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주차장 진입 안돼… 택배차 ‘손수레 운반’ - 한 택배 기사가 20일 오후 서울 왕십리 A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에서 물품을 손수레로 옮기고 있다. 이 아파트의 지하 주차장 높이는 2.3m로, 택배차(높이 2.5m)가 들어가지 못한다. 주민들은 올해부터 단지 내 지상 도로의 택배 차량 진입을 막고 있다.
[오늘의 세상] [일상이 된 '택배 갈등'] [上] 속 터지는 시스템
- 택배 年23억건... 對面배송 20%뿐, 기사도 고객도 불만
- 1인당 택배 年 45회 받는데... 문앞에 주문상품 던져져 있고 분실·훼손으로 감정싸움까지...
직장 남성 곽모(34)씨는 이달 초 인터넷에서 공기청정기와 운동 기구를 주문했다. 이후 3일간 지방 출장을 다녀왔더니 현관문 앞에 주문한 상품이 덩그러니 있었다. 곽씨는 "고기나 생선이었다면 다 썩었을 텐데 최소한 전화 연락은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직장 여성 윤모(35·서울 광진구)씨는 "택배 기사의 전화가 걸려 올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린다"고 했다. 직장 회의 시간에 걸려온 택배 기사 전화를 곧바로 끊은 게 발단이었다. 화난 택배 기사가 다시 전화를 걸어 따졌고, 윤씨가 "경비실에 맡기면 되지 않느냐"고 맞받아치면서 전화로 큰 싸움을 벌였다.
윤씨는 "기사가 주소·연락처를 뻔히 알고, 낮시간 집에 아기와 베이비시터만 두고 출근하는 엄마 입장에서 해코지라도 당할까 봐 택배 회사에 항의도 못했다"고 말했다. 택배는 이제 생활의 일부가 됐지만 택배 제도와 문화는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다.
'택배 사회'가 집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편리함을 가져다줬지만 동시에 여러 가지 갈등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2000년 연간 2.4회에 불과했던 국민 1인당 택배 이용 횟수는 작년 44.8회로 늘어났다. 가구당으로 따지면 116회. 집집마다 사흘에 한 번꼴로 택배를 받는다.
단지 내 택배차 진입을 막아 발생한 다산신도시 사태는 수많은 물밑 '택배 갈등'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택배차 진입을 둘러싼 크고 작은 싸움은 전국 각지 신축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다. 불친절, 물건 분실과 훼손 등을 둘러싼 불만은 끊이지 않는다. 공정거래위원회 소비자상담센터에는 작년 한 해에만 택배 관련 불만이 1만건 이상 접수됐다.
◇ 전국에 크고 작은 '다산신도시 사태'
지난 20일 오후 1시쯤 서울 성동구 한 아파트 단지 지하 주차장 입구에 '제한 높이 2.3m'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2.5m 높이 택배차 한 대가 그 앞에 주차했다. 택배 기사는 차에서 내려 상자 10여개를 손수레에 싣고 옮기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아파트 현관까지 이동 거리는 약 400m.
기사는 "주민들이 1월부터 택배차 지상 진입을 막고 있다"고 했다. 주민들은 "택배차가 단지 지상을 과속으로 달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세종시 한 아파트는 어린이 통행이 적은 오후 3시까지만 택배차 진입을 허용한다. 인천의 한 아파트 단지는 올 들어 우체국 집배원의 오토바이 사용까지 막았다. 입주민들은 '지상으로 다니려면 자전거를 이용하라'는 입장이다.
정부는 택배가 일상화되고, '지상에 차가 안 다니는 아파트' 시대가 열리는데도 30년 된 관련 제도를 손보지 않아 이번 사태의 불씨를 제공했다는 지적을 받는다.
현행 주차장법 시행규칙은 지하 주차장 높이를 '2.3m 이상'으로 규정한다. 1990년 개정 이후 28년째 그대로다. 이런 제도 아래 2000년대 중반 이후 '지상에 차가 안 다니는 아파트'가 일반화되면서 대부분 2.5m가 넘는 택배 차량은 아파트 진입 자체가 원천 봉쇄됐다.
국토교통부는 '다산신도시 사태' 갈등이 커지던 지난 17일 "지상에 차가 다니지 않도록 만든 단지에 한해 주차장 높이를 2.7m 이상으로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택배 회사 관계자는 "택배 차량의 높이나 아파트 지하 주차장 입구 높이에 관한 규정만 미리 바꾸었다면 불필요한 갈등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룰도, 문화도 없는 제멋대로 택배
많은 갈등은 낮은 수준의 택배 서비스에서 벌어진다. 택배업계가 자체 집계하는 대면(對面) 배송률은 회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 20%에 못 미친다. 공정거래위원회의 택배 표준 약관에 따르면 택배사는 고객에게 물건을 주고 확인을 받아야 하고, 경비원 등에게 맡겼다면 본인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상당수 소비자가 사전 연락 없이 현관에 방치된 택배 상품을 발견한다.
택배업계 관계자는 "약관대로 하면 하루 배달량 반의반도 못 한다"고 했다. 주부 손모(62·서울 마포구)씨는 "밤 11시가 넘어 현관문을 두드리는 경우도 있다"며 "혼자 있을 때면 덜컥덜컥 놀란다"고 했다.
