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답하는 스티븐 비건 미 대북정책특별대표(서울=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 로비에서 워킹그룹 2차 회의를 마친 뒤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18.12.21
제재에 막혔던 남북교류, '美 지원사격'에 순항 기대...
- 美, 남북교류·인도적 지원 카드로 북미대화 견인 의도...
- 800만 달러 대북 인도적 지원 집행은 해 넘길 듯...
국제사회 대북제재에 가로막혀 있던 남북간 교류협력 사업들이 미국의 '지원사격' 속에 당분간 순항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미국은 남북교류와 대북 인도적 지원에 유연성을 발휘함으로써 북한은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 북미협상의 교착국면을 타개하겠다는 의지를 보임으로써 앞으로 북한의 반응이 주목된다.
정부는 21일 열린 한미워킹그룹 2차 회의를 통해 남북의 철도·도로 연결 착공식과 유해발굴 사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끌어냈다. 미국 정부는 이들 사업을 위해 북한에 들어갈 물자와 장비에 대해 제재 예외를 적용해주겠다는 뜻을 밝혀 속도감 있게 사업이 진행될 전망이다.
또 정부의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의 대북지원 사업도 미국의 지지 속에 조기에 집행될 계기를 마련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열린 보건회담에서 남북 양측은 인플루엔자 정보를 교환하고 북측에 타미플루를 제공하는 방안을 협의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다 인도적 차원에서 추진돼온 이산가족 화상상봉과 북한 양묘장 현대화 등 다른 남북교류협력 사업에도 탄력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화상상봉은 남북 간에 영상을 주고받기 위해 북측에 반입해야 하는 통신선과 모니터 등 장비들이, 양묘장 현대화 사업은 일부 기자재가 제재목록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워킹그룹 회의 직후 "(화상상봉 등) 나머지 여러 가지 이슈들에 대해서도 모두 다 이야기를 했다"며 "잔잔한 문제들이 조금 남아있는 것 외에는 내년에도 계속 협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원칙적으로 한미가 남북협력사업의 추진에 공감대를 이뤘고 기술적인 협의가 남았다는 뜻으로 풀이돼 사업 추진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미국이 이처럼 한국 정부의 대북협력사업에 적극 협력하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북미대화가 교착에 빠진 상황에서 남북협력사업을 통해 북한에 제재 완화 가능성을 시사하고 관계개선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 대화의 불씨를 살리겠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스티븐 비건 미 대북정책특별대표가 이날 "북한과의 앞서 했던 약속의 맥락에서 우리는 양국 간 신뢰를 쌓기 위한 여러 방안을 검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북한과 약속'은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의 합의 사항인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건 특별대표가 한미워킹그룹 회의 직후 "북한과 다음 단계의 논의를 하기를 열망한다"며 북미대화를 언급한 것에는 남북교류와 인도적 지원이라는 카드를 통해 북한을 다시 대화판으로 불러내겠다는 의도를 확인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즉, 한국 정부의 중재 역할을 평가하면서 이번 워킹그룹 회의를 북미 대화로 가는 징검다리로 활용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미국의 의도는 "한국의 파트너로부터 훌륭한 아이디어를 들어 기쁘다"는 비건 특별대표의 발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다만, 우리 정부의 국제기구를 통한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 인도적 지원 집행은 올해를 넘길 가능성이 커졌다.
이 본부장은 "계속 의논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혔는데, 연내에 추가 워킹그룹 회의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북 인도적 지원 집행이 내년으로 미뤄지면 지난해 9월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교추협)에서 통과된 남북교류협력기금 지출에 대해 다시 의결을 받아야 한다.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1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청사에서 한미 워킹그룹 2차회의를 마치고 나와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2018.12.21
美 지지로 '남북관계-비핵화 선순환' 구도 탄력받나..
- 북미 교착 장기화로 남북관계 추동력 잃나 했지만...
- 美 남북협력 지지·인도지원 카드로 北에 대화손길...
미국이 남북 교류·협력과 대북 인도지원에 전향적 입장을 밝히면서 '남북관계-비핵화'의 선순환 구도를 만들겠다는 정부 구상이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올 한 해 우리 정부는 철도·도로, 문화·체육, 산림, 보건 등 여러 분야에서 남북 교류·협력을 적극 추진해왔다.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추동하고 북미대화 순항을 유도하겠단 전략이 담겼다.
그 과정에서 북한·미국과의 불협화음도 적지 않았다. 북한은 남북관계 발전 속도가 너무 더디다고, 미국은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느낀 탓이다. 특히 순항하는 남북관계와 달리 북미 대화 교착이 장기화하면서 '앞서가는 남북관계가 비핵화에 도움이 될 수 있냐'는 회의론이 제기됐다. 이대로라면 남북관계 발전마저도 여의치 않아질 수 있단 우려도 나왔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지난 18일 "남북관계는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비핵화를 추동하는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비핵화가 진전되지 않으면 남북관계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도"라며 "비핵화도 본격 궤도에 올라서도록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다행히 스티브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의 19~22일 방북을 계기로 남북관계 '속도 조절' 우려는 줄고 남북 협력이 다시 추동력을 얻는 모양새다. 비건 대표는 21일 조 장관을 만나 "(공동조사를 위한 남측) 기차가 북쪽으로 출발하는 것을 보며 저희도 매우 설렜다"며 지지를 표했다. 지난 8월 경의선 공동조사에 제동을 걸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미는 같은 날 열린 워킹그룹회의에서 남북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에 필요한 물품에 제재 적용을 면제하기로 하고 우리 정부가 북한에 독감 치료제 타미플루를 지원하는 것에 합의했다. 미국도 비핵화 유인을 위해 북한과의 신뢰·협력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우리 정부 입장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비건 대표는 "평화를 위해 문을 열어놓고 있다"며 대북 인도지원을 위해 미국인의 북한 여행금지조치를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 "북미신뢰 구축을 위한 여러가지를 탐색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한미가 한층 가까워진 만큼 남북관계 발전과 비핵화의 선순환 구도가 자리를 잡을 가능성은 커졌다는 관측이 나온다.
관건은 북한이 이에 호응할 것인지다. 북한은 미국이 내민 '남북협력 지지'와 '인도지원' 카드를 신뢰 구축 조치이자 상응조치로 평가하고 비핵화 협상에서 진전된 입장을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 반면, 제재·압박 일변도에서 한발 물러나 유화 메시지를 던지긴 했지만 안전보장과 경제제재 해제라는 북한의 핵심 요구는 비껴간 만큼 북한의 변화를 끌어내긴 역부족일 것이란 전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