미에 진학해 배우의 꿈을 키운 그는 1946년 <마사 아이버스의 위험한 사랑>으로 데뷔했다.


 1949년 영화 <챔피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열정의 랩소디> <해저 2만리> <오케이(OK) 목장의 결투> <스파르타쿠스>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다.

 

 

 커크 더글러스는 1960년 직접 제작한 영화 <스파르타쿠스>(감독 스탠리 큐브릭)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약 70년간 활동하며 9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한 더글러스는 화가 반 고흐 역을 맡아 안소니 퀸(폴 고갱 역)과 열연한 영화 <열정의 랩소디>(1956)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는 세차례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랐을뿐 수상은 못했고, 1996년 공로상을 받았다.


 그는 1955년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독립 프로덕션 ‘브라이나 컴퍼니'을 세우고, 1960년 자신이 주연·제작·총지휘를 맡아 제작비 1200만 달러의 대작 <스파르타쿠스>(스파타커스)를 만들었다. 이때 그는 이른바 메카시 광풍으로 ‘공산주의자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던 돌턴 트럼보를 <스파르타쿠스>의 작가로 고용함으로써, 다른 블랙리스트 영화인들도 복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1년 <뉴욕타임스>(NYT)에 보낸 서한에서 그는 트럼보를 지원한 일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선택 중 하나”라고 밝혔다. 고인은 부인과 함께 ‘앤 앤드 커크 더글러스 재단'을 만들어 세계 분쟁 지역에 학교와 공원을 세우는 등 자선활동도 활발히 했다. 2000년에는 그의 자선금을 받은 캘리포니아주의 한 학교가 이름을 ‘커크 더글러스 고교’로 바꾸기도 했다.


 그는 1991년 헬기 사고로 척추수술을 받았고, 그뒤 1995년에는 뇌졸중에 걸려 언어장애까지 겪었다. 이때 자살 위기까지 겪었으나 가족들의 도움으로 재활에 성공한 그는 <시련은 곧 희망입니다>(My Stroke of Luck·2002년)를 펴내기도 했다.

 

 

 커크 더글러스가 2018년 101살 때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아들 마이클의 할리우드 스타의 거리 입성 행사 때 역시 배우인 손자 캐머런, 며느리 캐서린 제타 존스와 함께 했다.


 그는 1943년 첫 결혼에서 두 아들, 이혼한 뒤 54년 프로듀서 앤 바이든스와 재혼해 두 아들 등 모두 4명의 자식을 뒀다. 2003년엔 첫 부인과 사이에 얻은 맏아들 마이클, 맏손자 캐머런 더글러스와 3대가 함께 영화 <더글러스 패밀리>(It Runs in The Family)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이 영화에서 85살인 커크는 뇌졸중을 앓는 기업 변호사로, 첫 부인이자 마이클의 어머니인 다이애나가 부인으로 등장했고, 마이클은 완고하고 냉담한 아버지와 화해하려고 노력하는 아들로, 캐머론은 뉴욕 클럽의 유명 디스크 자키이자 마약에 빠진 대학생으로 실제와 가까운 이야기를 코미디로 그렸다.

 

 

 커크 더글러스는 1954년 재혼한 부인 앤 바이든스(왼쪽)와 66년간 해로했다...

 

 2016년 100살 생일 때 더글러스는 “운 좋게도 63년 전 내 영혼의 단짝을 찾았다. 우리의 멋진 결혼생활과 밤마다 나누는 ‘황금시간' 대화가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왔다”라며 해로가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마이클 더글러스는 이날 페이스북에서 “(아버지는) 영화의 황금기를 거치고 인생의 황금기까지 보낸 배우이자, 정의와 자신이 믿었던 대의에 헌신해 모두가 우러러볼 기준을 세운 박애주의자”라며 “커크는 좋은 인생을 살았고 영화계에 수많은 후세대들이 이어갈 유산을 남겼으며 지구평화를 이룩하고 대중을 지원하려고 노력한 자선가로서의 역사도 남겼다”고 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