경비원 대리 수령은 또 분실·훼손 책임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서울 종로구 한 아파트에서는 택배 물품 분실을 놓고 주민과 경비업체 간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울 강남권 A아파트 경비원은 "밤낮없이 택배를 찾으러 오는 주민 때문에 화장실을 못 갈 지경"이라고 했다. 일본은 상당수 아파트에서 경비원들이 택배를 대리 수령하지 않는 대신 무인 택배함을 설치해 놓고 있다.
한국 택배와 스위스 택배 - 서울 왕십리의 한 아파트에서 택배기사가 물건을 가득 실은 손수레를 끌면서 배달에 나서고 있다(왼쪽 사진). 스위스 취리히에서 스위스 우체국 관계자가 우편물 자율 배달 로봇에 물건을 싣고 있다. 이 로봇은 배달지 주소를 입력하면 최대 10㎏의 짐을 싣고 사람이 걷는 속도로 물건을 스스로 배달한다.
[일상이 된 '택배 갈등'] [下] 덩치 커져도 구멍가게 운영
- 외국엔 드론·로봇 택배… 한국은 '똥짐'에 운다
1992년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택배산업은 25년 사이 물량 기준으로 230배로 커졌다. 최근에도 매년 두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고 있지만, 택배차량 10대 중 3대 정도가 자가용으로 불법 영업하는 실정이다. 택배산업 지원을 위한 법률은 고사하고, 택배와 무관한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의 규제를 받는 탓에 증차가 이뤄지지 않아 벌어지는 일이다.
대형 택배업계 관계자는 "택배는 국민 생활 밀착형 산업이자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우리나라 어느 법에도 '택배'라는 단어조차 없다"고 말했다. 택배산업이 급성장하지만 택배 효율성 저하, 물류비 상승, 이동시간 증가에 따른 택배 기사의 근로 환경 악화 등 우리나라 택배산업이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덩치는 커졌지만, 규제에 묶인 택배산업
택배업계 매출은 2001년 6000억원에서 작년 5조2100억원으로 급성장했다. 2016년 말 영업용 택배차량은 2만8560대. 늘어나는 택배 물량에 대응할 수 있는 적정 수요(3만9951대)보다 1만1391대가 부족하다.
이 때문에 택배차량 10대 중 3대는 자가용 트럭을 영업용으로 불법 운행하는 실정이다.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은 '자가용 화물차를 유상으로 화물 운송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불법 영업으로 단속되는 건수도 2015년 407건에서 작년 762건으로 매년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2004년부터 대형 화물차 차주 요구로 트럭 신규 면허를 내주지 않았는데 대형 화물차와 달리 1.5t짜리 소형 화물차가 필요한 택배도 함께 규제를 받다 보니 벌어지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는 이달 들어 기존에 택배사업자와 계약을 맺은 택배 차주에 한해 자가용을 영업용으로 전환해주겠다고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차량 부족난이 해소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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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악한 택배 근로자들
택배 기사는 아침 7~8시 출근해 3~6시간 동안 맡은 지역으로 갈 택배 물건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류해 차량에 싣는다. 점심때가 되어서야 본격적인 배달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수도권의 경우 택배 기사는 하루 277박스(작년 3분기 기준)를 취급한다. 특수형태 근로종사자인 택배 기사들은 대리점이나 택배회사와 계약을 맺고 배송 건수에 따른 수수료를 받는다.
박스당 700~800원 수준이다. 하루 평균 12시간을 근무해 월 351만원의 매출을 올리고, 이런저런 비용을 빼고 나면 한 달 순수입은 250만원 안팎이다. 택배 물량이 늘고 품목도 다양해지다 보니 생수처럼 중량이 30㎏이 넘거나 부피가 큰 택배 물량은 늘어나지만, 수수료는 그대로여서 택배 기사 근로 여건은 악화하고 있다.
최근 '다산신도시'가 아파트 단지 내 택배차량 진입 금지로 논란이 됐지만, 주차장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가나 주택 밀집지, 차 없는 거리 등에서도 택배 기사들은 인근 이면도로나 도로가에 불법 정차를 하고 물건을 나를 수밖에 없다. 한 택배 기사는 "불법 주정차 딱지라도 끊기면 하루 일당이 고스란히 날아간다"며
"택배차량에 한해 일정 시간 주정차를 허용하거나, 별도의 주차장 시설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택배회사가 받는 평균 수수료도 2011년 이후 매년 하락세다. 작년 택배 1개 평균 요금은 2248원으로 전년보다 3% 하락해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 외국엔 드론·로봇 택배 날아다니는데...
국내 택배산업이 규제에 발 묶여 있지만 외국에선 로봇이나 드론을 활용한 택배, IoT(사물인터넷)를 활용한 각종 신기술이 적용된 택배 서비스가 선보이고 있다. 미국 온라인 쇼핑업체인 아마존은 고객의 접근이 편리한 편의점, 소규모 상점, 지하철 등에 택배 보관함을 설치해 고객이 온라인에서 주문한 물건을 '아마존라커'를 통해 수령하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고객이 주문한 물건을 차량 트렁크에 넣어주거나 택배 기사가 비어 있는 고객의 집 안까지 들어가 물건을 배송해 주는 서비스도 선보였다. 한국교통연구원 이지선 박사는 "급증하는 택배 서비스 수요에도 택배 서비스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규정이 부족하다"며 "택배 서비스에 대한 별도 업종화를 위한 관련 법·제도 정비 방안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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